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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 『문화의 두 얼굴』(야마구치 마사오 지음, 김무곤 옮김, 민음사 刊)
본격서평 : 『문화의 두 얼굴』(야마구치 마사오 지음, 김무곤 옮김, 민음사 刊)
  • 조한혜정 연세대
  • 승인 2003.08.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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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민감했던 구조주의 인류학

[비평섹션을 기획하며]

한국문화에서 비평은 저널의 아들격이었다. 학계의 지적 담론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보다 무수한 추문의 호명 속에서 일그러진 존재로 남아야 했다. 주로 일간지 등을 통한 주마간산식, 정실 비평 행위는 풍요로운 논쟁 대신 얇은 지식의 파편화를 불러왔다. 텍스트들이 시대와의 긴장 속에서 만들어내는 위기의식이 비평의 그물망을 쉽게 빠져나갈 때 비평은 이미 늙고 소진된다. 교수신문은 앎과 삶의 소통을 위해 기존의 비평 방식에서 탈피, 작고 소박하지만 살아있는 비평문화를 모색코자 비평섹션을 신설, 당대의 문제적 텍스트들에 쟁론의 화살을 날리려 한다. 품격있는 논쟁을 향해 불타오르는 비평의 시대를 기대하면서.

 

조한혜정 / 연세대·사회학

서평을 쓰지 않은 지 오래다. 일본 문화인류학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책이라면서 서평 원고 청탁서가 날아왔다. 서평 청탁서에는 이 책이 루스 베네딕트의 연구로부터 얼마나 나아가 있는지, 일본 문화인류학의 수준은 어떠하며 또, 얼마나 탈식민화되고 있는지를 짚어주면 좋겠다는 요지의 글이 첨가돼 있었다. 학문분과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그런 주제로 서평을 한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문화는 자연에 질서를 부여한 구조다

이런 냉소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서평을 쓰기로 했다. 이유는 두 가지에서였다. 하나는 갑자기 야마구치라는 인류학자에 대한 호기심이 동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이 나온 지 28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한국에서 출간하게 됐는지가 궁금해서였다.

이 책은 '국화와 칼' 등을 통해 일본문화의 특수성을 사회문화심리적으로 풀어보려한 문화적 상대주의자 베네딕트 선생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류의 책이다. 구조주의자인 야마구치 선생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하나의 특수한 문화 a culture"가 아니라 "보편적 구조로서의 문화 culture"였다. 야마구치 선생은 그래서 문화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화는 새로운 질서를 부정형의 자연에 끊임없이 부여함으로써 성립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의 축으로서 성립하고 있는 세계관은 질서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형성되는 혼돈을 포함시키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그는 '인류 문화 일반'을 구성하는 원리를 밝히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첫 장과 두 번째 장에서 레비-스트로스가 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신화분석을 시도하였다. "풀과 나무가 아직 말을 잘 했을 때" 신이 내려와 혼돈의 상태에 질서를 부여했다는 신화를 분석하면서 그는 '강 상류'에 무서운 존재가 살고 있다는 내용은 실제로 강 상류가 무섭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분류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 대칭적 분류체계는 제사조직이나 친족조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양분제의 토대이며, 동시에 다양한 은유들을 창출해내는 사유의 토대다. 자신의 환경을 배치하는 이야기구조를 통해 추상적 사유를 가능케 한 이 능력이야말로 바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른 '유적 존재'로 만든 경계며, 야마구치 선생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탐구의 영역이었다.

야마구치 선생의 지적 탁월함은 레비-스트로스적인 구조주의를 소화하면서 현대사회의 이러한 변형생성 능력에 대한 논의를 주변성, 아웃사이더성, 경계성이라는 개념으로 세련화시켜내려고 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알프레드 슈츠와 에드문트 후설, 인류학자 로버츠 머피와 빅터 터너, 메리 다글러스, 에드문드 리치, 사회학자 피터 버거와 에드워드 쉴즈, 프라하의 구조주의자 무카르조프스키와 심지어 토마스 쿤과 미셸 푸코까지 무수한 석학과 해후하면서 그가 다듬어간 논의는 현실의 다차원성, 새로운 통합을 가능케 하는 다의성, 중심/주변 이분법 사이의 변증법적 작용과 '경계'에 대한 첨예한 인식이다.

日本의 민속학적 문화인류학 지평 넓혀

나는 이런 야마구치 선생의 '하이퍼텍스트적' 논의가 '낯선 문화'를 해석하는 데 집중했던 일본의 민속학적 문화인류학의 지평을 크게 넓혀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저작은 얼마나 오리지널한가를 묻는다면 나는 레비-스트로스의 해설판 중 수준 높은 저작이라고 말할 것이다. 구조주의를 일본 신화에 적용하거나 레비-스트로스 외 다른 많은 인류학과 철학과 사회학적 지식을 동원했다고 해서 그의 논의가 더 오리지널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서구의 지식 생산체제가 산업자본주의화와 함께 체계적으로 전지구를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만들어버린 지금에. 내가 오히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목하는 점은 그가 기존 질서를 넘어서는 '묵시론적 신화의 문법'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패자의 정신사'와 '천황제의 문화인류학'이라는 책을 펴냈다는 사실이다. '패자'의 아픔이나 신성한 '천황제'를 건드리는 지적 '실천'은 야마구치 선생이 훌륭한 구조주의자이기에 가능했던 모험일 것이며, 그 지적 모험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문화인류학을 탈식민화하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을 것이다.

야마구치 선생이 마흔 다섯 살에 펴낸 역작을 읽으면서 나는 거의 비슷한 시점에 거의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었던 "한국의 레비-스트로스" 강신표 선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두 분은 지척에 자신의 생에서 가장 좋은 지적 파트너가 될 소양의 학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 레비-스트로스를 초대하는 일로 바빴을까. 학문의 서구중심주의를 '사유'할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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