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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8. 딱따구리] '새대가리'에 대한 존경심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8. 딱따구리] '새대가리'에 대한 존경심
  • 교수신문
  • 승인 2019.04.2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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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교정 테니스장의 야간조명용 알루미늄 커버에 딱따구리가 앉아 ‘딱따따따’거리고 있다. 과연 녀석은 왜 그럴까?
정세근 교수
정세근 교수

 

딱따구리가 나무에 굴을 파서 집을 만들 때 어떻게 팔까? 산속으로 아침저녁으로 걸어 다니면서 곳곳에서 ‘딱따따따따’거리는 소리는 들었지만, 녀석들이 파놓은 집은 주인이 있건 없건 자주 보았지만, 파는 과정은 보기 어렵다. 파는 순서, 과연 어떨까?
① 마구 판다.
② 가운데부터 판다.
③ 밖에서부터 판다.
④ 점으로 크기를 찍어 놓고 판다.
‘밖에서부터 판다’에는 ‘위에서 아래로 판다’거나 ‘아래에서 위로 판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판다’거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판다’도 포함시키기로 하자. 그러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어떤 방향으로 파거나, 아니면 이쪽저쪽에서 파더라도 계획적인 설계도는 없는 것으로 생각하자.
주변의 교수들에게 물어보니 ①번과 ②번이 가장 많다. 아니면 ③번이다. 거기에는 ‘새대가리’ 이론도 첨가된다. 모이를 놓고 새를 잡을 때, 달아났으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말아야 하는데도 다시 돌아오는 새를 놓고 하는 말이다. 사실 나도 그 종류에 속한다. 잘못한 일을 자꾸 하니 말이다.
그런데 내 눈으로 본 딱따구리가 집을 파는 순서는, 놀랍게도 ④번이었다. 여기서 동물학자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의견은 빼자. 분명 내 눈으로 본 그 딱따구리는 일단 네 군데를 마름모꼴로 점을 찍어 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하좌우의 순서는 분명하지 않아도, 마름모의 각에 점을 찍어 놓고 있었다. 딱따구리는 자신이 들어갈 집을 대략 크기를 정해놓고 파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설계를 하다니. 인간만이 설계도를 그려놓고 현실에 머릿속 구상을 실현하는 줄 알았는데 새도 한다니. 나만 하더라도 딱따구리를 위해 집을 파준다면 과연 네 점을 찍어놓고 파 들어갈까? 역시 나는 새대가리만도 못하다. 별 생각 없이 그냥 팔 테니까. ①번일 테니까.
아무리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어떤 방식으로라도 설계된 것이 있거나, 그저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엄마한테 배운 것을 기억하거나 자신의 수고를 체화시키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점찍기는 그리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이 오징어놀이를 하려고 땅에 줄을 그을 때도 점을 찍어 대략의 모양을 잡아놓고 그리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라고 하더라도 설계라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몇 달 전부터 교정 테니스장의 야간조명용 알루미늄 커버에 딱따구리가 앉아 ‘딱따따따’(정확히는 금속성 베이스가 들어가서 ‘둑두두두’)거리고 있다. 소리가 자못 커서 놀랄 정도다. 과연 녀석은 왜 그럴까? 많은 교수님들이 ‘역시 새대가리’라고 웃는다. 집을 지을 수 없는 쇠에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 이론은 다르다. 깔때기처럼 생긴 조명 덮개를 이용해서 녀석은 자식의 소리를 확대시키고 있는 것 같다. 제 짝을 찾으려고. 자신의 소리를 과장하여 이렇게 큰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짝을 찾고자.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듯, 큰소리를 내는 새가 멋진 짝을 찾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새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마침내 여기까지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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