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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문화의 비밀을 푸는 마스터키는 ‘느낌’이다
생명, 문화의 비밀을 푸는 마스터키는 ‘느낌’이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5.2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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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진화: 생명과 문화를 만든 놀라운 순서』 (2019.05, 안토니오 다마지오 지음, 임지원, 고현석 옮김, 아르테)

 

생명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마음·감정·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사회적 행동과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인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이 모든 시작에 ‘느낌’이 있다고 주장한다. 1부 「생명 활동과 항상성」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박테리아와 사회적 곤충, 자포동물 등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우리는 흔히 단세포생물에서 다세포생물로 진화하면서 복잡한 사회적 행동을 습득해 나간 것으로 생각한다. 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지능이 어느 수준 이상 발전한 후에 문화가 나타났으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 중심 사고는 생물학적인 진실과 맞지 않는다. 느낌이 있었다. 느낌은 인간이 질문을 던지고 대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즉 창조적 지성이라고 여겨지는 정신 활동의 촉매제로서 지성 이전에 존재해 왔다.
2부 「문화적 마음의 형성」에서는 인간의 지성을 가능하게 했던 신경계와 뇌의 작용을 주로 다룬다. 항상성의 작용이 지능을 만나면, 다양한 자극의 특징을 지도화한 뇌 작용의 결과물을 토대로 이미지를 창조하고 ‘마음’을 구성하게 된다. 다마지오는 신경계가 하는 수많은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지도 만들기’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신경계가 시각이나 사고 과정을 처리하듯 느낌을 처리한다는 가정이 우세했지만, 우리의 몸과 신경계는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고 그 복잡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지도가 곧 마음이라는 것이다. 감정이 일어나는 순서도 순차적이지 않다.
3부 「문화적 마음의 작용」에서는 느낌과 항상성이 어떻게 문화적 도구를 생성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룬다. 1·2부에서 다룬 조정자로서의 느낌과 항상성 작용이 문화에서도 발휘되어 왔음을 설명한다. 문화적 현상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 현상들이 유용한 기능적인 목표를 성취함에 따라 문화적 진화 과정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다마지오는 종교적 믿음, 도덕성, 정치적 관리 체계를 예로 들며, 문화의 목표는 “고통을 줄이는 것”이고 그로써 “유기체가 영향을 받는 과정을 재조정하고 제약을 가해 항상성을 회복”하려는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예술, 철학, 과학도 느낌과 항상성 상태를 이용한다. “고도로 잘 보존된 신경화학 메커니즘을 이용해 스트레스를 줄이고, 쾌감을 만들어 내고, 인지적 유동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끌어 “건강에 유익한 효과”를 미치는 식으로 선택되어 왔다는 것이다. 다마지오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머나 먼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지속하는 것은 느낌과 항상성이다.
신경과학자로서 다마지오는 오늘날 느끼는 문화적 위기, “그 어떤 때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정보들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시간이나 도구가 없는 대중”, “정보를 통제하고 대중에게 알려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기업과 정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위험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문화적 위기에 ‘생물학’이 있는지, 즉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지 묻는다. 흥미롭게도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실패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본적 항상성의 생리학적 근거와 주요 관심은 항상성의 경계 안에 있는 유기체의 생명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역적인 성격을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명 차원의 아주 큰 집단에서는 항상성이 자연발생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사회, 문화, 문명을 유기체에 비유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통합과 유리한 환경의 혜택을 목표로 한 문명의 단호한 노력이라는 반대 방향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문화적 ‘유기체’들은 한 덩어리로 합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이 생물학의 영역과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현재의 문화적 위기에 대한 해결 방법이나 그 실행들은 그 생물학적 기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도는 시시포스의 신화와 같이 늘 좌절을 겪을지라도 늘 그랬듯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양용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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