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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인지(無知認知)와 인지무언(認知無言)
무지인지(無知認知)와 인지무언(認知無言)
  • 교수신문
  • 승인 2019.05.0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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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 (9) - 두 가지 앎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교수
정세근 교수

우리는 ‘안다’는 말을 자주 쓴다. 특히 우리말에서 ‘안다’는 ‘그렇게 생각한다’(I think that…)와 가까워서 흥미로운 동사다. 그러니까 영어에서 ‘생각한다’로 쓰는 것을 우리말에서는 자주 ‘안다’로 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의 ‘안다’는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과 경험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영어식 앎이 애써 담고자 하는 객관적인 대상과 실재와는 거리가 있다. 나는 그렇게 알 뿐이지, 나에게 객관성을 담보하라고는 강요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A가 B에게 돈을 주었다고 안다(알고 있다)’는 말은 사실보다는 추리에 가깝지만, 영어에서 같은 문장(I know that…)을 말하면 ‘내가 보았다’는 증인의 진술에 가깝다. 그래서 영어에서 ‘본다’(see)가 ‘안다’(know)는 뜻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우리말의 ‘본다’는 시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보겠다’는 의지와 평가의 의미를 강하게 갖는다. ‘본다’조차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을 담는다는 것이다. ‘나는 금보다 쌀이 중요하다고 본다’거나 ‘지금 금리인상은 지나치다고 본다’와 같이 말이다. 여기에서 ‘본다’는 주관적인 판단이지 영어식 표현에서처럼 증언(witness)을 담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안다’는 말을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알기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만 알아도 앎의 반은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철학자들의 앎에 대해서 말하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 제발 알라고 말한다. 공자님도 ‘아는 것을 안다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 하고, 소크라테스도 ‘네가 모르는 것을 알라’고 하니 말이다.
봄이 오면 잎을 무성하게 키우고 겨울이면 잎을 모두 털어내는 것도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봄이 옴을 알고 겨울이 오는 것을 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들의 앎은 우리의 앎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본능과 지식, 행위와 결정, 정보와 언어의 같음과 다름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나무도 봄이 옴을 인지하고 잎을 생산하고 이런 상황을 자기 안에서 뿐만 아니라 주위와 어떤 방식으로라도 소통한다면, 사람의 그것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함부로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단지 두 가지 상반된 앎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은 못해도 아는 것이다.
먼저, 알지 못함을 안다는 것은 위의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통해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앎의 시작은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부터이며, 진정 ‘알지 못함을 알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앎’이라는 선언이다. 공자는 비교적 실천적인 면에서 행위를 강조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할 줄 알아야 함을 강조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 그 자체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것을 노자는 해석상의 문제는 있지만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 최상’(知不知上)이라고 말했다.
다음, 흔히 영지(靈知)주의로 번역되는 ‘알 수 있다’는 입장이다. 사실 여기서 영지는 영어식 ‘크노’(know)와 같은 어원의 그리스어 ‘그노’(gno)다. 뭘 알 수 있다고 여겼냐하면 바로 신에 이르는 구원의 길이었다. 개인적인 체험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반대하는 사람은 불가지론(agnosis)에 속한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어법과는 거꾸로 앎은 신비주의자의 몫이었던 것이다.
나의 앎은 어느 쪽일까? 특히 정치적 견해에서는 겉으로는 앞의 것을 가장하면서도 속으로는 뒤의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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