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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스승] '독한 어른'에 대한 그리움
[스승의 스승] '독한 어른'에 대한 그리움
  • 교수신문
  • 승인 2019.05.0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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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기의 지성, 월송 유기천(月松, 劉基天)
월송 유기천
월송 유기천

역대 한국법학자 중에 한 사람만 들라면 우리 세대는 대부분 월송(月松) 유기천 (劉基天, Paul. K. Ryu 1915-1998)을 든다.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일제말기 지식인들의 수준이 해방 직후 세대보다 앞섰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유교수는 당대 세계석학들과 대등하게 직접 교류한 거의 유일한 한국법학자였다. 동경제국대학 출신으로 조선인 최초로 제국대학(東北大)의 ‘조수(助手, 오늘날의 조교수)를 역임한 경력이 동료들을 압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각별하게 대했던 것도 어쩌면 일본 군인이 일본학자를 대했던 예의를 본받았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유기천교수를 닮았다고 한다면 내놓고 좋아할지 의문이다. 학자로서 견주임을 받는다면 더없는 영광이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성을 일컬을 때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유교수가 타계하신 직후에 이런 요지의 글을 쓰고 여러 사람들과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에 대한 세평은 극단적으로 대조되었다. 서울법대 학장시절에는 시험부정을 저지른 학생을 가차 없이 퇴학 처분하고 상습적으로 교수회의에 불출석한 동료교수를 파면한 비정한 원칙주의자였다. 서울대 총장 시절에는 입학시험에서 현직교수 자제에게 가산점을 주던 제도를 과감하게 폐지한 근대주의였다. 그런가하면 데모학생에 대해 강경책을 고집하여 언론과 대학인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늦게까지 독신으로 살다 연상의 외국여성을 동반자로 맞았다. 첫 저서를 부모님을 제치고 ’사랑하고 존경하옵는‘ 그 아내에게 바쳤다. 한 마디로 유교수는 전근대와 근대의 교차로에서 선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의식과 제도를 앞장서서 주창하서 실천한 인물이다. 총장직에서 물러나 강의실로 돌아온 그는 박정희정부가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는 폭탄발언을 하여 해외망명의 길에 내몰렸다. 30년 후 죽어서야 비로소 고국의 유택(幽宅)에 정좌했다. 두고 온 북녘 산하를 망배(望拜)하는 그런 묏자리다.        
  나는 선생의 유적(流謫)의 흔적을 찾아 첫 망명지인 푸에르토리코에 들린 적이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법학교수였던 부인, 헬렌 실빙(Helen Silving)과 함께 재직하던 곳이다. 부인을 사별한 후 홀로 계시던 처소, 캘리포니아 산디에고의 자택에도 몇 차례 들렸다. 주소가 명쾌했다. 무슨 거리 3131번지, 하늘의 섭리라고 했다. 정원에 서른 한 그루 무궁화나무를 심어놓고 해마다 3월 1일을 기념하는 경건한 민족주의자의 앞에 가슴이 벅차고 저렸다.  평양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그는 폴란드계 유대인인 부인과의 영적결합에 더없이 행복했다. 유대인과 한국인의 33가지 공통점을 찾아내어 강론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한민족은  ‘잃어버린’ 이스라엘 12지파 중의 하나라는 믿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나는 선생의 만년에 혼신의 정열을 쏟은 영문저술「세계혁명」(The World Revolution, 1996)의 초고를 읽는 영광스런 부담을 안았다. 기독교 세계관에 압도된 나머지 러시아혁명을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관에 조심스럽게 토를 달았다가 무신론자의 한계라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선생께서는 비행기로 날아와 나의 늦깎이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 주셨다. 물론 기독교 바이블을 근거한 강론이었다. 지금도 그때 그 말씀과 표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작고한지 20여년, 아직도 그분을 기리는 학술사업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70년을 살면서 수많은 스승을 모셨다. 그러나 월송 유기천선생님만큼 ‘원칙’대로 살고자 한 분은 많지 않았다. 약간이라도 시대를 앞서 사는 사람에게는 적이 많다. 대충 사는 사람일수록 원칙주의자를 냉소한다. 내가 그분을 기리는 것은 이제는 절멸되어 가는 독한 어른에 대한 그리움, 독기의 지성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다. 

안경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안경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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