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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가 있는 한 세계문학은 체제 불평등을 늘 반영할 것"
"제국주의가 있는 한 세계문학은 체제 불평등을 늘 반영할 것"
  • 교수신문
  • 승인 2019.04.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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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포럼'
마카란드 R. 파란자페 교수(인도 고등연구소 소장)
'유럽중심주의를 넘어' 발표

해마다 반복되는 노벨 문학상의 유럽 중심 주의는 논외로 하더라도 세계 문학의 중심은 유럽 문학이라는 고정 관념이 몇백 년 동안이나 깨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26일과 27일 양일간 부경대학교에서 열린 ‘2019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포럼’ 발표자 중 마카란드 R. 파란자페(인도 고등연구소 소장, 인도 자와할랄 네루대학 영문학과 교수)의 ‘유럽중심주의를 넘어: 21세기 지구적 문학 연구’를 지면에 요약 소개한다.

파란자페 교수가 한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파란자페 교수가 한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 내에서의 문학 연구가 국가적 차원의 주요 성향과 문학시장이 지구적으로 확장되면서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관심이 세계화되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모순으로 인한 수많은 이슈와 마주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각 대학은 영문학, 독문학, 남아프리카문학, 한국문학이라는 이름을 국가적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으나,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관심사는 지역에 머물 수도, 국가를 대변하는 경우도, 디아스포라적인 성향이나 유배적인 성향을 띨 수도 있고, 범세계주의적인 성향을 대변할 수도 있다. 이런 제도적인 구조상의 간극을 메꾸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구적인 문학시장의 실체 상의 간극을 메꿔줄 방법은 없을까?
분명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학과를 구성할 때, 세계문학이나 문화연구와 관련하여 가장 주된 우려를 다루기 위해서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주된 두 개의 축인 유럽중심주의와 미국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비유럽-중심주의와 비미국-중심주의 관점에서 세계문학의 개념이나 관례를 재정립해야만 할 것이다.
“세계문학” 다음에는 무엇이 오게 될까? 이 질문은 의당 던져볼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이론, 문학사, 정전 수립과 교육학 차원에서 미치는 여파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문학”이라는 용어를 비판하기에 앞서 질문과 함께 논의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 불필요한 격론과 도발적인 논쟁만을 일삼기보다 건설적으로 이 문제를 고찰해볼 수 있는 출발이 될 것이다.
첫째로, 세계문학은 소위 “학과 붕괴”라고 알려진 현상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현상은 비교문학에서 두드러진다. 감히 말해보자면, 전 세계 어느 대학이건 지구적으로 마구 퍼져가는 학계의 현상에서 자유로운 대학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최소한 이 현상이 불행한 게 아니라면, 사면초가와 같은 위기에 처한 연구 분야의 목을 죄어들어가고 있다.
“세계문학”이란 북반구가 제작한 작품으로 문화적인 통합을 통해 경제적·군사적인 지배를 정당화할 필요성이 반영된 것이다. “세계문학”에서 “세계”라는 말은 마치 민족 문학이 포장해서 팔기 좋고 그 사상을 전파하기에 좋았던 것처럼, 편의를 위해 또 하나의 상상공동체로서 민족을 대체하는 말인가? 인문학의 사용가치와 유용성에 대해 신-자유주의 관점에서 공격을 퍼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문학”의 부상은, 새 동력을 얻어 순환과 부흥의 국면에 들었다가, 이내 죽어가는 학문의 분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학문적, 상업적 저장소에 감춰뒀던 보물을 영업상 급속한 성공을 거두고 수익을 낸 지구적 인쇄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모두 편협한 결과만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세계문학”의 통제는 북대서양을 중심으로 양쪽에 자리한 국가 중 몇 안 되는 나라, 또한 경제적·군사적·문화적으로 주요국가의 손에 맡겨 있다는 점이다. 결국 “세계문학”이란 서구세계가 생각하는 모습대로 존재할 뿐 아니라, 그 양상이, 예를 들어, 미국 문학이나 영국 문학이 주도한 학과 편제나 운영방식에 있어 그리 크게 다르지 않게 작동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계문학”을 읽고 연구하는 것도 전 세계 주요언어로―그 위계질서의 정상에 영어가 우뚝 서 있는―이뤄진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전 세계가 영문학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마도 문학작품의 성공 여부는 또 하나의 영어 사용자 문학에 달려 있다고 보인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은 인도의 문학작품인가? 아니면 영국작품인가? 이미 지구적으로 배포된 작품으로, 다양한 장소,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시장에서, 예를 들어, 봄베이에서 런던으로, 요하네스버그에서 뉴욕에 이르기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드니, 싱가포르, 콜카타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출판되는 작품으로, 전 지구를 섭렵하는 강력한 출판 망에, 과거 해가 지지 않는다고 했던 영국 제국처럼, 발행에 해가 지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그런 작품이 구성될 때 주로 발행되는 언어에 따라 영어로 분류해야 할 것인가?
단지 하나의 언어로 쓰고 출판되었더라도 루시디의 작품과 같은 텍스트는 이미 “세계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담로슈가 주장하듯 모든 문학텍스트는 원래 민족문학이어야 한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루시디의 작품은 민족문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비슷한 예로 몇 가지 희한한 조합을 보이는 작가로, 파묵이나 파울로 코엘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 작품은 각기 터키어나 포르투갈어보다는 영어 번역본이 훨씬 더 유명하고 널리 읽히는 텍스트다. 상황은 밀란 쿤데라, 이탈로 칼비노,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몇몇 “국제적인” 작가의 사례에서도 마찬가지다. 담로슈가 상정한 “순환”의 금문율, 어느 한 국가 문화에 기원을 두고, 다른 문화에서 수용된다는 기준은 그런 텍스트가 드러내는 세속성과 마주하게 되면 완전히 무너지는 듯하다.
세계 문학의 가능성은 세계문학을 생산한 새로운 물적 조건을 창출했는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지난 10년 동안 서구 학계에 영향을 끼친 경제적·정치적 변화에 대한 과잉 결정된 주제이다.
세계문학이란 순전히 유럽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아시아에 거주하는 우리도 세계문학을 이론화하고 그에 대해 묻기 위해 더 잘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괴테의 벨트리테라투(세계문학)는 체계적이지 않고 산발적인 개념이다. 프리츠 슈트리히가 『괴테와 세계문학』이라는 주제만을 다룬 저서에서 밝혔듯이, “괴테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세계문학으로 이해되기를 원한다고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학이라는 표현은 슈트리히가 “마법적인 용어”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해방의 느낌과 함께 공간과 영역에 있어 그와 같은 혜택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이 주제에 대한 괴테의 생각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속해 있음―괴테가 이 표현에 대해 이전부터 생각해왔고, 그 후에도 계속 그렇게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용어 자체는 1827년에 처음 만들어 졌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더 큰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문학에 관한 생각을 그들의 맥락에서 쥐어짜내지 말아야 하며, 지구적 문학에 대해 현대적, 포스트콜로니얼한 생각을 도출해내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적 세계질서에 관한 비전에는 서구 세력―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의 지속적인 지배가 분명히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비평가 중에는 ‘지구적’이라는 용어에 여전히 반대하면서, 보다 더 오래된 계몽 개념인 ‘보편적인’이라는 용어를 살려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비평가 중에 아마도 아이자즈 아마드가 가장 사리분별력이 있고 달변가이다. 뉴욕에서 출간되는 『월간 서평』과의 인터뷰에서, 아마드는 “세계문학은 이 제국주의 체제가 남아 있는 한 그 체제의 불평등을 언제나 반영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긴다.
또 다른 문제는 이 세계문학을 실제로 어떻게 가르치고 읽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괴테 식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개념은 매우 고전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심지어 아놀드 방식의 개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제껏 생각하고 쓴 것 중에 가장 최고의 것은 이 나라 혹은 저 나라에서 골라 모은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골라야만 한다는 식이다. 이 사안에 대해 생각해보면, 전 세계, 다양한 대륙에서 생산되고, 정전으로 삼기 위해 규합한 “위대한 서적”을 읽는 것과 같은 방식은 전 세계 상류층을 전 세계 부르조아를 닮은 무언가로 통합시키는 과정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국가나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처럼, 지지하고 반대하기 전에 대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세계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부터 질문해보아야 한다는 아마드의 의견에 나는 동의한다. 만일 세계문학이 제국주의에 대한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면, 마치 국수주의가 파시즘과 다르지 않기에 원하지 않았듯, 그런 세계문학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문학이 평등주의자적이고, 다원적이며, 다문화적인 성향을 띤 보편적 문화와 문명에 대한 개념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런 개념은 아무리 이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다. 괴테 역시 그런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세계문학은 실현된 실체가 아니라 여전히 이상으로서 요원한 꿈에 불과하다.
십여 년 전 우리는 <와호장룡>이 서구권과 중국에서 서로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 문학과 문화 텍스트에서 크로스오버적 요소뿐만 아니라 서로 엇갈린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세계문학의 영역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균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줄잡아 얘기해도, 세계문학은 논쟁의 장이요 문제가 많은 분야로, 순환되는 다양한 영역에서 엇갈린 수용이 해석상의 도전이 된다. 다시 한번 우리는 권력과 헤게모니 이슈와 마주치게 된다. 누구에게 세계문학이며 누구의 소비를 위한 세계문학인가?
“국가적” 의식이 존재의 방식으로서 언어, 종족, 민족이나 다른 표식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정체성의 보다 원시적인 방식과는 사뭇 다른, 분명하고 식별 가능한 방식인가? 아니면 의식의 초국가적인 형태가 수반하는 것을 상정하고 새롭게 만들어내야 할 것인가? “지구적”이라는 이름표는 또 하나의 타자를 만들어내는 범주인가 이제까지 가능했던 의식의 더 많은 유형 중에 그저 하나에 불과한 것인가? 내게는, “지구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건, 단수형이자 일원화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심지어 경쟁을 벌이고 있는 보편주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세계화와 반-세계화는 초국가적인 운동이며, 반세계화는 그 목적을 착각하게 만들어 세계화의 성공을 부추기는 역할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배적인 세계시민주의가 지역적인 세계주의나 파란만장한 세계주의의 도전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구적 문학과 문화의 범주 안에도 다른 가닥이 존재한다.
시, 문학, 예술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방식이자, 서로의 언어와 말에 관심을 갖고 돌보는 방식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 문학, 예술을 한다는 것은 강의실에서건 “채팅방”에서건, 서적과 잡지에서건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말을 공유하고 배려하는 공간에서건, 문학과 인문학 학도로서 우리가 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서로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뜻한다.

필자 피란자페 교수 소개 : 인도의 존경받는 시인이자 사상가인 마카란드 R. 파란자페  교수는 현재까지 175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인문학에 관련된 다양한 글을 전 세계 학술지와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로컬 문학과 세계 문학 사이의 관계, 세계 문학의 개념 왜곡과 이론 정립에 대한 글을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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