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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계급, 인종의 좁은 교차로를 택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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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19.06.0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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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역사 / 20세기 영국사 연구의 발자취-영국 여성참정권 운동과 제국
햄튼코트 앞에서 여성참정권 신문을 팔고 있는 소피아 둘렙 싱
햄튼코트 앞에서 여성참정권 신문을 팔고 있는 소피아 둘렙 싱

 

2018년은 영국 여성참정권 100주년의 해였다. 1918년 2월 선거법 개정으로 30세 이상 여성 중에서 가구주 혹은 가구주의 아내, 연간 5파운드 이상 지대 납부자, 대학졸업자에 한해 선거권이 주어졌다. 21세 이상 성인남성에게는 제한 없이 선거권이 주어졌다. 21세 이상 남녀 보통선거가 이루어진 것은 1923년이 되어서였다. 여성참정권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홀에서는 「목소리와 투표권: 의회에서 여성의 지위」전(展)이 열렸고, 여성의 정치적 시민권 성취를 기념하는 동시에 여전히 존재하는 유리천장과 사회경제적 성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미투’와 ‘페이 미투’로 거세게 터져 나왔던 한 해이기도 했다. 노동당 여성 의원 로라 크리시는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조차 남녀 임금 격차가 존재한다고 폭로하며 ‘페이 미투’ 운동을 전개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여성참정권 운동가의 동상 건립은 무엇보다도 기억할 만한 일이었다. 2018년 4월 24일 국회의사당 앞 의회광장에는 여성참정권단체전국연합(National Union of Women's Suffrage Societies, 이하 NUWSS)를 이끌었던 서프러지스트(suffragist) 밀리센트 가렛 포싯(Millicent Garrett Fawcett)의 동상이 새로 건립됐다. 의회광장은 윈스턴 처칠, 로이드 조지 등 역대 수상들의 동상부터 시작해 넬슨 만델라와 간디의 동상이 차례로 건립된 기억의 정치 공간이다. 서프러지스트란 1860년대부터 등장한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을 말한다. 1830년대 차티즘에 참여한 여성들이 여성의 정치참여를 주장했고, 1866년 2차 선거법개정 때 자유당 의원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 선거권이 포함된 수정안을 제출해 의회에서 표결했지만 부결되었다. 밀의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서명과 청원운동을 했던 여성들은 실패와 좌절을 딛고 전국적 조직을 갖추어 갔다. NUWSS는 포싯과 리디아 베커(Lydia Becker)가 1897년에 결성한 전국 단위의 단체로서 실내모임, 집회, 서명, 청원 같은 온건한 방법으로 여성참정권을 주장했다.

1911년 인도여성 서프레저트
1911년 인도여성 서프레저트

 

한편 준법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온건한 방법을 채택한 NUWSS의 노선으로 참정권을 회득하는데 실패하자, 1890년대 후반부터 유리창 깨기나 방화 같은 과격한 방법도 불사하는 전투파 운동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을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고 부르는데, 『데일리 메일』지가 1906년 ‘작은 서프러지시트’라는 의미로 ‘suffragette’ 라는 별명을 붙인데서 유래했다. 서프러제트의 주역은 에멀린 팽커스트(Emmeline Pankhurst)와 두 딸 크리스타벨, 실비아가 결성한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이하 WSPU)이었다.
여성참정권운동과 제국, 인종 문제에 관한 연구는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주제이다. 영국 국내 정치 영역을 넘어서 제국이나 인종의 변수를 도입했을 때 여성참정권운동의 시민권 획득 전략은 어떻게 다르게 또는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을까? 2015년 개봉한 영화 〈서프러제트〉는 모드 왓츠(Maud Watts)라는 가상인물을 통해  노동계급 여성들이 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이라는 비판도 일었는데 ‘유색인’ 서프러제트 여성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색인 서프러제트는 인도 시크왕국의 공주로 서프러제트가 된 소피아 둘리프 싱(Sophia Duleep Singh)을 말한다. 그녀는 팽커스트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서프러제트의 ‘스타’였다.
여성참정권운동과 제국, 인종의 연관성을 살피는 방법에는 여러 각도의 접근법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영국 참정권운동에 헌신했던 ‘유색인’ 여성에 대한 역사서술의 부재를 지적하고 이들의 존재를 발굴하고 부각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제국의 범위로 확장하는 접근법이다. 본국(metropole), 자치령(dominion), 식민지(colony) 같은 여러 층위의 법적 영토를 포괄하는 제국의 범위로 여성참정권운동을 확장해 보는 것이다. 영제국 네트워크 속에서 각 지역의 여성참정권운동은 ‘태풍의 중심’이라 불렸던 본국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고유의 맥락과 역사를 갖는 독자적인 운동이었다. 영국의 리더십이나 지도력은 필요하지 않았으며, ‘전 지구적 자매애’, ‘보편적 전략’ 같은 것은 사실상 없었다. 각 지역의 여성참정권을 운동을 차례로 분석해 영제국의 여성참정권운동사를 완성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참정권운동이 시민권을 정의하고 활용하는 방식과 제국의 정치라는 계기는 어떻게 결합되어 있었는가를 살피는 접근법이다. 이 글에서는 마지막 접근법을 취하고자 한다. 참정권은 여성이 국민이 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를 얻는 과정에서 제국과 인종, 계급과 젠더는 언제나 교차하는 요소였다. 제국과 인종이 여성참정권운동과 어떻게 관련되었는가 살펴보기 위해 첫째, 남아프리카전쟁(1899년~1902년) 시기 여성참정권운동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에 주목할 것이다. 둘째, 1차 대전 시기 제국과 인종에 대한 상반되는 인식을 크리스타벨 팽커스트과 실비아 팽커스트의 경우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1911년 행진-잔다르크
1911년 행진-잔다르크

 

남아프리카전쟁과 여성참정권운동의 변화

영국에 있어서 남아프리카전쟁은 1815년에서 1914년 사이에 가장 규모가 크고,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가장 굴욕감을 안겨준 전쟁이었다. ‘마페킹의 포위’ 사건에서처럼  영국군대가 ‘열등한’ 보어인과 싸우면서 고전한다는 보도는 국가효율이 땅에 떨어지고 영제국은 퇴화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불을 지폈다.
남아프리카전쟁의 명분은 에이트란더의 참정권 문제였다. 1881년 트란스발이 보어인 공화국이 된 후 에이트란더라고 불리는 외국인의 참정권 제한 문제가 떠올랐다. 에이트란더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북미에서 이민 간 이주민들로 금광과 다이아몬드광 관련업 종사자들이었다. 전쟁의 실제 목적은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우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명분은 보어인의 독재정치 아래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과 노예 처지에 놓인 에이트란더 및 영국인의 자유를 되찾아 준다는 것이었다.
포싯은 여성운동 진영에서 전쟁에 찬성한 매파 중의 한 사람이었다. 포싯은 전쟁을 기회로 보았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국가를 위해 ‘복무’한다면 시민권을 얻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포싯은 즉각 전쟁 지원 활동을 개시했는데 남아프리카의 영국 정착민에게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하고, 강제수용소 실태조사 위원회 활동을 했다. 포싯은 7명으로 구성된 정부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포싯의 전략은 에이트란더와 영국 여성의 유비를 통해 참정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에이트란더와 중간계급여성은 둘 다 국가에 기여하고 있는데도 정치적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포싯의 유비에서 영국 백인중간계급여성은 남아프리카 백인남성과 동일시되고 있고,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 포싯은 아프리카대륙에 한 몫 잡으러 진출한 백인남성 식민자의 정치적 권리 주장에 기대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914년 여성의 전함 표지.
1914년 여성의 전함 표지.

 

더구나 포싯의 이런 시민권 모델은 인종적 계서제를 전제하고 있었다. 보어인은 비록 열등한 백인이지만 토착 아프리카인 보다는 영국인에 가깝기 때문에 참정권의 범위에 들어갔지만 토착민의 참정권은 논외였다. 포싯에게는 “법 앞에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의 목표였지만, 그 법은 “모든 인종의 사회적 평등”을 의미하는 법이 아니었다. 결국 포싯의 남아프리카에 대한 구상은 영국의 법아래 영국인과 보어인이 나란히 상위를 차지하는 인종과 계급의 매트릭스를 구축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이자 제국주의적 페미니스트로서 포싯의 태도는 사실 일관된 것이었다. 1893년 뉴질랜드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했을 때, 포싯은 논평에서 본국에는 여성 참정권이 없는데 식민지 뉴질랜드에는 참정권이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했다. 마오리족 여성도 참정권을 행사하는데 영국여성에서 참정권이 없다며 화를 냈다.
한편, 또 다른 시민권의 모델은 ‘복무’가 아니라 ‘동의’에 근거한 시민권 주장이다. 남아프리카전쟁에서 친-보어파는 국가와 여성시민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설정하고자 했다. 친-보어파는 보어인의 지배에 고통 받는 토착 아프리카인의 해방자 영국이라는 정부의 선전을 위선이라고 공격하면서, 이를 통해 여성참정권운동 진영은 새로운 전략, 용어, 조직을 개발했다. 동의에 의한 시민권 사상에서는 민주주의란 인민의 지배이고,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동등한 참정권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남아프리카에서 백인참정권은 아프리카인에게도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전쟁은 1905년 이후 전면에 등장하는 미래의 서프러제트 활동가들이 정치적 자각을 시작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전쟁기에 급진주의, 진보주의, 사회주의,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진보사상의 세례를 받은 서프러제트가 등장했고, 그들 중에는 팽커스트가 모녀들, 프리데릭 퍼식 로런스(Frederick Pethick Lawrence), 샬롯 데스파드(Charlotte Despard), 도라 몬테피오레(Dora Montefiore) 등이 있었다. 몬테피오레는 전쟁 기간 중 납세거부운동을 벌였다. 1904년에는 납세거부로 기소됐고, 1906년에는 자기 집에 6주 동안 스스로를 감금하고 세금납부를 거부했다. 이 사건은 “마페킹의 포위”에 빗대 “몬테피오레의 포위(Siege of Montefiore)”라고 불리며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몬테피오레 같은 급진적 시민권 주장은 소수의견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서프러제트의 경우 제국의 선거권 문제는 여성참정권 주장을 위한 수사일 뿐이었고, 인종화된 시민권이나 백인우월주의와 절연한 것은 아니었다.

1915년 브리타니아 표지.
1915년 브리타니아 표지.

 

1차 대전과 서프러제트

서프러제트 내부에서 제국과 인종에 대한 태도는 1차 대전을 계기로 극명하게 갈렸다. 한편에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에멀린과 크리스타벨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가 있었다. 에머린과 크리스타벨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즉각 전쟁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전쟁 중에는 참정권 캠페인을 자제할 것과 전시노동에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두 사람의 민족주의적 태도는 어머니나 언니와는 달리 전쟁 중에도 참정권운동을 계속하며 이를 반전평화운동과 결합시켰던 실비아와는 대조적이었다.
먼저 에멀린과 크리스타벨의 경우를 보자. 서프러제트 중에 인도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서프러제트가 인종문제에 대해 진보적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에멀린은 말년에 보수당 지지로 돌아섰다. 에멀린이 보수당 지지로 선회했던 이유는 전쟁이 끝난 후에는 크리스타벨과 함께 창당했던 여성당이 큰 호응을 얻지 못한데 실망했던 것도 있었지만, 보수당이야말로 영제국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공산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정당이라고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에멀린과 크리스타벨의 지지는 1차 대전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그 이전부터도 보였다. 1911년 WSPU는 스펙터클한 행진을 기획했다. 국왕 조지 5세의 즉위식 일주일 전인 6월 17일에 열린 ‘여성들의 국왕 즉위식 축하행진’이었다. 런던 시내 중심가에서 열린 이 행진에는 전국의 여성조직 뿐만 아니라 잔 다르크 분장한 서프러제트, 인도 전통 복장한 인도 서프러제트가 참가했다. 절정은 영제국의 단합을 상징하는 ‘제국의 꽃수레’ 행렬이었는데, 맨 위에는 동양과 서양을 표상하는 두 여성이 올라가 있고, 그 밑단에는 해외 자치령을 상징하는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크로이던의 서프러제트 여성들이 꽃수레 뒤를 따랐고 꽃수레 앞과 뒤에는 잉글랜드의 상징인 ‘장미 갈란트를 든’ 젊은 여성들이 걷고 있었다. 행진의 목적은 새 국왕에게 여성참정권을 지지해달라는 취지였지만 조지 5세는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로서 크리스타벨의 면모는 급진적이었지만 전쟁에 대한 태도는 애국주의로 넘쳐났다. 크리스타벨의 전투성은 제국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남성을 상대로 하는 성전쟁(sex war)에서 과격하게 타올랐다. 페미니스트들은 성병 문제를 남성 부도덕 규탄과 여성 권리 주장의 기회로 삼았다. 특히 매독에 대한 공포감을 증폭시켜 남성의 악덕을 과장함으로써 남성의 타락으로부터 여성이 자신의 몸을 보호할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다. 나아가 크리스타벨은 이를 여성참정권에 연결시켰다. 1913년에 쓴 팸플릿에서 그녀는 “여성에게 참정권을, 남성에게 정절을!”이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크리스타벨은 당시 성인 남성의 80%가 임질에 걸려 있으며 상당한 수의 남성이 매독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퇴화”를 초래하는 남성의 성관념과 성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1915년 에멀린과 크리스타벨은 WSPU의 기관지 『서프러제트』를 『브리타니아』로 바꿔 발행했던 반면, 실비아는 1914년 『여성의 전함(戰艦)』을 창간했다. 1913년 무렵 에멀린과 크리스타벨은 실비아는 결정적으로 멀어졌다. 『브리타니아』의 표지에는 “국왕과 국가와 자유를 위해”라고 쓰여 있다. 반면, 『여성의 전함』 표지는 전쟁의 참상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고통 받는 민중들로 표현했다. 자본가와 군국주의자들이 예수 뒤에서 돈주머니를 들고 웃고 있고,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두 병사, 그 아래로는 병사들의 시신과 슬퍼하는 어머니상이 보인다. 십자가 위에는 “애국주의로 충분하지 않다”고 쓰여 있다. 애국주의는 전쟁의 희생자를 낳을 뿐이라는 비판이다. 내용 면에서도 두 신문은 대조적이었다. 『브리타니아』에는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애국시가 실었고, 평화주의는 질병이라고 공격했으며, 제국의 영웅 ‘애국자’와 겁쟁이 ‘평화주의자’를 대비시켰다. 반면, 『여성의 전함』은 군국주의와 징병제, 무기산업이 자유를 침해한다고 공격했다.

1911년 행진-제국의 꽃수레.
1911년 행진-제국의 꽃수레.

 

여성참정권, 그 이후   

참정권 획득 이후에 여성해방의 과제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는 남겨진 과제였다. 흥미로운 사례는 파시스트로 변신한 서프러제트였다. 서프러제트에서 파시스트로 전향한 메리 리처드슨(Mary Richardson)은 ‘선거’는 ‘빈 수레’이며 ‘민주주의’는 ‘침몰하는 배’라고 비난하며 과거 참정권 운동의 장외투쟁 방식과 전투성을 파시스트 운동에서 부활시키려고 했다. 엘리트 정치인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현재 영국 의회정치는 대중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에 직접 정치의 방법으로 파시즘을 택했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는 1913년 노동당에 가입했고, 1918년 레닌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실비아는 1913년 이스트런던에서 노동계급 여성을 조직화하려고 했고 노동계급 여성을 해방의 중심에 놓으려고 했다. 중간계급 여성이 노동계급 여성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실비아는 노동조합과 힘을 합치려 했고, 참정권운동을 사회주의,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같은 더 넓은 지평의 운동들과 연결하려고 했다.
여성참정권운동이 전개된 시기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및 반제국주의와 동시대였다. 페미니스트의 사회운동과 민족주의의 관계가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였고, 페미니즘은 민족주의에 의해 다시 구성되는 양방향적인 것이었던 것처럼, 제국주의 시대 여성참정권운동이 민족과 제국의 언어를 차용하거나 부정하며 전개되어 나갔다. 여성참정권 운동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시대에 반(反)민족주의와 반(反)제국주의라는 ‘외로운 목소리’를 냈던 운동이 아니었다. 실비아 팽커스트와 같은 페미니스트의 입장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자매애와 평등한 선거권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민족중심주의와 인종주의와 손을 잡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보편적 인간해방으로서 페미니즘은 성, 계급, 인종의 교차로를 따라 생겨나는 좁은 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사상이었다.

염운옥 고려대 강사
염운옥 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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