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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칼럼] 기억의 종류 (18)
[정세근칼럼] 기억의 종류 (18)
  • 교수신문
  • 승인 2019.07.0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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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도 뇌가 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기억력은 젊은 사람 따라갈 방도가 없는 듯하다. 나이가 어릴수록 공룡 이름도 잘 외우고, 만화 속 괴물 이름도 다 외우는 것을 보니 말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서 기껏 기억하는 것도 어렸을 때 외워둔 것이니 말이다. 조선시대 왕조도 그때 안 외웠으면 큰 일 날 뻔했다. 태정태세문단세~ 
미학을 하다 보니, ‘도리아 식, 이오니아 식, 코린트 식’이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그것도 어떤 면도기 회사 이름으로 기억해서 다행이었다. ‘○○○ 면도기’는 우리 학창시절에 광고를 무척이나 많이 했다. ‘바로크, 로코코’도 우리말에 ‘바로’라는 말이 있어 행운이었다. 그럼에도 도리아와 이오니아 식이 어떻게 다른지 안 것은 폴란드 미학자(Wladyslaw Tatarkiewicz)의 책을 보고서였다. 그걸 아무 생각 없이 막무가내로 외워야 했다니 젊은 시절의 교육에 회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억은 참으로 여러 종류다. 흔히 머리로만 기억하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 같이 냄새에 민감한 사람은 향기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 어디선가 났던 그 냄새 때문에 신경쓰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개가 냄새 맡는 것이 나름의 기억, 나아가 그들의 언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람이 수다를 떨고 싶은 것처럼, 개는 이 세계의 냄새를 맡고 싶어 한다. 수다로 소통하는 것이나 냄새로 교통하는 것이나 뭐가 그리 다르단 말인가. 많게는 우리보다 10만 배나 민감한 그들의 후각이다. 
촉감으로도 기억한다. 언젠가 쓰다듬어 보았던 어떤 감촉을 우리는 떠올리며 살아간다. 나의 특이한 느낌으로는 주로 물고기와 관련된다. 복어 껍질, 상어 피부, 코끼리 가죽 등이다. 그리고 보니 나는 그 셋을 다 먹어보았다. 청나라 황실에서는 이름에 걸맞게, 정확히는 가장 잘 쓰는 부분인 코끼리의 코를 요리하더라. 상어 피부를 연구해서 요즘은 입어야 잘 나가는 수영복도 만들었으니 선수들 옷도 만져보아야겠다. 복어 껍질은 맛보다는 혀로 느끼는 감촉으로 먹는다는 생각도 든다. 두릅이야 향이 가시의 촉감을 이기지만, 복어는 그런 향도 없으니. 
귀는 언어적일 때도 있지만 감각적일 때도 있어 기억의 많은 부분을 담당한다. 노랫가락 같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음악적 재능과 깊게 연관된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목소리를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아채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누구냐고 묻지 않다가, 통화중에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전화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목소리가 비슷하여 실수도 한다. 
눈의 기억도 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문양이나 장면이라고 생각하다가 알아차릴 때 기쁘다. 색깔도 그렇다. 나도 화면 기억형이라서 책을 찾을 때도 제목보다는 색깔로 찾을 때가 많다. 비유하자면, 비트겐슈타인처럼 ‘파란 책’, ‘갈색 책’(The Blue and Brown book) 이렇게 말이다. 그래서 껍데기가 벗겨지면 찾느라 헤맨다. 
그러나 정말로 신기한 것은 손의 기억이다. 시청각(視聽覺), 촉후각(觸嗅覺)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의 기억이다. 니체의 타자기처럼, 글 쓰는 방식이 달라진 이후 우리의 손은 부호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내 손이 ‘ㄱ’을 찍고 싶다고 찍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간다. 그래서 손이 기억한다는 것이다. 마치 머리가 손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손에 머리가 달린 것처럼 말이다. 뇌수(腦髓)가 아닌 뇌수(腦手)라고나 할까. 
한자가 떠오르지 않아도 손으로 쓰다보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이건 우리처럼 팔뚝에 알이 배길 정도로 한자를 써본 사람에게만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손으로 써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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