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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가네코를 존재하게한 '자살에서 복수'로의 대반전
[최재목의 무덤기행] 가네코를 존재하게한 '자살에서 복수'로의 대반전
  • 교수신문
  • 승인 2019.04.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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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의 '부강', 그 추억과 트라우마를 가로지르다
1926년 지어진 옛 부강초등학교 강당
1926년 지어진 옛 부강초등학교 강당

1. 부강초등학교를 찾아서
일본인 소학교 「부강공립심상소학교」
내가 부강에서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부강초등학교」이다. 이곳이 1912년 12월 11일 가네코 후미코가 4학년으로 전입한, 일본인 소학교 「부강공립심상소학교(芙江公立尋常小學校)」 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에 도착한 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마을의 소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는 마을 가운데 있었고 초가집 지붕의 단층집이었다. 교실 한 쪽의 장지문을 열면 두세 마지기 밭 너머로 시장에 모인 사람들과 당나귀, 소, 돼지 등이 보였다. 학교는 촌립(村立) 소학교였고 아이들은 서른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예순이 넘은 꼿꼿한 노인으로, 의사 사촌을 둔 덕에 가르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입학했을 때에는 공교롭게도 3학년 반이 없어서 4학년 반에서 공부했다. 맥주 상자를 책상 삼은 서당에서 1학년 공부를 보름씩 띄엄띄엄 4번-그러니까 반년도 되지 않을 진도로 했고, 2학년을 5개월, 3학년을 4개월 남짓 공부한 내가 아홉 살이 되어 4학년이 되었다. 무리한 일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즐거웠다.”(조정민 옮김, 같은 책, 93-94쪽)

인용문 가운데서, “도착한 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라는 말을 고려하면, 가네코가 부강에 도착한 것은 ‘12월 초순’으로 보인다.
참고로 「부강공립심상소학교」 의 ‘심상’(尋常, 진죠じんじょう)이란 ‘평범, 보통’의 뜻이다. ‘고등’(高等, 고토こうとう, 상급)과 상대된다. 일본에서 1886년(明治19年) 4월 10일, 소학교령(제1차)이 공포되어 소학교(초등학교)를, ‘심상(尋常)소학교’(수업연한 4년. 의무교육)와 ‘고등(高等)소학교’의 2단계로 정한다. 이후 1900년(明治33年) 소학교령(第3次)에서는 ‘심상소학교 4년+고등소학교 4년’[8년 과정]으로, 1907년(明治40年)에는 소학교령 일부개정으로 ‘심상소학교 6년+고등소학교 2년’[8년 과정]으로 바뀐다. 연령은, ‘각 학년차/입학시(수료시)’로 하면, ‘1년차/6세(7세)’에서 시작, ‘8년차/13세(14세)’로 끝난다. 가네코가 “3학년 반이 없어서 4학년 반에서 공부했다…아홉 살이 되어 4학년이 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3학년/8세, 4학년/9세 식으로 당시 소학교 학제에 따른 것이다. “1학년 공부를 보름씩 띄엄띄엄 4번-그러니까 반년도 되지 않을 진도로 했고, 2학년을 5개월, 3학년을 4개월 남짓 공부”했다는 것은 ‘1/2/3학년’을 축약하여 마쳤음을 뜻한다.
이 초등학교는 1908년 6월에 창립하여, 부강일본인회가 총독부의 보조금과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인 기부금으로 10월 교사신축에 착수한다. 이어서 1909년 여름에 준공, 9월부터 새 건물에서 수업을 시작한다. 아동 수는 1908년 17명, 1909년 22명, 1910년 31명이었다(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정선태 옮김, 35쪽 참조). 가네코가 “서른 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당시 사정을 정확하게 증언한 것이다.

부강초등 100주년 기념 조형물
부강초등 100주년 기념 조형물

‘부강초등’의 옛 모습은?
가네코가 5학년으로 진급했던 1913년 여름. 학교는 공립이 되었고 고등과가 생겼다. 예순이 넘은 노 교사는 사범학교 출신인 젊은 교사 핫토리 도미에(服部富枝)로 교체된다.
이 무렵 학생 수가 갑자기 100명 넘게 늘어나는 바람에 퇴메[台山]의 산기슭으로 학교를 옮겨야만 했다. 이 땅은 가네코의 고모네 소유였다. 이렇게 학생 수가 급증한 이유는 무엇인가. 부강에 ‘대규모 선로이동 공사’가 시작된 데다 근처의 산에서 ‘텅스텐이 발견’돼, 부강으로 이주해오는 일본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가네코 후미코, 『옥중수기』, 조정민 옮김, 99-100쪽 참조)
초창기 학교의 모습은 어땠을까? 『부강면지(芙江面誌)』(부강면지발간위원회, 2015)를 보면, 1938년의 흑백 사진이 있어(313쪽) 그나마 대략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진 중앙의 기와집은, 현재의 부강초등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볼 수 있는 1926년에 지은 부강초등 ‘강당’(시 지정문화재 제5호)이다.

가네코의 『옥중수기』 에 따르면, 당시 학교는 ‘마을 가운데 있었고 초가집 지붕의 단층집’이었다 한다. 이 원래의 학교는, 1938년 사진 속의 새로 지은 집과 모양도 위치도 달랐을 것이다.
   
2. 은사 핫토리 토미에에게 전하는 ‘추억과 트라우마’
부강, ‘그립고도 아픈 곳’
조선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 가네코가 은사 핫토리에게 보낸 ‘편지’(A)(1923년 6∼7월경)를 읽어본다. 그녀는 부강을 추억한다.

   “정말로 그리워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혹시 부강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전차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닌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모두 어디로 갔는지.…”(야마다 쇼지, 앞의 책, 351쪽)

그러면서도 가네코는 곧바로 부강의 트리우마를 쏟아낸다 - ‘억압…구박…가난…비관…자살시도’. 그렇다. 부강은 추억과 트라우마가 겹쳐있는, 그립고도 아픈 곳이다.

  “저는 아직도 꼬마입니다. 9전짜리 왜나막신 하나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모든 운동을 금지당한 채 살아온 제가 커서 환자처럼 된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저는 변함없이 가난합니다. 하지만 이와시타가 사람들처럼 돈을 지키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생활입니다.
  12전짜리 그림물감을 사주지 않아 선생님께 빌린 적도 있었습니다. 냄비를 파손했다고 제가 고향에서 가지고 온 저금을 꺼내 변상한 적도 있었습니다…. 청주로 하루 동안 여행을 갈 때 용돈 10전을 준 것이 조선 생활7년 동안 딱 한 번…아아.
  선생님께서 옥천으로 전근을 가시고 난 다음인 한여름 어느 날, 자살을 하려고 철길로 갔지만 아직 신호가 내리지 않아 다시 꿈속에서처럼 쏜살같이 금강 가에 있는 옛 장터의 오동나무 아래로 달려갔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가까이에 있는 돌을 주워 모아 유모지(속치마처럼 허리에 감는 천-옮긴이)를 풀어 그 안에 싸서 몸에 묶었을 때의 저를 사로잡던 기분이란! 작년에 그 짧은 유모지는 다 해져서 더 이상 형체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비참했던 그때의 생각만은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같은 책, 351-2쪽)

“저는 아직도 꼬마…모든 운동을 금지당한 채 살아온 제가 커서 환자처럼…”이라는 구절은 가네코의 트라우마가 혹처럼 주저앉아 있는 자리를 말한다. 

“금강 가, 옛 장터의 오동나무 아래”
가네코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저 “금강 가에 있는 옛 장터의 오동나무 아래”를 지금 찾을 길은 없다. 다만 나는 금강 줄기에 붙은 부강을 회상해본다.
 『부강면지』에 보니, 1900년대 부강에 황포돛대를 단 작은 배가 떠 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762쪽). 정면에 보이는 산이 부용산인 듯. 현재의 모습과 일치한다.

부강초등학교
부강초등학교

3. 아름다운 자연이 목숨을 건지다
가자 “바닥을 알 길 없는 푸른 강 밑으로”
가네코가 자살을 하려고 철길로 달려 갔지만 실패. 다시 그녀는 금강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돌을 주워 모아 유모지에 싸서 몸에 묶고, 강물로 걸어든다. 

   “백강! 백강으로! 바닥을 알 길 없는 푸른 강 밑으로….
   나는 건널목을 건너 달리기 시작했다. 제방과 가로수와 밭을 따라, 뒷길을 통해 몇 리나 되는 길을 지나, 백강 못이 있는 구 사장 쪽을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못 주변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돌리고는 자갈 위에 쓰러졌다 햇볕에 달구어진 자갈이 뜨거웠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가슴의 고동이 가라앉자 나는 일어나 자갈을 소매 속에 넣기 시작했다. (…)
   준비는 끝났다. 나는 물가의 버드나무를 잡고 옷 속을 들여다 보았다. 물은 검푸른 기름처럼 잔잔했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전설 속의 용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어쩐지 불안했다. 다리가 부르르 미미하게 떨렸다. 돌연 머리 위에서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인가 나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고요함인가.
   “아아, 이별이다. 산과도, 나무와도, 돌과도, 꽃과도, 동물과도, 이 매미 울음과도, 모두와 헤어진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찰나, 갑자기 슬퍼졌다.
   할머니와 고모의 무정함과 냉혹함과는 이별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세상에는 아직 사랑해야 할 것들이 무수하게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다. 내가 사는 세상은 할머니와 고모네 집만이 아니다. 세상은 넓다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남동생, 고향 친구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펼쳐져 그리워졌다.
   나는 죽는 것이 싫어졌다. 버드나무에 기대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만약 여기서 죽어버린다면 할머니는 나에 대해 뭐라 말할까. 어머니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까. 어떠한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나는 더 이상 “그게 아니에요.”라고 변명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 상상을 하자 나는 “죽어 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처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복수해야 한다. 그렇다. 죽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강가 자갈밭으로 갔다. 그리고 소맷자락과 몸에 감은 속옷에 들어있던 자갈을 하나둘 내던졌다.”(가네코 후미코, 앞의 책, 145-6쪽)

부강리 모습. 앞쪽으로 가네코가 좋아했던 부용봉이 보인다.
부강리 모습. 앞쪽으로 가네코가 좋아했던 부용봉이 보인다.

자살의 결심에서 기사회생하는 그 ‘내면적 심리의 과정’을 가네코는 짧은 문장 속에 객관적으로 요령 있게 기술해내고 있다.

살아남음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복수
“아름다운 자연…평화로운 고요함…산, 나무, 돌, 꽃, 동물, 매미 울음”, 가네코는 이것을 새로 발견하고 보고 듣는다. 이런 것들과 헤어짐이 슬퍼진다. 자연의 무언…침묵…고요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니 죽음은 자신을 변명해주지 못한다. 차라리 살아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 ‘복수’심. 그녀는 차라리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처럼 학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한다. 가네코의 ‘자아’가 ‘조선의 민중’에까지 ‘확대’되는 계기를 찾을 수 있다.
흥미롭게도 가네코의 글쓰기에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두 시선의 대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연-생명-자유 vs 역사-대립-투쟁’ 이 둘이 그녀의 내면에서 서로 갈등하고 깊이 대화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부강이라는 공간’이, 가네코라는 개인과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짚어보는 ‘지층(地層)’이자 ‘지층(知層)’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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