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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불교에서 ‘無의 덤’을 생각하다”
[최재목의 무덤기행] “불교에서 ‘無의 덤’을 생각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7.0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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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없이는 생명은 ‘누임-쉼-평온’의 완결성을 얻지 못한다

이 풍진의 끝자락에서, ‘대지(大地)’를 새로 읽다 
이 풍진 세상의 무명 중생들은 죽어 땅에 묻히고서야 비로소 탐?진?치의 ‘삼독심’을 그친다. ‘독’(毒)은 잘 다스리면 ‘약’(藥)이 된다. 그래서 ‘독’ 자에 만물을 길러준다는 ‘양?육’(養?育)의 의미도 있다. 죄나 업보가 구원의 근거(계기, 단서)가 되듯이 말이다. 어쨌든 중생들의 ‘마음’에는 그런 ‘독’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에이, 독한 놈들?”이라 하듯이, 숟가락 들 힘,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그저 탐?진?치의 고갱이가 스윽∼ 끈질기게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독실한 수행자들은 어떤가.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하여, 평소 욕망을 잘 여의며 살아간다. 처처(處處)가 안락국(安樂國)이다. 
하지만 대지는 천하건 귀하건, 높건 낮건, 그 모든 것들을 다 껴안고 감싸준다. 선도 선으로, 악도 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중립으로, 이것저것을 분명치 않게, 중성의 무색, 무채색으로 만든다. 뉴트럴(neutral)이다. 그래서 ‘무기’(無記)를 닮았다고나 할까. 그 힘은 한 마디로 ‘스스로∼저절로 그러한’[自然] 것이다. 절로절로 움직여 가는 힘이다. “산(山) 절로절로, 수(水) 절로절로, 그 간에 나도 절로절로”의 힘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며 우리는 끊임없이 닿고자 한다. 틈만 나면 산도 타고, 물놀이도 하면서 절로절로 속에 기댄다. 산수를 사랑하는 덕성은 차츰 언덕으로 시선이 향한다.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빠지면, 차츰차츰 눈높이를 낮춘다. 자기 가슴이나 아랫배, 무릎 높이의 작고 아담한 장소로 눈길이 향한다. 아예 땅바닥에 누우면 평지가 된다. 아니 그 이하의 낮고 깊은 ‘골’, ‘굴’ 속에 아예 숨으려 한다. 암굴(暗窟) 즉 무덤이다. 

‘산정-로고스’에서 저 낮고 깊은 ‘암굴(暗窟)-카오스’로
최승자는 『내 무덤, 푸르고』(문학과 지성사, 1993)에서 읊었다. “내 무덤, 푸르고/푸르러져/푸르름 속에 함몰되어/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그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뿐 물소리로 가득하고/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그때 비로소/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未忘 혹은 非忘 8」, 18쪽) 
무덤을 바라볼 때, 봉분은 잔디로 푸르니 ‘죽음 속의 삶의 길’을, 지하의 함몰된 곳은 명상과 침묵으로 숨었으니 ‘삶 속의 죽음의 길’을 은유한다. 그 높아지고-낮아짐, 밀고-당김의 힘, 긴장이 생성되는 곳이 무덤이다. 

원형과 사각형, 그 기하학적 형식
법정 스님이 쓴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산중에 홀로 살면 사람은 청각이 아주 예민해진다.…산중 은거자의 귀는 자신을 에워싸는 세계를 먼저 귀로 받아들인다.” 그렇다. 대지의 움직임은 소리로 가득하다. 소리는 세계의 존재들이 알리는 소식 즉 그 움직임, 속도, 이동, 위치이다. 그것은 귀가 알아차린다. 벌레들이 갖춘 감각 즉 ‘충감’(蟲感)을, 피부와 귀가 가지고 있다.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는 청각적-촉각적인 것은 ‘여성적-에로스’를 상징한다. 이에 대해 시각은 빛과 관계되며, 새들이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조감’(鳥瞰)처럼, 눈이 담당하는 기하학적-시각적인 것으로, ‘남성적-로고스’를 상징한다.     
산중의 암자 또는 언덕 위의 초가삼간은, 가만히 들여다 보면, ‘산-집’이라는 삼각(→사각), ‘언덕-지붕’이라는 반원(→원)의 결합체다. 삼각-사각은 땅으로, 반원-원은 하늘로 연결된다. 하늘은 질서-로고스의 표상이다. 사람에게 둥근 머리=영혼에 해당한다. 사람 속의 하늘의 상징이다. 삶의 고음(高音)-높음-이상이다. 몸=신체는 사각형으로, 사람 속의 땅을 상징한다. 삶의 저음(低音)-낮음-현실(現實)이다. 하늘=원형[圓]=이상은 ‘머무름 없이 변화?순환하는 시간’을, 땅=사각형[方]=현실은 ‘안정된 일상의 현실 공간’을 은유한다. 현실의 삶은 늘 이상을 향한다. 지상의 꽃과 언덕도 바라보지만, 부단히 머리를 들어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쳐다보듯, 지상은 늘 천상으로, 사각형은 끝내 원형으로 수렴돼 간다. “마음은 항상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라는 푸쉬킨의 말을 되새겨 본다.  
헌데, 원형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나 자신’이다. 중국 성리학의 에피스테메(=무의식적인 인식의 틀)를 이루는 저 렴계(濂溪) 주돈이(周敦?. 1017-1073)의 「태극도(太極圖)」에서, 태극(太極)이 둥근 원이 결국 갈래갈래 갈라진 만물들의 그것(둥근 원)이듯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가 “달 혹은 달이란 말은 많으면서 하나인, 우리의 존재”라고 읊었듯이, 사람들이 찾아 나선 둥근 달이란 놀랍게도 나 자신의 ‘쌩얼’(화장하지 않은 얼굴) 아닌가. 수많은 호수나 시내에 비친, ‘많으면서’ 그러나 결국은 ‘하나인’ 달. 이처럼 갈래갈래 얽히고설킨 삶 속에서, 조각조각 너덜너덜 흩뿌려진 수많은 나. 그러나 끝내 닿고 보면 하나로 존재하는 나.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 가도 가도 떠난 자리’[行行到處, 至至發處] 아닌가.     
어쨌든 원형과 사각형이라는 두 기하학적 형식의 결합은 우주생명의 기본이자 ‘나=자아’의 기본 형식을 이룬다. ‘나’는 흘러가는 저 무정한 시간에 제한받고, 발 딛는 공간에 제약받는다. 쇼펜하우어(1778-1860)가 ?나는 (…) 결코 공간의 바깥에 탈출할 수가 없고, 어디까지나 이 공간과 함께 간다. 그것은, 공간은 나의 지성에 부속하고, 두개골 속에 표상기계로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知性에 대하여?)라고 말한 대로, 인간은 ‘공간’과 함께한다. 한국인은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일본은 일본의 영토에서 자신의 몸을 정의하고 해석하고 제한하고 구속한다. 여하튼 시?공간은 인간을 제약하는 무의식적인 ‘형식’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든 모르든, 시공간은 우리 스스로를 조정하는 불안하고 불편한 조건들이다. 
이 가운데시간의 제한, 압박은 가장 우리를 불안케 한다. 그 최종적 불안은 죽음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의 불안 불편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다음 글을 잠시 보자. 
“LIFE IS LIKE THE SEA. …ETERNAL. YET THE LIFETIME OF EVERY WAVE IS BUT AN INSTANT. ALL I ASK IS… LET ME LIVE MY FULLEST BEFORE I CRASH TO THE SHORE”(삶은 바다와 같은 것. …영원한 것. 그러나 파도의 삶이란 한 순간일 뿐. 나의 바람이란 내 삶을 마지막까지 온전히 사는 것. 해안에 부딪혀 부서지기 전까지). - 미국 일리노이주 서든 일리노이 대학 내의 호수 가 비석에 새겨진, 22세로 요절한 대학생 Gary D. Morava(1952-1974)가 학창시절에 쓴 시이다. 파도로서의 삶, 해안에 가서 부서지기 전에 최대한으로 출렁거려 보고 싶은 삶의 힘. 이처럼 삶은 주어진 시간 내에 남김없이 태워야 할 불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왠지 죽음에 대한 콤플렉스, 유한한 삶을 구박하고 닦달하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시간에 대한 저항, 혹은 일탈. 아니면 의도적 망각 혹은 삭제를 원하는 인간의 얄팍한 마음들. 시간의 불안은 버리고, 공간은 덜 불안하니 그대로 두고. 뭐 이런 식이면, 둘 사이의 교란-어긋남-삐걱거림은 당연하다. 이것은 현재 우리 삶의 분열을 의미한다. 예컨대 현대예술에서는 원-원형과 사각-사각형의 형태 사이에 분열이 현저하다. 아닐라 야페는 말하듯이, “거의 관련이 없거나 대체로 엉성한 배치 속에서만 등장한다. 원과 사각형의 분리는 20세기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의 영혼은 뿌리를 잃고 분열의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지상의 모든 둥근 형태들은 결국 태양의 원(圓)에 귀속된다. 무덤, 구릉, 언덕, 산봉우리도 그런 연관과 계보 속에 살아 움직이며 의미를 갖는다. 조은은 『무덤을 맴도는 이유』(문학과 지성사, 1996)에서 말한다. “알 수가 없다/내가 자꾸 무덤 곁에 오게 되는 이유/무덤 가까이에 몸을 둬야/겹겹의 모래 구릉 같은 하늘을 이고/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무덤처럼 형체를 갖는 이유”(「무덤을 맴도는 이유」, 80쪽)라고. 무덤?모래구릉?하늘처럼, 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다.  
산이나 언덕의 둥그스름한 곳이 더욱 더 낮아지면 모두 무덤으로 간다. 봉분으로 남았다가 그것마저도 평지로 변한다. 그 밑은 무엇인가.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白骨爲塵土魂魄有也無]”(포은 정몽주의 丹心歌)의 경지, 혼돈(카오스)의 지하로 내려선다. 높은 산정-로고스에서 낮고 깊은 암굴(暗窟)-카오스로 향하는 것이다. 그곳은 융이 말하는 대로, ‘아래쪽-어두운 곳-심층-최하층-나(자아)를 잃어버림-물질성-화학물질-탄소-세계 자체’이다. 그곳은, 13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가 읊은 ‘여인숙’처럼, 모든 것을 환영하고 수용한다.     
          
      인간이란 손님이 머무는 집,/ 날마다 손님은 바뀐다네./ 기쁨이 다녀가면 우울과 비참함이, 때로는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네/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다 가도록 환영하라!/ 때로 슬픔에 잠긴 자들이 몰려와/ 네 집의 물건들을 모두 끌어내 부순다고 해도/ 손님들을 극진하게 대하라./ 새로운 기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일 수도 있으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마음, 사악한 뜻이 찾아오면/ 문간까지 웃으며 달려가 집안으로 맞아들여라./ 거기 누가 서 있든 감사하라/ 그 모두는 저 너머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손님들이니. 

눈물겹다. 모든 것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는-맞이하는’ 땅은 성스럽다. 성토(聖土)라 해야한다. 겹겹의 아우라를 가진 눈부신 저 땅의 침묵과 부름을 우리는 아는가. 누가 진짜 주인인가. 몸인가. 땅인가. 

로고스는 ‘높이높이’, 카오스는 ‘깊이깊이’
산은 높은 봉우리(산정), 어중간의 언덕이나 평지, 낮은 골짜기를 함께 가졌다. 깊은 산 속에 산다는 것은 두 발의 한쪽은 ‘우뚝 솟아오름-삶’에다 다른 한쪽은 ‘깊이 잠김-죽음’에다 몸을 둔 것이다. 형체-질서와 비형체-카오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서 있던 직립의 몸통들은 모두 산 속의 땅에 묻힌다. 그래서 산 속의 생활은 생과 사, 그 양면을 동시에 살아가는 묘한 방식이다. 법정스님은 이 대목을 짚어둔다. 

  이제는 다시 산의 살림살이에 안주할 때가 되었다. 옛 선사의 법문에, 

  때로는 높이높이 우뚝 서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
  有時高高峰頂立, 有時深深海底行

  이런 가르침이 있는데, 안거 기간은 깊이깊이 잠기는 그런 때다. 그 잠김에서 속이 여물어야 다시 우뚝 솟아오를 수 있는 저력이 생긴다. 

로고스는 ‘높이높이’를, 카오스는 ‘깊이깊이’를 지향한다. 살아서는 산의 정상, 정수리처럼 우뚝 솟아 높아지고자 한다. 고고함의 표상이다. 그랬던 것들이 차츰 낮아져서 평지, 그것은 다시 그 이하의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다. 암굴이라는 고요하고 깊은 은폐와 말소의 경지를 향한다. 그윽하고도 또 그윽하다는 『노자』 (왕필론) 제1장의 ‘현지우현’(玄之又玄)처럼, 카오스는 보다 더, 점점 더 깊은 곳(=심층)을 향해가서 결국 ‘세계 그 자체’가 된다. 종교의 명상과 수행은 보통 이쪽으로 향한다.  
흙과 땅, 기름[養]-묻음[葬]
그런데, 심층 세계를 담당하는 대지는 카오스 쪽에서 로고스를 분해?해체하기도 하지만 카오스를 다시 로고스 쪽으로 이끌어 재생?생성하는 힘을 갖고 있다. “흙은 땅이 생물들을 게워내는 것이다(土, 地之吐生物者也)”(『說文解字)』) 다시 말하면 “흙은 (생물들이 자라나는) 밭이다(土, 田也)”(『爾雅』)) 중국고대 신화 속에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는 여신 여와(女?)는 이 세상에 하늘과 땅이 막 생겨나 인간은 없었던 때, 그 쓸쓸한 풍광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어, 누런 흙과 물을 섞어 진흙을 만들고 여기에 끈을 늘어뜨려 잡아당겨서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인간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처음 인간은 그 흙에서 나왔다. 흙과 땅은 중국 고대인들이 믿어온 저 “생유소양(生有所養), 사유소장(死有所葬)[살아서는 양생이 있고, 죽어서는 매장이 있다]”이라는 가장 기초적 기능을 담당한다.
법정스님은 말한다. “대지의 맨살에 닿는 것은 좋은 일이다.” “대지는 단순한 흙이 아니다. 흙, 식물, 그리고 동물이라는 순환을 통해 흘러가는(움직이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땅과 접촉하고 흙에 뿌리박은 삶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은 자양분을 공급하는 흙으로부터 차단되면 살 수 없는 나무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흙을 가꾸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대지의 맨살=살갗은 늘 우리를 부른다. 흙은 죄를 지은 자이든, 탕자들이든 귀환하는 것들은 누구나 부드럽고 자비로운 손가락으로 어루만져서, 죄다 받아준다. 흙의 세례로 인간은 세계의 에너지에 합일한다. 
그렇다. 대지의 흙 없이는 생명은 누임-쉼-평온이라는 완결성을 얻지 못한다. 마무리는 흙이 한다.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는 힘, 그것이 결국 우리를 깊은 곳으로 안내하고 감춘다. 땅의 감춤이라는 권능 즉 지장(地藏)은 힘이다.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듯, 땅에도 생(生)→장(長)→수(收)→장(藏)의 내공이 있다. 이 가운데도 주인공은 ‘장’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에서 ‘사-공-멸’이 주인공이듯 말이다.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의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1918-1922)에서 읽는 듯한, 퇴보-퇴락-몰락-소멸의 위기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슈펭글러는 말한다: 역사에서 봄은 신화의 시대이며, 여름은 종교개혁이나 철학?수학의 형성기이다. 가을은 이 지적(知的) 성과의 계몽과 발전, 체계화의 시대이고, 겨울은 반대로 과학이나 수학이 쇠퇴하고 인생론적인 도덕만이 문제된 시대이다. 이 춘하추동의 사이클은 고대 호메로스, 헤시오도스의 봄에서 피타고라스의 여름, 소피스트, 소크라테스의 가을을 거쳐,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겨울 시대로 쇠퇴해갔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세계는 중세 스콜라의 여름, 루터나 갈릴레이, 데카르트의 여름을 거쳐, 괴테, 칸트, 헤겔의 가을을 맞이하며, 최후에 마르크스나 쇼펜하우어, 니체의 겨울에 이른다. 이 네 계절이 변화하여 결국 모든 것은 쇠퇴, 사멸해버렸다는 프로세스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섭리. 마찬가지로 사상의 역사도 맹목적인 섭리에 따라서 긍극에서는 몰락해버리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단면적이다. ‘시종’(始終)만을 읽었을 뿐, ‘종시’(終始)-끝은 다시 시작임을 모르고 한 말이다.  

불일암 앞 법정스님 사진과 빠삐용의자 방명록
불일암 앞 법정스님 사진과 빠삐용의자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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