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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내면의 순수지속
봉준호 내면의 순수지속
  • 교수신문
  • 승인 2019.06.1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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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가 우리에게 던져준 낭보, 최고대상 황금종려상수여라는 수식어는 단칸셋방에서 살던 서민에게 복권당첨의 엄청난 기적이 도래한 것 만큼이나 놀랍고 흥분시키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 놀라움의 이면에 도사린 인생의 의미나 사회학적 해석의 일단은 그저 서민적 기쁨 이상의 깊은 외침이 있음도 또한 기억되어야 한다.

봉준호 영화가 한국에 혹은 세계에 어떤 영향을 준 부분이 있다면 생명의 지속이라는 베르그손의 철학개념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지속이란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변화가 의미하는바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인간내면의 풍경은 인간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는 점진적 의지, 신성한 숙고의 단면을 묵상하고 있다는 말이다.

봉준호감독이 단 순간에 거머쥔듯 착각하게 만드는 미디어의 온갖 화려한 수사나 현란한 카메라 플래쉬세례를 장막 걷듯 다 걷어내면 그에게 소금처럼 하얗게 남는 것은 그동안 먼지 앉듯 누적되고 켜켜이 쌓아 올려진 만만찮은 그의 찬연한 이력이다. 벌써 진작부터 이 작품을 다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친숙하게 작품을 보러 가는 관객들도 일부 동의할 듯한 사항중 하나는 <기생충>이란 화제의 영화는 봉준호의 전생애를 압축시켜놓은 전작들의 복합품이라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최초의 <기생충> 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 과하지도 않다고 볼수 있는 근거는 첫 작품이면서 흥행에 철저히 실패한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찿아진다. 집 잃은 강아지를 찿기위해 달렸던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젊고 희망찬 서민부부가 발견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도시빈민의 모습이었다. 도시의 알수 없는 어둠이 비단 도시빈민 만이 아니라 그들이 벌이는 음습하고도 변태적이라고 밖에 상상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사실은 극악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연상케하는 <살인의 추억>에서 정당화된다. 이 모든 악의 꽃들이 도시와 중산층과 화해양립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계급갈등에서 양육되고 산종되었음을 알게되는 것은 <설국열차>에 올라타면 확연히 알게 된다. 이 모든 도시 악과 어둠 세력과 싸움에서 봉준호가 제안하는 전략전술은 유일한 혈연공동체 가족에 대한 믿음과 의지의 실천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그의 영화속 인물들 움직임조차 의지의 지속에 다름 아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 현실의 닫힌 문앞에서 봉준호 감독이 점점 더 강조하게 되는 것은 돼지 옥자를 탈출시키면서 휴머니즘의 갈구로 나타난다. <기생충>이 그 모든 사연들을 다 담고 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이 그를 일관된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장인의 경지로 올려보낸다. 이러한 변화의 지속이 없이 과연 봉준호가 칸의 주인이 될수 있었을까 놀라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봉준호를 통해 새삼 느끼게 되는 사실은 인간영혼은 기본적으로 사유적이고 성찰적이며 고귀하고 끝없이 진화하며 성장한다는 믿음이다. 인간이 스스로 내부와의 싸움을 통해 더욱 단단해져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이 추구하는 높은 이상이 아닐까 싶다. 만일 그 비장한 싸움이 없었다면 영화는 그저 단순한 오락의 한 순간만을 추구하다가 사그러드는 서글픈 흥행사의 얼굴만을 보였을 테니까. 문명사회는 발전하는가, 멸망하는가. 봉준호의 수상을 통해 한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지켜본다는 것은 모두에게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는 흥미로운 사건이기도 하다. 상을 통해 돈을 벌거나 명예를 올리는 건 두 번째다. 봉준호같은 인간이 추구하는 일이란 기본적으로 하나의 일이 여러 얼굴을 하고 조금씩 변화하면서 성장하는 일이다. 과거의 봉준호, 지금도 같은 봉준호지만 다른 이유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내용을 조금씩 다르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다르면서도 같은 것, 그게 바로 진지한 인생이고 진리다고 생각한다.

정재형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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