UPDATED. 2024-04-19 09:00 (금)
어느 여고생의 시 '인생은 하루뿐'
어느 여고생의 시 '인생은 하루뿐'
  • 교수신문
  • 승인 2019.07.15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희창 동의대학교 독어독문과 교수
장희창 동의대학교 독어독문과 교수

‘국대안’(국립서울대학설립계획안)에 따라 설립되었던 서울대에서 최초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던 인물은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였다. 그 다음은 주한 미군사령관이었던 하지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이승만 대통령. 초창기 국립서울대의 ‘명예’와 ‘학위’는 이처럼 보란 듯이 권력에 바쳐졌던 것이다.


해방 이후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자생적인 교육운동들을 좌익으로 몰아 탄압하고, 국가권력의 독점 지원 하에 탄생했던 서울대로서는 당연한 보은(報恩)이었다. 미군정은 주로 친일, 친미적인 교육계 인사들의 자문을 받아 1945년 10월 21일 학교교육에 관한 훈령을 발표함으로써 식민잔재를 청산하기보다는 일제강점기 중앙집권적 교육관료 제도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그리하여 교육현장은 일제 식민통치 방식에 익숙한 교육 관료들에 의해 다시 장악되었던 것이다.


과거사 청산에 실패한 대학이 이후 ‘비판적’ 지식이 아니라 ‘기능적’ 지식을 양산해 왔을 것임은 뻔할 뻔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 대학이 대기업과 재벌의 하청기관을 자청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도 같은 맥락이다. 대학은 인문학이나 기초학문을 포기하고, 기업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교육에만 전념하고 있고, 강의실과 도서관은 취업준비의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논술이니 면접이니 하며 인문학 가치를 들먹여보지만 가당찮다. 그동안 소설 한 권 읽을 여유조차 제대로 주지 않아놓고는 아이들에게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인류 보편의 화두(話頭)나 ‘고상’한 논제들을 마구 들이대고 씨름하게 만들다니. 인문학이란 게 그냥 눈 가리고 아웅 역할이나 하고 있는 거다.


우리 아이들에게 차별과 분열은 일상이 되었다. 인문계와 실업계로 갈리고, 그 다음 인문계 안에서는 다시 대학에 가는 아이들과 못가는 아이들로 갈리고, 또 대학에 가는 아이들 중에서도 좋은 대학에 가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로 갈린다. 풀뿌리 민중의 연대와 상호부조의 원리는 한쪽 구석으로 처박히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만 무성하다. 경쟁에서 처진 아이들의 고독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인생은 하루뿐’이라는 어느 여고생의 시는 그러한 고독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녹색평론> 84호) “나는 오늘도 불안한 마음을 이끌고 의자에 앉아/ 칠판과 선생님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다 눈길을 돌리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펜을 잘 놀리는 아이들. 그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더욱더 불안해진다/ 18세 꽃다운 나이라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똑같은 나날을 반복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경쟁하며 살아간다./ 나는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것을/ 다 포기한다./ 나는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과목과 똑같은 일과로 하루를 마친다./ 아직까지 나의 인생은 단 하루뿐이었다/ 매일 똑같은 나날이었으니까.”


‘비교’하고 ‘불안’해하고 ‘반복’하고 ‘경쟁’하고 ‘포기’하며 사는 게 우리 아이들의 일상이다. 이런데도 우리사회의 연대가 허물어지지 않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영혼 없는 사회’에서 교육은 허공을 떠돈다. 이 아이들을 어찌하면 좋은가.


요즈음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인허가 폐지 문제로 떠들썩하다. 주로 고소득층 자녀들이 다니는 이들 자사고와 특목고와 외고에 의해 고교서열이 다시 생기고, 망국적인 대학서열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 동네에도 자사고가 있다.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앞 다투어 입학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점심과 기숙사 밥을 단체로 거부하는 일까지 생겼다. 졸업식장에서 졸업생 대표가 송사를 읽다가 학교를 대놓고 욕했다는 험악한 소문도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학교재단이 특정 급식업체에 장기계약을 해주는 대가로 거액을 받아 그 돈으로 기숙사를 짓고 일부는 딴 용도로 사용했다며 고발되기도 했다. 부실 사학재단의 자사고운영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케이스가 바로 우리 동네에 있었던 거다. 자사고를 존치해야 한다고? 가차 없는 전면 폐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