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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진인사(盡人事)한 경험만이 우리를 단련시킨다
[북소리] 진인사(盡人事)한 경험만이 우리를 단련시킨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5.2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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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흔하디흔한 말이 있다. 그러나 ‘진인사’라는 단어를 체감할 기회는 의외로 많지 않다. 거의 모든 세상사가 70~80% 언저리만 가도 용인되는 까닭이다. 다만 아주 가끔, 세상이 정한 합격선에 만족하지 못해 몸부림을 칠 때가 있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할 때도, 피곤에 절어 잠이 들면서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원인은 하나였다. 벌써 석 달 전쯤에 때깔 좋은 옷을 입혀 세상에 내보냈어야 할 원고를 최종교정 단계에서 미적거리며 끌어안고 있었다.
제일 큰 난관은 제목을 정하는 일이었다. 이 책의 일본어판 원제는 《후쿠이 모델-미래는 지방에서 시작된다》였다. 내용이 아무리 재미있고 실용적 가치까지 가득 담았다 한들, 이 제목에 끌려 책을 집어들 독자는 100명도 안 될 거라는 불안감이 찾아들었다. 책의 핵심 테마인 ‘지방 재생’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워 제목안을 여러 개 뽑고, 표지시안까지 마련해서 지인들에게 돌려 의견을 청취했다. 그들 중 ‘후쿠이’라는 지명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몇 년 전 쓰나미로 인해 방사능이 유출되었던 후쿠시마의 옆 동네 아니야?”라고 묻는 이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럴진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시장에서 먹혀들 리 만무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원고를 다시 들추며 궁리를 해봐도 ‘그래, 바로 이거야.’ 무릎을 칠 만한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몇 달을 허송했다. 가뜩이나 비수기인 봄철에 신간이 나오지 않으니 매출은 반토막이 났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해소되지 못한 채 꾹꾹 눌러온 불안은 정말이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터져버렸다. 디자이너에게 재차 의뢰한 표지시안을 놓고 회의를 하는데 멀쩡하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휴지로 막아봤지만 눈물이 잦아들기는커녕 입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까지 새어나왔다. 당혹스러워하는 팀원들에게 아무 일 아니라는 손짓을 하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 남게 되자 근거도 없는 설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렇게 혼자서 늦은 밤까지 꺼이꺼이 울다가 쉬다가를 반복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가슴과 머리가 개운해졌다.
당분간 이 원고를 덮어두기로 결심한 나는, 번역 작업이 끝난 노르웨이 작가의 미스터리 소설을 집어들었다. 전 세계 33개국에 팔렸을 만큼 매혹적인 스토리라인. 제목이나 표지 방향도 일찌감치 잡아두었던 터라 소설 편집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내부 인원이 달라붙어 번역원고를 다듬고 교차 교열하는 동안, 그림 솜씨가 뛰어난 디자이너는 깜짝 놀랄 만큼 멋진 표지를 완성해냈다.
그렇게 소설 편집에 매달린 지 보름쯤 지났을까?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는데 무려 반년이나 끙끙대다가 두 손 들고 말았던 원고의 제목이 툭하고 떠올랐다. 《이토록 멋진 마을》, 부제는 ‘행복동네 후쿠이 리포트’로 가면 되겠구나. 흡사 그물망에 걸린 물고기마냥 부제에 이어 헤드카피, 나아가 표지 이미지까지 한꺼번에 딸려오는 느낌이었다. 서둘러 샤워를 마친 나는 떠오르는 문장들을 메모하고 표지 이미지를 연필로 스케치했다.
출간 일정을 앞당겨 낸 노르웨이 작가 사무엘 비외르크의 소설 《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가 막 베스트셀러로 진입할 때 《이토록 멋진 마을》이 나왔다. 수도권에서 발행되는 주요 신문의 북 리뷰를 장식한 이 책은, 내가 예상치도 못한 반향을 일으키며 증쇄 행진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초판 발간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십 개의 한국 지자체와 기관들이 후쿠이를 방문해 그들의 성공사례를 배우고 벤치마킹하는 진풍경을 연출했고, 저자인 후지요시 마사하루는 매년 두어 차례 각종 세미나와 심포지엄에 초청돼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이토록 멋진 마을》과 관련한 문의전화를 받을 때 생각한다. 3년 전, 나 스스로조차 이해되지 않던 불만족과 싸우는 대신 적정선에서 타협했다면 이 책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진인사(盡人事)한 경험만이 삶을 강하게 연단(鍊鍛)시킨다는 사실이다. 

지평님(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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