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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산(恒産)’에 관하여
‘항산(恒産)’에 관하여
  • 교수신문
  • 승인 2019.06.2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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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박진영의 ‘살아있네’를 들으며 웃었던 적이 있다. 레코드판이 다섯 개가 되고 카세트테이프가 시디가 되고 10년이 지나 20년이 지나도 살아있다는 가사였다. 이 가사는 씁쓸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나도 연구서가 다섯 권이 되고 논문들이 수십 편이 되고 10년이 지나 20년이 지나도 살아있다.

나는 창의적으로 연구하고 학생들을 정성껏 지도하는 전공교수가 되고 싶었다. 꿈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나는 선택한 문학연구자의 자리에 만족한다. 아침이면 책을 읽고 논문을 구상하는 일은 상쾌한 하루를 위한 제 1의 일과이다. 번역, 글 수정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는 데 익숙하다. 최근에는 비교문학논문을 쓰는데, 일제치하 문인의 비극적 생애와 주체적 의식에 연민과 경외를 느낀다.

근대시 형성기 우리조상은 당시 서구문인에 비할 때 소박한 어법을 쓰지만 그들의 시인의식과 철학은 세계 어느 문인보다도 탁월하였다. 문학연구를 진행할수록 우리문학과 우리문인을 향한 애착은 더해가며 세계문학사의 지형도에 그들의 자리를 빛나게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해간다.

나는 문학연구를 향한 ‘기대’와 ‘설렘’이 해가 지나도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에 만족한다. 인문학은 좋아서 하는 것이라는 위안이 하나의 신념이 된 지 오래다. ‘잡념’과 ‘근심’과 ‘미움’을 떨구지 못하면 다른 시공간 세계로는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한다.

‘항심(恒心)’으로서 그 세계에 접근해야만 비로소 ‘항산(恒産)’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최근, 나는 비교문학연구의 일환으로 S.스펜더의 어려운 시집을 번역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음의 비움’은 풀리지 않던 시구들에 ‘기대’와 ‘설렘’을 갖게 하였고 그 시구들이 오히려 새로운 세계와 그 주인을 향한 문을 열도록 안내하였다. 그러한 결과물과 견주어 상관관계를 지닌 당대 우리시인의 소중한 결과물을 세계문학사의 별자리로서 빛나게 하는 일은 문학연구자로서 의미가 깊었다.

최근, 나는 책을 읽고서 그 주인의 삶과 문학 그리고 당대의 문학적 지형도를 그리는 일에 관심을 지니고 있다. 그 지형도가 뜻밖에, 의미 있는 논거들로서 이정표가 그려질 때 ‘나는 참 운이 좋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이 체험은 어떠한 책, 시인 혹은 이론서라 하더라고 그것을 통어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나의 번역서 『서술이론』 (소명, 2015-6)은 16명이 넘는 서구문예이론가의 논문집으로서 원서가 큰 사전크기로 660쪽이 넘는 것이었다. 10여 년 전부터, 나는 처음 1-2년은 하루 12시간 번역하였고 이후에는 전공공부와 강의와 병행하여 하루 3시간 작업하였다. 그 책은 인간의 ‘서사’가 문학, 시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법, 미디어, 형이상학, 나아가 나의 삶 전반까지 연결된 것임을 체감하도록 하였다. 

나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문학연구를 지속할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한다. 그리고 문학연구의 후학자들을 위해 연구의 매진이 대학 전공교수가 되는 정석이 되길 바란다. ‘항산(恒産)’은 가르치는 자의 덕성 곧 ‘항심(恒心)’의 형식인 것이다.


최라영 수원대학교 객원교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전문분야는 현대시, 비교문학, 문예이론 등이다. 저서는 『김춘수 시 연구』, 『김억의 창작적 역시와 근대시 형성』 , 『서술이론』1-2, 『현대시 동인의 시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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