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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순'보다 차라리 '가나다순'
'성적순'보다 차라리 '가나다순'
  • 교수신문
  • 승인 2019.05.27 14: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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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했다. 고등학생 때 인문계 학생들은 성적이 괜찮으면 거의 다 법대를 갔다. 수학을 잘 하면 수학과로 국어를 잘 하면 국문과로 가는 게 상식 아닌가. 성적이 괜찮은데도 법대를 가지 않고 딴 과로 간다면 별종 취급을 받기도 했다.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생각은 무슨 생각? 생각이 없었던 거지.
부모나 학생이나 담임선생이나 모두들 법대를 너무도 사랑하셨다. 법대 진학은 부와 권력으로 직행하는 당연한 코스로 여겨졌고, 그 맹목적 추종자들이 지금 부패의 정도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법조계의 주류가 된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최근의 사법농단 의혹만 보더라도 거기 연루된 고위직 법관들이 왜 그리도 많은가. 어린 나이에 고시 패스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며 존경 받았던 자들의 일부는 줄줄이 감옥행이네. 성적하고 감방 하고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감방 가려고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한 건가?
괴테 <파우스트>의 한 구절. “보란 듯이 더러운 짓과 무도한 짓을 일삼는 자는/ 권세 있는 공범자의 비호를 받고/ 유죄! 언도를 받는 자는/ 죄가 없는데도 자신만을 의지하기에 유죄이옵니다... 처벌 내리지 못하는 재판관은/ 결국 범죄자와 한통속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태에 비추어보아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네.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판사님들의 눈물 겨운 충정을 괴테가 못 알아볼 리 없는 거다.
절대 권력에 눈 멀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딸을 알아보지 못해 파멸하고 말았던 리어왕의 경우도 비슷한 맥락이다. 누더기를 걸치고 있으면 그 뚫어진 구멍으로 티끌만한 죄가 다 들여다보이지만, 예복이나 모피 외투를 걸치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감춰지는 뒤집힌 세상의 진면목을 권력을 박탈당한 후에야 실감하는 리어왕. 그 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도 없네. 세 끼만 먹으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왜들 그리 권력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걸까.
또 이상했던 일 하나. 지방에 재직하던 교수들의 상당수는 서울로 이직하는 걸 당연한 수순으로 여겼다. 어, 저럴 수가. 청주에 있다가 서울로, 부산에 있다가 서울로 등등. 아니 불문학을 하는데 어째서 굳이 서울로 가야한단 말인가. 프랑스로 가지 않는다면 지방에 있으나 서울에 있으나 불문학을 공부하는 데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지방의 교수들은 서울로 진출하여 안 그래도 복작거리는 서울을 더 복작거리게 만들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무슨 중앙이 있고 지방이 있나. 서울도 하나의 지방 아닌가. ‘지방대’라는 말 참 어처구니없다. 그냥 대학의 이름을 부를 일이다.
이상했던 일 하나만 더. <춘향전>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춘향이를 보고 ‘서울댁’이라 부른다. 춘향은 남원 출신이니 당연히 남원댁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데 이게 뭐지. 춘향이 자신도 서울댁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했다. 서울로 가버린 이 도령이 장원급제하여, 아니 고시패스 하여 돌아와 춘향을 서울로 데려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 그러니까 춘향이도 서울병 환자였던 거다. 옥에 갇힌 춘향이 어머니에게 울며 남기는 유언에서 “앞 남산 뒤 남산 다 버리고 서울 땅에 묻어 주오”라고 말하는 데서도 보다시피 춘향은 자타가 인정하는 ‘서울내기’이다. 곤경에 빠진 춘향과 춘향의 이웃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도 서울로부터 올지도 모를 한 가닥 소식이다.
고향인 남원에 대한 지조는 없고 신랑에 대한 지조, 부와 권력이 넘실거리는 서울, 한 번 가보지도 않은 시댁에 대한 지조를 굳게 지켰던 춘향이. 우리의 고전 <춘향전>은 춘향의 절개를 둘러싼 이야기라기보다는 권력 중심을 향한 맹목적인 몸부림의 현장이기도 한 거다. 서울 공화국의 유래는 이처럼 깊다. 이 도령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춘향의 구원은 결국 당대 백성의 수동적 질곡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춘향은 그래도 운이 좋았다. 남편이 백마 타고 돌아왔으니.
아수라장 입시가 끝나고 나면 고등학교 대문 앞에 한동안 붙어 있는 현수막. 거기에 쓰인 대학 합격자 명단. 서울 소재 대학 합격자 명단이 앞쪽을 차지하고, 우리 동네의 대학 합격자 명단은 보란 듯이 뒤쪽에 있다. 합격자 명단은 당연히 가나다순이지. 이 말 하려고 이런저런 군소리를 했다. 인간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다.

장희창 논설위원/동의대학교 독어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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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륜 2019-05-28 19:59:36
잘 읽고 갑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간다는 통념이 깨지도록 지방의 변화.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겠습니다. 마음에 남는 글 고맙습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