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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진단 : 학술대회 대형화 바람
학회진단 : 학술대회 대형화 바람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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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수 줄이고 규모 키우기...지방 개최도 늘어

학술대회가 점차 대형화돼 가고 있다. 이공계에서는 수백 개의 발표가 진행되는 대형 컨퍼런스가 정석처럼 자리잡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인문사회 분야의 모학회도 예전부터 한해에 한두 번 전국적 규모의 학술대회를 개최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규모가 더욱 커졌다. 영어영문학회는 몇 년 전부터 겨울방학 때마다 2박3일로 아예 숙식을 함께 하며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반면에 하계학술대회는 단 하루만 간소하게 치른다. . 사실상 1년에 한번, 집중적으로 행사를 여는 것이다.

"불필요한 걸음 없애니 관심 높아져"

변화는 중소학회들에도 일어났다. 월례발표회를 없애고 분기별로 한번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대신에 규모를 키워나가는 추세다. 한국사회및성격심리학회(회장 한규석 전남대 교수)는 매달 시행하던 월례발표회 대신 1년에 딱 두 번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문화사학회(회장 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는 매년 8차례 개최하던 정기발표회 및 학술대회를 6회로 줄였다.

학회들이 학술대회 횟수를 줄이는 가장 큰 이유는 교수들의 부족한 시간 때문이다. 점차 늘어가는 학회수도 한몫 했다. 모학회만 있던 시절과는 달리 분과별로 학회들이 많이 생겨나자 교수 한 사람이 여러 학회에 중복 가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학회가 자주 열리는 봄가을에는 매주 학회에 참석해도 모자랄 정도다. 더군다나 지방에 거주하는 교수들은 작은 학회 한 두 번 때문에 먼 걸음을 해야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조한욱 문화사학회 회장은 "행사를 줄이고 나니 회원들의 활동에 한결 여유가 생긴 것이 사실"이라며 학회원들의 의견이 일치된다면  다시 학술대회 일정을 조정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렇게 바꾸면 좋은 점이 많다. 우선은 예산절감의 효과가 있다. 물론 특별한 예산이 필요 없었던 월례발표회보다는 많은 예산이 들지만, 행사 수 자체가 줄어드니 당연한 결과다.
또 분과학회의 성장도 성과라면 성과다. 한규석 사회및성격심리학회 회장은 "논문 한 두 편 발표하는 월례발표회를 정기발표회로 만들고 나니, 참여인원이 훨씬 많아졌다"라며 오히려 학회인지도 향상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효율성 제고는 새로운 시도를 모색해볼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난 6월 말 한국정치학회(회장 신명순 연세대 교수)와 한국국제정치학회(회장 강태훈 단국대 교수)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하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한반도 정세와 국내외 정치'를 주제로 공동주관했지만, 두 학회가 각각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한 지붕 두 학회를 계획한 이유는 명료했다. 두 학회에 공동적으로 속해있는 회원들이 많기 때문에, 불필요한 걸음을 줄이자는 의도였던 것. 두 학회가 모인 자리인 만큼 행사는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학회가 대형화되다 보니 지방에서 열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유는 '가격' 때문이다. 홍휘숙 영어영문학회 간사는 "참가자가 자비를 들이는 상황이다보니, 저렴하게 숙박이 가능한 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라고 전했다. 숙박이 가능한 리조트로 행사장이 옮겨지는 것도 한가지 변화라면 변화. 이렇게 될 경우 지방대가 큰 학술대회를 맡아서 준비할 기회가 많아져 학문의 지방분권이라는 시대 흐름과도 일치한다.

규모에 걸맞은 내실 고민할 때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학술대회가 점차 대형화돼 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보인다. 이른바 '미국식'의 애뉴얼 컨퍼런스를 따라가는 것. 현재 대형학회의 대부분이 이 형식을 따라가고 있으며, 중견학회들도 점차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을 털어놓는 시각도 있다. 김용호 한국정치학회 연구이사(인하대 정치외교학과)는 "현안에 대한 즉각적인 토론회 개최 등이 아쉽다"라는 의견을 보였다. 아무래도 학계가 순발력 있는 대응을 하기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발표의 기회 자체가 줄어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학술대회가 그에 걸맞은 내실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작은 단위로 토론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학술대회는 자꾸만 사라지고, 내실 없는 대형학회만 늘어간다"라며 매운 비판을 던졌다. 대형학회가 여러 연구자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토론시간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유의 가닥을 잡아나가는 월례발표회가 점차 사라지는 것도 아쉽다는 지적이다. 연구자들 간에 이렇다할 토론 문화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판단에서다.

학술대회도 시대에 발맞춰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옳다 그르다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대형화와 더불어 토론 공간 확보의 역할을 고민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대형학술대회지만 분과토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던지, 온라인상의 모임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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