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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교수사회와 술풍경
흐름: 교수사회와 술풍경
  • 손종업 선문대
  • 승인 2003.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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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와 파격이 함께하는 명정의 시간

손종업 / 선문대, 국문학

오래된 농담 하나로 시작해야겠다. 검사와 세무사와 교수가 함께 술을 마셨다. 술값은 누가 냈을까? 정답은 지나가는 사람이다. 이런 농담엔 뼈가 있어서 가볍게 웃다보면 무언가가 목에 걸린다. 영화 '강원도의 힘'에는 교수에게 술 접대를 하다가 깽판 치는 '늙은' 시간강사가 나온다.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의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절망한 나머지 숲으로 가서 목을 맬 수도 있으니까.

자린고비 교수들이 만들어낸 술값 지불에 관한 우스꽝스런 에피소드들이 왜 없으랴. 그러나 그건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는 일이며 또한 술맛 떨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時俗이 그렇다 보니, 밤새워 술을 마시는 교수님들도 요즘엔 찾아보기 어렵다. 엠티를 가서도 학생들과 오래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불미스런 일들에 대한 경계심 탓이다. 그러니 거나한 술풍경은 아무래도 지나간 시대의 것이기 쉽다. 입술 붉은 단골집 여인네가 강의실 밖 복도까지 찾아와서는 정작 쌓여있는 외상을 문제삼는 게 아니라 왜 요즘은 통 왕래를 안 하시냐고 하소연하던 그런 시절. 그 무렵에는 강의실에까지 술을 끌어들인 음주강의파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 품격도 가지각색이어서 술이 무슨 윤활유인지 취하면 더욱 달변에, 명강에 이른 분도 있고, 그저 '어, 좋다'하고 자족하던 분도 있고, 품속에 소주병과 개나리꽃을 동시에 품고 와서 기인답게 학생들에게 애교(?)를 부리던 분도 있다. 그런 날은 정상수업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술판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디서든 관운장처럼 칭송 받는 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새벽이 올 때까지 한 치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수많은 제자들과 한 합, 한 합, 술잔을 겨루었다는 신화가 있는가 하면 새벽까지 학생들과 술을 마시던 어느 교수는 '수업시간에 보자'하고 사라지더니 강의시간이 되자 김 오르는 녹차 한 잔 들고 강의실에 나타나서 酒黨 학생들을 혼비백산케 했다는 전설까지 다양하다. 그렇게 酩酊인생을 살다가 급기야 술잔을 놓고 세상을 떠난 분들까지. 그러나 한 젊은 교수가 밤늦도록 연구에 몰두하다가 잠시 짬을 내서, 옆방 동료교수와 함께 새우깡을 안주삼아 연구실에서 소주 한 잔 마셨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가 내겐 더 살갑다.

전공에 따라 술 풍경이 다를 법하다. 요컨대 무도학과와 심리학과, 회계학과와 철학과 교수들 사이에 있을 법한 극단적인 차이를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술이 보여주는 것은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자기 자신일 뿐이다. 또한 어디에서든 내공이 쌓인 고수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언젠가  자연과학을 하시는 한 여교수님께 반농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쪽 교수님들은 술값이 없으면 실험용 알콜을 그냥 마신다면서요?'그랬더니 그 교수님 마치 당장 혀끝에 술맛이라도 느껴지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면서 '요즘은 자주 안 마셔요. 냄새가 지독해서' 하시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분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경영학 교수들의 경우, 株價에도 약할 뿐 아니라 酒價에도 약한 경우가 많다. 공대교수들의 술 문화라고 해서 어떠한 일정한 사이클이 있는 게 아니다. 술잔을 쌓고 술병을 세는 것은 건축과나 수학과 교수들이 아니다. 다만 내 경험상 정신분석학 교수의 술자리는 여러 모로 까다로웠던 게 사실이다. 알코올에 의한 무의식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내 안의 반복강박(repetitive compulsion)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했던지. 말을 더듬는 것조차 두려웠다. 술자리가 파하고 헤어지면서 "우리 자주 만납시다"하고 그가 귓속말로 속삭였을 때 나는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전공보다는 오히려 酒種에 보다 엄격한 교수들이 의외로 많다. 소주파와 맥주파 그리고 양주파가 주류를 이루지만, 술이라면 다 좋은 不顧파나, 회귀한 술만을 은밀히 즐기는 양반도 없지 않다. 의외로 소주파가 엄격한 경우도 많아서 호텔에서 열리는 사은회에서조차도 특정회사의 소주를 찾아서 대령해야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어쨌거나 高談峻論이 없는 교수들의 술자리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게 사라질 때 酒價가 아무리 비싸도, 술풍경은 살풍경 해진다. 그저 술이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교수들의 술자리도 교활하고 살벌한 육식원숭이들의 난장판이 되기 일쑤다. 취중에도 알찬 말씀들이 가득한 게 교수들의 술풍경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교수사회도 빠르게 '술 권하는 사회'에서 '생로병사의 비밀'에 몰두하는 그만큼 병든 사회로 변해가면서 술판에서 흘러나오던 넉넉한 풍류와 파격들마저 사라지고 있는 게 아쉽다면 아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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