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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 탈식민주의의 주체적 수용을 위하여
학술쟁점 : 탈식민주의의 주체적 수용을 위하여
  • 이경덕 연세대
  • 승인 2003.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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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포박을 넘는 지혜

이경덕 / 연세대·영문학

근자에 들어 한 국내학자의 탈식민주의 관련 저서(고부응, '초민족시대의 민족 정체성') 및 여러 국내 학자들의 논문모음집이 발간됐다(고부응 엮음, '탈식민주의―이론과 쟁점'). 물론 기왕에 입문서 및 해설서들은 꾸준히 번역돼 왔고 그에 대한 논평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며, 파농, 사이드, 아체베의 저서에 뒤이어 그간 난해성 때문에 번역이 기피됐던 스피박과 호미 바바의 저서도 마침내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직접 탈식민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와 상당한 관련성을 보이는 학술잡지 '트랜스토리아'도 창간됐다.

따라서 과거에 거의 전문 학술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던 탈식민주의 이론과 실제가 책의  형태로 출간됨으로써 일반대중에게 접근 용이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파급효과가 이제는 학계에만 국한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탈식민주의의 수용에 대해서 한번 거리를 두고 점검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이드 이래 본격적으로 이론화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접두어인 포스트(post-)는 다른 많은 포스트주의들, 즉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맑스주의의 포스트처럼 그 어떤 것과의 '단절', '이후'를 뜻하는 것이되, 해체론, 탈코드화, 탈영토화의 디(de-)처럼 기존의 것을 해체하며 탈구축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포스트'건 '디'건 간에 자체의 이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다른 이론들이 일단 있어야 하며, 그것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 이들 이론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더군다나 '자체의 이론'이라는 것 자체도 언제든지 해체당할 수 있고 탈구축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론상의 난점, 내지 태생적 한계 때문에 어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영역을 쉽게 열어보이지 못하고 항상 이것과 저것의 '경계' 내지 '막',  '혼종성'과 '양가성',  '흉내내기'나 '전략적 본질론' 같은 것에 주목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것이 있긴 한데 그것은 대략적으로 말해서 '세속성'과 '정치성', '권력과 지배의 문제틀'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틀은 탈식민주의의 거의 모든 이론에 기저로 깔려 있다시피 한, 적극적으로 표방한다 했지만 사실은 거의 문제시되지 않는 전제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선 누구나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것, 나아가 누구나 잘 먹고 잘 살 권리가 있으며, 물리적·정신적으로 침해당하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으며, '타자화'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전제인 바, 이는 아무도 논박할 수 없는 (따라서 해체당할 수 없는) 진실이고, 이것을 넘어서는 모든 '진리'와 거창한 '거대담론'은 마땅히 이데올로기로서 거부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이것이야말로 '유물론'이라 강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시장 자유주의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어떻게 해서 모순이 발생하며 계급과 집단과 인종과 성이 갈등하고 충돌하며, 현단계 자본주의의 모습이 형성됐는가라는 전체 기제를 분석하고 제시하려 할 때마다 그것을 일거에 차단하는 동시에 모든 계기적, 역사(주의)적 설명을 '억압과 지배'에 대한 정당화로 몰아부치게 만드는 데 있다. 맑스의 인도식민지배 논의에 대한 격렬한 반발이 그 좋은 예며, 탈식민주의가 거의 모든 포스트주의를 수용하면서도 (맑스주의의) 모순과 변증법의 이론, 또한 역사적 자본주의 내지 세계체제론과는 융합되지 않는 이유다.

이러한 세속성이나 전략과 전술이라는 이름 아래의 정치성, 그리고 권력과 지배라는 단일항들은 당연히 은밀하게 그 대립항을 내부에 감추고 있어서,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모두다 관념론 아니면 비현실적 이상주의로 매도된다(누가 권력과 돈을 싫어하랴. 싫어하는 척 하는 것은 위선이고 이상주의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에서는 당연히 생존문제의 다급성의 위계에 따라 이론과 행위의 위계서열이 정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다급성'을 누가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것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제3항의 측면보다는 재현과 대표성의 문제, 이를테면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스피박)라는 문제의식이나 분열성의 보편성(식민주체도 사실은 분열되어 있다)이라는 정식화로  전환시킨 결과가 바로 탈식민주의 이론의 외면적 복잡성과 난해함 내지 아포리아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러한 전제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내지는 타협)이라는 이름 아래 거의 모든 것을 허용할 태세가 돼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모든 단단한 것을 사라지게 하는 자본 및 시장의 논리, 그리고 복마전 같은 의회주의 정치권의 논리(여기서는 '아는 사람들' 끼리의 안으로 팔굽히기, 배려가 필수요건이되, 아는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즉 민주화가 확장되면 모두가 동지가 될 것이라는 구차하고도 구태의연한 변명이 깔려있다)와 흡사하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가치와 진리의 후광을 벗겨버리고 오직 돈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무형의 권력만이 남게 만드는 저 자본주의의 논리 자체가 아닌가. 아마도 봉건적인 신분사회에서의 '명예'가 권력으로 바뀌어지는 그 자본주의 문화혁명의 결과를, 푸코에 그토록 많이 기대고 있는 탈식민주의에서만큼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탈식민주의가 자체의 이데올로기를 살피고 그야말로 자신의 '위치'를 살피고자 한다면 세속성, 정치성, 권력의 이론이 자신이 이론화하고 있는 대상 자체가 돼버리지 않는가를 경계하는 변증법적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며, 이는 국내의 탈식민주의 논자들에게도 필수적인 과제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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