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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어떤 질문…그리고 파문
[북소리] 어떤 질문…그리고 파문
  • 교수신문
  • 승인 2019.04.2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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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20년 넘도록 편집자로 살면서 타성으로 굳어졌던 낡은 습성들과 마주하고 의연하게 변화를 감내할 용기가 생기게했던 그 질문…"
지평님 대표
지평님 대표

세상살이에는 불문율이라는 게 있다. 법에 저촉되지 않으나 자칫 무례가 될 만한 말을 삼가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지금 평균 수준의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마주앉은 이의 학력을 캐묻거나 성별을 잣대로 누군가를 예단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상대의 사생활에 관해 과도한 궁금증을 드러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선망을 가득 담지 않은 이상, 처음 만난 사람에게 왜 하필 당신은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며 사느냐는 뉘앙스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몇 년 사이 나는 유사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출판 불황’이라는 말이 보통명사처럼 통용되기 시작한 무렵부터다. “요즘 사람들, 책 안 읽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책 만드는 하는 거, 힘들고 지치지 않아요?” 악의 없는 질문이었다. 걱정과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묻곤 했다. 밥벌이가 고단한 건 누구든 마찬가지 아니냐고 의연한 척 웃으며 대꾸했지만 속마음은 전혀 의연하지 않았다. 종종 ‘이 나라 출판 산업을 그토록 걱정하는 당신은 한 해에 책을 몇 권이나 읽는데?’ 졸렬하게 되받아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가끔은 ‘내가 시대 흐름을 잘못 읽는 건 아닐까, 이 일을 과연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 불안이 찾아들기도 했다.
지난해 가을이었다. 낯선 나라를 여행하면서 만난 노신사가 내게 물었다. “출판계가 어렵다고는 해도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겐 각별한 재미랄까, 보람이 있을 듯해요. 그렇지 않아요?” 분명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 질문이련만, 그이의 물음에 나는 묘하게 설렜다. “축적의 즐거움이 크죠. 일반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내면이 고갈되고 스스로가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듯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 쉬운데, 편집자 생활을 한 뒤로는 그런 감정에 휘둘린 기억이 없어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고, 책을 만들 때마다 역량 부족을 실감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툼한 원고를 대여섯 번씩 수정하고 다듬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낼 때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충만감을 경험하거든요.” 내 입에서 그런 말이 술술 나왔다.
알고 보니 그이는 10년 넘게 법조인으로 살다 나이 마흔 살 때 공부를 다시 시작해 컴퓨터공학자로 변신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어렵사리 손에 쥔 기득권을 포기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터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느냐고 묻자 그이가 대답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 길이 내가 꿈꾸던 삶일까, 자꾸 질문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가정할 때, 10년쯤 지난 뒤에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당하게 ‘예스’라고 답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때 이미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이나 있었어요. 어렵사리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라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자며 겁도 없이 저를 격려하고 나더군요. 아내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부랴부랴 준비해서 유학길에 올랐지요. 1992년의 일이에요.” 껄껄 웃는 그이 옆에서 한눈에도 남편보다 두세 배는 용감해 보이는 여인이 명랑하게 웃었다.
자기 삶의 방향을 극적으로 틀어본 어른들이라 그랬을까? 그 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사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직업인으로서 발목을 잡는 현실적 고민이나 한계,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온 편집자로서 궁극의 지향까지…. 나조차 어렴풋한 모습으로 둥글리기만 하던 생각들이 또렷한 언어의 외피를 입고 구체성을 획득해갔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예리하되 무례하지 않게 맥락을 잡아준 그이들 특유의 화법에 힘입었으리라.
별스럽지 않게 시작된 그 대화가 내게 남긴 파장은 의외로 컸다. 무엇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하면 맞을까? 그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야 20년 넘도록 편집자로 살면서 타성으로 굳어졌던 낡은 습성들과 마주하고 의연하게 변화를 감내할 용기가 생겼던 것이다. 바라건대 그 부부를 다시 만날 때는 당신의 질문으로 인해 내가 이만큼 진화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기를.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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