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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산책] 버나드 쇼, 오역된 묘비명
[낱말산책] 버나드 쇼, 오역된 묘비명
  • 교수신문
  • 승인 2019.05.1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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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3역 시인, 빈섬 이상국

몇년 전 신문에 '버나드 쇼는 그런 묘비명을 안남겼다'는 글을 올렸고 그걸 빈섬 블로그에도 걸어두었는데 아직까지도 그 글을 찾아 읽고 댓글을 남겨주는 분들이 있다.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로 번역된 희극적인 묘비명 말이다. 인간죽음의 심각함과 진지함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자에 대한 경탄과 매력을 금하기 어렵다.

그 원문은 이렇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 영어의 의미가 과연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이란 인생 회한을 표현한 것인가가 나의 의문의 시작이었다. '우물쭈물 하다'라는 말은 상당히 모호하다. 뭔가 결정을 못 내리고 우왕좌왕 하면서 시간만 보냈다는 의미도 되지만, 죽음에 대한 단호하고 투철한 인식이 없이 끌려가 결국 최후를 맞았다는 의미도 된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확신이나 신념을 가지고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얘기도 되지만, 죽는 일에 대해 겁만 내거나 죽음 자체의 위력에 대해 과소평가했다는 함의를 품기도 한다. 삶이 엉성했느냐, 죽음에 대해 너무 몰랐느냐. 양쪽의 의미는 꽤 다르다. 어쨌거나 인생 별무소득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자기조롱이 묘하게 신랄한 맛을 자아낸다. 쇼는 과연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이같은 해석이 대중의 뇌리에 박힌 것은 2006KTF(KT의 전신)'(Show)'라는 상품을 내놓으면서 우연히 발음이 같은 버나드 쇼(Shaw)의 묘비명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채널로 쇼의 묘비명이 노출됐고, '지겨움도 죽었다'는 컨셉트로 신제품 ''를 선택하는데 인생 더 허비하며 우물쭈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실었다.

물론 이 광고 담당자들이 이 메시지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인 오역을 한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큰 일 날 일이 아닌가. 죽은 버나드 쇼가 KT폰에 튀어나와 항의했을 것이다. '우물쭈물' 번역이 시작된 것은 훨씬 더 오래 전의 일이다. 1984년 동아일보 김중배 칼럼에도 보인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이런 번역은 1970년대에 읽었던 명언집에도 있었던 것 같다. KT는 영어 원문을 치밀하게 재검토하지 않고 광고를 만들었을 뿐이다.

저 문장을 직역에 가깝도록 번역하면 이렇다.

충분히 오래 (어딘가를) 어슬렁거리면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난 알았어.

어슬렁거리는 곳은 어디인가. 혹자는 '무덤 근처'라고 말하기도 한다. 상상력이 가미되어 매력을 불러 일으키지만, 근거가 뭐냐고 물으니 군색하다. 무덤 근처를 어슬렁거린다는 말은, 죽을 일을 여러 번 겪다보니,라는 의미가 되어, 뒷말과 잘 맞는 건 사실이다. "무덤 근처를 충분히 어슬렁거리다 보면, 이런 일(죽음)이 일어날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러나 그렇게 명쾌하게 밝히지 않더라도, 충분히 오래 어슬렁거리는 곳은 '이 세상'일 수 밖에 없다. "이승을 오래 어슬렁거리다 보면 죽는 일이 생긴다는 걸 난 알고 있었어." 이렇게만 해도 쇼의 조크가 살아난다. 오래 살면 죽게되는 건 당연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이 문장에 조금 더 긴장을 줘서, ifeven if로 보면 어떠냐고 내가 말했더니, 한 분이 even if 뒤에는 반드시 부정문(not 포함)이 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 예를 들어주었다.

Even if she is small, songs are very powerful.

그녀는 비록 체구는 작지만 노래는 아주 강력해요.

위의 문장처럼 even if 뒤 문장에 반드시 부정문이 와야 하는 건 아니다. 앞 문장의 상황과 배치되는 의미의 문장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even if로 읽게 되면, 이렇게 된다.

내가 비록 꽤 오랫동안 이승을 어슬렁거리며 버티긴 했지만, 결국엔 죽음을 맞을 줄, 알았다구.

95(1856~1950)까지 살았던 버나드 쇼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는가. 죽음의 사신에 대해 내내 선방했지만 결국은 내가 패배해 죽음을 맞게 됐다는 '인생 무용담'쯤으로 읽는다면 그의 익살이 제대로 읽힌다.

나의 글을 읽은 일부 독자들은, 그러나 여전히 '우물쭈물'의 매력을 포기하기 싫어했다. "버나드 쇼같은 지식인도 인생 어영부영 살다보니 어느 새 이꼴이 났다, 그러니 사는 동안 좀 분발해보렴"하고 충고하는 메시지를 읽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영어 원문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기다렸던 방문객 받아들이듯이 하는 쇼의 '쇼맨십'이 개그로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오역의 꿀맛을 아주 버리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조금 터프하게 이렇게나 읽어볼까.

I knew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내 이 꼴 날 줄 알았어. 그래도 오래 버텼잖아."

이럴 줄 알았다고. (무대 위에서) 너무 오래 얼쩡거렸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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