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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DMZ 접경지역을 만나다-21] '별'에서 '유성'으로...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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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19.04.2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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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과 철원 : 환영받지 못한 고향에서 그의 문장을 읽다

조배준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연구원
서울시 성북동에 있는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 사진=한국관광공사
서울시 성북동에 있는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 사진=한국관광공사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는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의 고향(故鄕)이 철원이라는 사실은 그의 명성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이태준은 서구에서 전래된 근대문학 장르인 단편소설의 형식적 완성도와 예술적 가치를 확립한 작가다. 1930년대 한국문단을 주도했던 그의 문학적 경향은 이상·박태원·이효석·김유정·김기림·정지용·유치진 등 당대 문단의 촉망 받는 젊은 작가들이 교류하던 ‘구인회(九人會)’로 대변된다. 옛것을 숭상하는 취향, 여운이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문장, 생생한 인물 묘사는 흑백사진 속 준수한 얼굴과 함께 오늘날의 독자들도 금방 매료시킨다. 대중에게 올바른 우리말 글짓기를 가르치는 연재물을 모은 『문장강화(文章講話)』와 그의 짧은 산문집 『무서록(無序錄)』은 80년 세월을 넘어 지금도 판매되는 스테디셀러다.

그런데 ‘최고의 문장가’라는 당대 문단의 평가와는 달리 이태준의 육신과 영혼은 조선 땅 어디에서도 보금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쟁 이후 ‘월북(越北) 작가’라는 꼬리표가 달린 그는 철원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북쪽에 대한 적대심이 강하고 반공주의·안보주의의 보루와도 같은 접경지역인 철원, 그 중에서도 DMZ가 코앞인 그의 고향 마을에서 이태준은 숨기고 싶은 문화인물이었다. 1988년 해금(解禁) 조치 이후에도 그는 온전한 ‘우리 문학의 기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38선 이북이었던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전쟁 후 모두 사라지고, 고향에서 이태준은 오랫동안 타향(他鄕) 사람보다 못한 ‘빨갱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 지명으로 등장했던 철원은 이태준 소설의 주요한 무대였다. 이태준은 부모를 잃고 돌아와 불우하게 보낸 어린 시절의 고향을 잊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 자체가 허리가 잘린 ‘수복지역’인 철원은 고향 사람을 망각해야만 했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긴 상처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이태준은 일제강점기 동안 계급의식의 각성과 사회주의적 실천을 강조하는 카프(KAPF) 계열의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더니즘 계열의 순문학을 추구했던 1930년대의 경향만을 생각하면, 해방 이후 사상의 급진적 변화와 1946년 여름에 그가 북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은 의아한 것이었다.
이렇게 인생을 음미하며 늙어가고 싶다던 상허는 북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종군작가(從軍作家)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던 이태준은 1956년 격렬한 정파 투쟁에 휘말리며 작가로서의 생명을 잃고 몰락했다. ‘숙청’ 이후 노동신문사 교정원을 거쳐 콘크리트블록 공장의 고철 수집 노동자로 살았던 자연인 이태준의 행적은 북에서도 지워졌다. 유년 시절부터 죽음까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태준의 삶은 ‘역사의 미아’가 된 다른 월북 인사들처럼 애석하기만 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한국 초기 단편소설의 예술적 성취에 대해 말할 때, 그리고 훗날 남북의 평론가들이 함께 모여 한반도 현대문학사를 쓸 때 상허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별’이라는 점이다. 그가 평생 그리워했던 ‘고향’으로 가보자.

‘고향! 나는 지금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의 고향은 어데냐?’
윤건은 막상 동경을 떠나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앞길이 너무나 막연하였다. 그에겐 고향이 없었다. 누가 “고향이 어데시오?”하고 물으면 그는 서슴지 않고 “강원도 철원이오” 하고 대답하지만 강원도 철원에는 김윤건의 집은커녕 김윤건의 이름조차 알 만한 사람이 몇 사람 없었다.
- 소설 「고향」(1931) 중에서

'수연산방' 대문
'수연산방' 대문

‘이태준 생가터’, 홀로 서 있는 낡은 팻말을 어루만지다

서울 강북의 오랜 토박이들에게 성북동의 전통찻집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은 꽤 알려져 있다. 상허가 빚을 내어 1933년에 지은 가족의 보금자리는 서울시 민속문화재 11호 ‘상허 이태준 가옥’으로 등록되어 있다. 문우(文友)들이 어울려 문학과 시대를 의논하던 구인회의 회합 장소이기도 했던 이곳은 이태준의 대표작 「달밤」에도 등장한다. 숙정문(肅靖門) 근처 한양도성 바깥 성곽이 바로 올려다보이는 집 마당에서 보름달이 환한 야경을 감상하면, 소설 「달밤」의 몽환적인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그 다섯 송이의 포도를 탁자 위에 얹어 놓고 오래 바라보며 아껴 먹었다. 그의 은근한 순정의 열매를 먹듯 한 알을 가지고도 오래 입안에 굴려 보며 먹었다.
어제다. 문 안에 들어갔다 늦어서 나오는데 불빛 없는 성북동 길 위에는 밝은 달빛이 깁을 깐 듯하였다.
그런데 포도원께를 올라오노라니까 누가 맑지도 못한 목청으로,
“사......게......와 나......미다까 다메이......끼......까......” 를 부르며 큰 길이 좁다는 듯이 휘적거리며 내려왔다. 보니까 수건이 같았다. 나는,
“수건인가?”
하고 아는 체하려다 그가 나를 보면 무안해할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획 길 아래로 내려서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었다.
그는 길은 보지도 않고 달만 쳐다보며, 노래는 이 이상은 외우지도 못하는 듯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면서 전에는 본 적이 없었는데 담대를 다 퍽퍽 빨면서 지나갔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 소설 「달밤」(1933) 중에서

그런데 철원에서 그의 집은 어디였을까? 묘장면(畝長面) 산명리(山明里)라는 옛 주소로 알려진 이태준의 출생지 ‘용담(龍潭)’과 함께 그가 고향으로 여겼던 곳은 휴전선 너머 철원 북쪽에 있는 ‘안협(安峽)’이라는 곳이다. 성북동 생활을 정리하고 상허가 안협으로 낙향한 것은 1943년이었다. 그는 거기서 일제강점기 말의 극악한 탄압 속에서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 1945년 해방 때까지 칩거한다. 하지만 그 안협의 집은 현재 북쪽 땅이니, 남쪽에서 이태준의 생가로 삼을 수 있는 곳은 그가 태어났고 자랐던 ‘용담마을’이다. 철원과 연천의 경계에 있는 용담은 대마리(大馬里) 4반 지역으로 분류되곤 한다.
‘백마고지(白馬高地)’로 유명한 대마리의 길목인 대마사거리는 경상남도 남해군 남쪽 바다 끝에서 평안북도 초산군 압록강 앞까지 이어지는 국도 3호선의 남측 중단점이다. 이곳에서 ‘백마고지역’을 지나 경기도 연천군 방향으로 약 1.5km 정도 더 내려오면 짧은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 우측에 비포장도로와 밭이 보인다. 행정구역상 주소가 율이리(栗梨里) 356번지인 이곳은 상허가 유년기를 보낸 용담의 입구인 셈인데, 사유지인 밭 중앙에 덩그러니 낡은 팻말 하나가 서 있다. 녹이 슨 철판 지붕 아래 나무판자엔 ‘철원출신 한국단편소설의 완성자’, ‘상허 이태준 생가터’, ‘1995년 7월 15일 철원문학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작가의 명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 빛바랜 팻말은 깨나 콩을 심는 밭 가운데 듬성듬성한 풀숲에 가려져 있다. 봄에 방문하면 얼었던 땅이 녹아 질퍽질퍽해진 밭고랑을 밟으며 생가터에 서게 된다. 거기서 그가 고향을 추억하며 쓴 문장들을 읽노라면,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정체 모를 스산함이 몰려온다.

내 고향 용담은 산 많은 강원도에 있다. 철원 땅이지만 세상에 알려진 금강산 전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고요히 정거장도 없는 경원선 한 모퉁이에 산을 지고 산을 바라보고 그리고 사라지는 연기만 남기고 지나다니는 기차들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았는 조그만 산촌이다.
서울서 차를 타고 나면 세 시간이 다 못되어 이 동네 앞을 지난다. 차가 지날 때마다 채마밭머리에서 장독대에서 사람들이 내어다 본다. “내다 오오”하고 소리는 못 질러도 수건을 내어 흔들며 모두 알아보고 형님뻘 되는 사람 동생뻘 되는 사람들, 흔히 십 리나 되는 정거장 길에 마중 나온다.
용담은 아름다운 촌이다. 금강산과는 먼 곳이지만 그와 한 계통인듯하게 수려한 산수는 처처에 승경(勝景)을 이루어 있다. 뒤에는 나지막한 두매봉 재가 조석으로 오르기 좋은 조그만 잔디밭 길을 가지고 있으며 앞에는 언제든지 구름을 인 금학산이 창공에 우뚝하니 솟아 있다. 손을 씻으려면 윗골과 백학골에서 흘러나오는 옥수천이 있고 수욕(水浴)이나 천렵이나 낚시질이 하고 싶으면 선비소, 한내다리, 쇠치망, 진소, 칠송정 모두 일취일경이 있는 곳이다.

- 수필 「용담 이야기」(1932) 중에서

상허 이태준의 1930년대 모습
상허 이태준의 1930년대 모습

‘용담’, 사라진 고향 마을의 지명들이 상허의 문장으로 기억되다

생가터 안쪽의 고향 마을인 용담의 지명엔 이태준의 어린 시절 추억이 곳곳에 묻어있다. ‘선비소, 한내다리, 두매봉 재, 금학산, 윗골, 백학골, 옥수천, 쇠치망, 진소, 칠송정’. 이런 작은 지명들은 고향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이 없었다면, 전쟁 후 폐허가 된 용담에서 기억하기 어려운 곳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작가로 이름을 알린 후에도 종종 고향에 와서 오촌 당숙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봉하(李鳳夏, 1887∼1963) 선생 집에 머물렀다. 이봉하 선생의 손녀 이소진 여사는 당시 마을 사람들이 서울에서 성공한 그가 오면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생가터는 상허가 태어난 집터가 아니라 어린 시절 의탁했던 친척의 집터일 것이다.
상허의 연보와 자전적 체험을 담은 소설들에 비추어보면, 그야말로 뿌리 내릴 곳 없이 휘적휘적 살아온 이태준의 성장 과정은 이러하다. 장기(長?) 이씨 용담파의 집성촌의 제일 큰 부잣집에서 태어난 태준은 ‘개화당’이었다가 몰락하여 망명하는 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도모했지만 요절한 아버지를 이역만리에 묻고, 다시 돌아온 조선 땅은 함경도의 ‘배기미[梨津]’라는 작은 항구였다. 거기서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강원도집’이라는 작은 식당을 열어 어린 남매 셋을 키우지만 어머니마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1912년 할머니는 손주들을 데리고 다시 철원 용담으로 돌아온다. 태준의 영특함을 알아본 오촌 당숙의 도움으로 누나와 여동생은 가지 못한 학교를 안협 ‘모시울’ 마을에서 다닐 수 있었지만, 곧 당숙이 돌아가시자 ‘눈칫밥’을 더는 먹을 수 없던 열두 살 태준은 용담의 이봉하 선생 집으로 돌아온다. 열다섯 살이 되는 1918년에 지역의 사학인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우등으로 졸업하는데, 이 학교는 철원 지역 3.1운동의 근거지로 지목되어 이듬 해에 폐교되고 만다.
그 후 태준은 읍내의 농업학교에 진학하지만, 한 달 후 가출을 감행하여 원산에서 2년 동안 객주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기도 한다. 외할머니의 간청으로 돌아온 고향에서 문학 서적을 탐독하던 그는 중국 안동현까지 인척 아저씨를 만나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는 등 방황을 거듭하다가, 지금의 서울인 경성(京城)으로 홀로 떠난다. 이후 갖은 고생을 견디며 주경야독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니는데, 소설가를 꿈꾸던 그는 국문학자 이병기(李秉岐, 1891-1968)의 지도를 받아 창작에 몰두한다. 그런데 불합리한 학교 운영에 맞서 동맹휴교 사건을 이끌었던 태준은 졸업을 앞두고 제적을 당하게 된다. 1924년 스물 한 살의 태준은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이듬해 『조선문단』에 ?오몽녀?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2년 후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도쿄 조치대학(上智大學) 문과 과정을 끝내 중퇴하고 귀국하여, 기자와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친 그에게 철원은 쓰라린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고향이었을 것이다. 북방에서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로 다시 돌아온 마을에서 어린 삼남매는 어른들의 눈치를 계속 봤을 것이다. 가뜩이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 10대 중반의 치기 어린 나이에 겪었을 정신적 방황과 자립에 대한 열망은 그에게 고향을 떠나도록 만들었으리라. 그런데 집필활동을 하며 상허는 늘 자신의 글 속에서 철원을 떠올렸고 제 발로 돌아오곤 했다. 그에게 고향은 어린 시절의 슬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곳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돌아가서 쉬고 싶은 곳, 은둔하며 생각을 가다듬을 곳이기도 했다.

나는 여름마다 용담에 간다. 용담 가면 흔히 한내다리 아래에 가서 긴 여름날을 지운다. 딸기를 따먹고 참외를 사 먹고 낚시질을 하고 하늘에 뜬 청산을 바라보며 다시 물속에 잠긴 청산 위를 헤엄치며 뻐꾸기 소리, 매미, 쓰르라미 소리를 들으며 나도 콧소리로 <학도야>를 부르며……. 그리고 이따금 우르르하고 기차가 도시 풍경을 가득가득 담은 차창들을 끌고 지나갈 때 나는 꽃이면 꽃을 들고 고기꾸럼지면 고기꾸럼지를 들고 높이 휘둘러 원산 금강산으로 가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일빈(一嚬, 눈살을 찌푸림)을 낚어 보는 것도 한내다리에서나 할 수 있는 낚시질이다.
올여름에도 어서 용담에를 가야 한다. 어서 참외가 났으면 …….
그러나 용담은 슬픈 곳이다. 내 옛집이 없고 내 부모가 안 계셔서만 슬픈 것이 아니다. 어려서 이만 글자라도 나에게 가르쳐 준 봉명학교는 망해 없어지고 천진스럽게 장난할 궁리밖에 모르던 모든 죽마들은 대개는 생업을 찾아 동으로 서로 흩어졌다. 몇 사람의 남아 있는 친구도 있지마는 황폐해 가는 동네를 지킬 길이 없어 팔아먹은 조상의 무덤이나 바라보고 한숨짓는 그네 뿐이다.
오오 즐거운 고향이여!
그리고 슬픈 고향이여!
- 수필 「용담 이야기」(1932) 중에서

'수연산방'의 이태준 기념비
'수연산방'의 이태준 기념비

용담의 안쪽 개울을 가리키는 선비소 건너편의 한내다리 아래는 이태준이 여름 휴가를 보낸 곳인데, 지금도 피서지로 손색이 없다고 한다. 가족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무더위를 이기고, 딸기와 참외를 먹고 낚시를 했던 ‘그때 이곳’이 아마도 이태준의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을까. 선비소는 소설 「사상의 월야」의 어린 주인공 ‘송빈이’가 훗날 첫사랑으로 기억할 서울에서 온 아이, ‘은주’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은주는 선비소 개울에서 맨 손으로도 물고기를 잡는 송빈을 보고 신기해서 말을 건다. 이에 우물거리며 대답하던 송빈은 입에 물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를 그만 놓치고 만다. 그리고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비슷한 장면을 떠올리지만, 사실 1941년에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1954년에 발표된 「소나기」보다 13년이나 빠르다.

은주는 눈이 기름송이처럼 빛나며 감탄하였다. 그러자 빗방울이 앵두알 같은 것이 뚝뚝 듣더니, 큰 산이 뽀얗다. 선비소 등성이를 채 올라서기도 전에 채찍으로 쏟아진다. 은주는 파랗게 질려 빗물에 숨이 막혀 헉헉 느끼기까지 하였다. 비는 동네로 들어설 때까지 사뭇 퍼부었다.
- 소설 「사상의 월야」 중에서

그가 생전에 유일하게 졸업한 모교인 봉명학교조차 사라진 고향, 빠르게 도시로 변화해가는 철원에 돌아올 때마다 식민통치 시기의 지식인으로서 상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금의 철원은 전쟁 이전 남북의 분단선인 38선에서 꽤 떨어진 이북에 있는 곳이었으니 그의 월북은 금지된 경계를 넘은 것이 아니라, 고향 땅이 속해 있는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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