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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알기, 몸으로 해보기
머리로 알기, 몸으로 해보기
  • 강유원 동국대
  • 승인 2003.08.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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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강유원 / 동국대·철학
 
쿠르트 쿠젠베르크가 엮은 '침대예찬'(시공사 刊)이란 책은 제목 그대로 잠자리에 대한 찬사로 가득차 있다. 이 책에는 '위대한 침대 애호가들'이라는 챕터가 있다. 이 애호가들 중에는 "황금 침대에서 잠을 자곤" 했던 알렉산드로스, 침대에서 각료들을 알현했던 프랑스 왕들도 있지만 유명한 작가들도 있다. 이 챕터에 따르면 "괴테는 종종 침대에서 구술을" 했고, "루소, 밀턴, 마크 트웨인은 침대에서 글을 썼"으며 "데카르트는 날마다 열 여섯 시간을 침대에 누워 보냈다." "그렇게 해야 생각을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만약 잠자리에 그렇게 누워 있다가는 생각은커녕 몸이 한없이 늘어져서 결국에는 무기력해지고 말텐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침대에 누워 "생각을 잘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몸이 한없이 편안한데 생각이 어떻게 잘 굴러가겠는가. 더욱이 데카르트는 명료한 판단을 내리기 위한 규칙들을 세우고 우리가 보는 세상을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의 책―이를테면 '방법서설'이나 '성찰' 등과 같은―을 썼던 사람이다. 말랑말랑하고 안온한 침대에서 뒹굴면서 그런 날카로운 떠올랐다는 게 영 이상해 보인다. 몸이 약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데카르트도 침대가 좋긴 좋았던 모양이다.

몸은 한번 푹신한 것에 닿으면 그것이 너무도 좋아서 떨어지려 하질 않는다. 쌀밥 먹던 사람은 죽어도 보리밥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몸이란 게 원래 그런 걸까. 그러니 그 푹신한 것에서 몸을 떼어서 책상에 앉는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력이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몸에 붙은 건 쉽게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육식동물인 것은 풀을 먹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까닭에 호랑이에게 풀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의 비슷하게 인간의 정신에 뭔가를 집어넣기보다는 몸에 뭘 붙이는 게 훨씬 쉽다면, 다시 말해서 몸이 편하면 매사가 좋은 것이라면 인간은 정신적 존재라고 하기 어렵지 않을까.

아무래도 인간에게는 몸이 더 직접적이니 무슨 필요성이나 자극은 몸과 밀접한 부분에서 더 많이 일어나지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에 관련돼 일어나는 건 아닐성 싶다.

정신적인 활동의 산물이라 여겨지기 쉬운 문자의 발명과정이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까지의 증거에 따르면 문자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사람들이 발명해서 사용한 설형문자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물론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림이 문자 노릇을 했다. 그러나 먼 옛날 사람들이 그림을 왜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라스코 동굴 벽화에 그려진 들소를 보고 구석기인들이 사냥을 잘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뜻으로 그걸 그렸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보면 그건 축원의 의미가 된다. 사냥 장면을 기록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되면 말 그대로 기록화다. 그런데 문자가 왜 만들어졌는 지의 이유는 분명하다. 그 글자로 쓰여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우르크의 대신전 단지에서 발견된 진흙판에는 추수한 곡식의 포대 수와 가축의 수가 적혀 있다. 조르주 장의 '문자의 역사'(시공사 刊)에서는 이를 "사람들은 인류가 전해오는 이야기를 보존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문자를 만든 배경에는 그보다 훨씬 더 세속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 세속적인 이유는 바로 상업적 거래에서의 필요였다.

진흙판이 출토됐던 신전 근처에는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였으니 자연스럽게 그 곳을 중심으로 상거래가 이뤄졌으며 그때 그때의 거래를 기록할 필요가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성스러운 신전이 세속적인 상거래의 중심이 된 것은 우습기도 하고 묘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이는 어쩌면 사람이 모여사는 곳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몸과 마음이 서로 교묘하게 엉키는 일,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교차하는 일, 딱 어디서부터가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인간 현실의 참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오로지 몸으로만, 또는 정신으로만 이뤄지는 일이 세상에 없듯이 오로지 세속적인 것 또는 오로지 신성한 일로만 이뤄지는 일도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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