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盲目에서 벗어나기
盲目에서 벗어나기
  • 정진상 경상대
  • 승인 2003.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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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정진상/경상대 사회학

전공이 뭐냐고 물어올 때면 난감할 때가 많다. 마지못해 사회학이라고 대답해도 또 뭐냐고 물어오면 더욱 곤혹스럽다. 사실 내 전공이 무언지 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전공을 분명하게 나누는 제도에 대해 영 마땅찮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각 분야의 전문가를 요구하는 ‘지식기반 사회’ 건설에 역행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밝혀낼 수 있을까. 공부를 시작하면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오늘날 분과 학문들이 점점 더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이 여러 분과학문으로 나뉜 것을 선의로 해석하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총체인 사회를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사회과학이 분과학문으로 분리된 다음에는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압도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학문 분업의 제도화가 그 틀거리를 제공했다. 미국식 대학제도가 그러한 분업을 더욱 고착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결정적인 것은 자본주의체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힘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자본주의는 형식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상품소유자들의 사회적 관계이다. 경쟁하는 개인들은 시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시장에서 개인들은 자기 것만을 추구할 뿐 전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가져도 소용이 없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 시장이 잘 작동할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신화에 불과하지만, 아담 스미스는 시장을 지배하는 힘이 인간이 아니라 물질적인 법칙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읽었다. 맑스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성격을 ‘무정부성’으로 파악한 것은 시장의 맹목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본주의의 총체성, 즉 자본의 논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분업체계 속에 포섭되어 있는 한 누구도 사회 전체의 작동을 파악하기 어렵다. 분업과 전문성은 자본주의의 도덕이 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분업이 전체주의적이라면, 자본주의의 분업은 탈총체적이다.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비유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숲은 나무들을 모아놓으면 되지만, 부분들을 아무리 합쳐도 자본의 논리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분업체계 속에서 부분에 ‘전문적으로’ 매달려 있는 한 자본주의는 영속한다. 이는 맹목적인 자본의 거대한 음모가 아닐까. 

총체성의 관점에서 비판의 칼날을 세우지 않으면 분과 학문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이러한 음모에 걸려들어 맹목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히 심각하다. 입시교육으로 일원화된 중등교육이 총체의 관점을 훈련시킬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가뜩이나 허술하던 대학의 교양 교육이 신자유주의 바람으로 위축되고 있는 현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학교 바깥에서는 위기에 처한 자본이 동원하는 시장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시장의 요구’와 ‘경쟁력’ 담론이 온 사회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맹목적인 자본의 논리는 이렇게 관철되고 있다.

이러한 맹목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회과학하는 사람들의 첫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어떤 연구주제를 잡던 총체적 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리고 어떤 과목을 가르칠 때에도 자본의 논리에서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공이 뭐냐는 물음이 달갑지 않은 것은 그 질문에 맹목성의 혐의를 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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