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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있어도 안식처 없던 이태준...사람은 가고 '길'만 남았다
고향은 있어도 안식처 없던 이태준...사람은 가고 '길'만 남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4.2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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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과 철원 : 환영받지 못한 고향에서 그의 문장을 읽다
백마고지역에서 멈춘 경원선 'DMZ평화열차'
백마고지역에서 멈춘 경원선 'DMZ평화열차'

 

‘촌뜨기길’, 1930년대 일제강점기 화전민의 삶을 따라 걷는다

‘촌뜨기길’은 철원의 옛 중심지인 관전리(官田里)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태준의 소설 「촌뜨기」를 따라 만들어진 길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실제 배경 순서에 맞게 안내 팻말을 세워둔 이 탐방로는 주인공과 함께 걸어가듯이 작품을 체험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2016년 철원군청이 한국예총 철원지회와 함께 만든 촌뜨기길은 소이산(所伊山) 뒷길로 들어가서 지금의 율이리 들판을 휘돌아나간다.
이 옛길을 따라 학교를 다녔던 이태준의 추억은 작품 속 가슴 시린 이야기와 함께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전해진다. 물론 총 5.4㎞로 도보로 약 2시간이 소용되는 이 둘레길의 여건은 아직 일반 방문객이 원활히 탐방할 수 있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뜨기」를 탐독한 독자라면 이 길을 걸으며 그 문장들 속에 남아 있는 상허의 고향에 대한 진한 애정과 식민지 민초들에게 보낸 애처로운 연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태준이 1934년 3월 『농민순보』에 발표한 소설 「촌뜨기」는 일제의 집요한 수탈과 착취의 실상, 그리고 억압적인 조건 아래에서 식민지 최하층 민중이 겪는 막막한 고난을 그린다. 당시 철원평야의 중앙부는 경원선의 중간기착지이자 금강산전기철도 환승역이 통과하는 ‘철원역’이 건설되어 근대도시로 개발되고 있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힘겨운 생존 투쟁을 벌이던 화전민 ‘장군이’는 결국 한 뼘의 농사지을 땅도 얻지 못하고, 아내와도 다시 헤어지고 철원을 떠나며 서러운 눈물을 삼킨다.

1946년으로 추정되는 이태준의 모습
1946년으로 추정되는 이태준의 모습

촌뜨기길의 시작은 장군이가 구류 생활을 마치고 나오는 첫 장면과 같이 옛 철원경찰서다. 오늘날 DMZ의 상징적 건물로 남은 ‘노동당사’ 옆에는 무너진 한 무더기의 콘크리트 잔해가 울타리 안에 흩어져 있다. 바로 ‘철원경찰서터’다. 전쟁 당시 북한군이 다시 이곳의 물자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폭격기들은 강원도의 번성한 도시인 철원 시가지를 그야말로 잿더미로 만들었다.
폐허로 남은 철원경찰서 앞에서 출발한 촌뜨기길은 노동당사 옆의 두 번째 구간인 옛 철원면사무소 자리에서 ‘소이산’ 방향으로 길을 꺾는다. 그리고 지금은 직선의 농지로 구획된 ‘안악골’을 지나, 전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지뢰밭’을 돌아가는 이 길은 ‘율이리 고개’를 넘어 ‘떡전거리’에서 마무리된다. 이 촌뜨기길은 작품 속 배경마다 설치된 13개의 팻말로 나누어지는데, 열두 번째 구간과 마지막 열세 번째 구간은 각각 ‘떡전거리에서 이차떡을 먹던 곳’과 ‘다시 이별을 하는 관전리 길’이다.

장군이는 떡장사에게 떡값을 치르고는 또 십 전짜리 다섯 닢을 꺼내었다.
“이거 받아…… 열 냥이나 채 가지고 가……….”
아내는 받지 않았다. 장군이는 자꾸 손을 내어미는데 아내는 받지 않고 돌아섰다.
장군이는 또 소리를 꽥 질렀다.
“받어…….”
아내는 할 수 없이 받아서 또 치마끈에 옭쳐매었다.
“이 길로만 사뭇 내려가. 그럼 큰길이 되니…… 큰길로만 자꾸 가면 알지 뭐…….”
아내는 눈물에 흐린 눈으로 남편을 돌아보느라고 몇 번이나 남과 부딪치면서 아랫장거리로 타박타박 내려갔다. 장군이는 멍청하니 큰길 가운데 서서 아내의 뒷모양만 바라보았다. 아내의 그림자가 거의 이층집 모퉁이로 사라지려 할 때였다. 무엇인지 갑자기 허리가 다 시큰하도록 볼기짝께를 들이받았다. 쓰러질 뻔하면서 두어 걸음 물러나 얼굴을 돌리니 얼굴에는 대뜸 불이 번쩍하는 따귀가 올라왔다. 그리고 뺨을 때린 손길과 같이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이 자식아, 왜 큰길에 떡 막아서서 종을 울려도 안 비켜나? 촌뜨기 녀석 같으니…….”
- 소설 「촌뜨기」(1934) 중에서

이태준문학비 뒤편에 새겨진 단편소설 '고향' 중 한구절
이태준문학비 뒤편에 새겨진 단편소설 '고향' 중 한구절

‘독서당’, 글 읽던 곳은 사라져도 이태준의 글은 남는다

촌뜨기길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율이리는 ‘독서당(讀書堂) 마을’로도 불린다. 그 이름처럼 밤나무와 배나무가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태준의 작품에서 이곳은 ‘독서당리’나 ‘독시장’으로도 등장한다. 1943년 『국민문학』에 발표된 단편소설 「돌다리」는 독서당 마을을 배경으로 병원 확장을 위해 땅을 팔자고 설득하는 의사 아들과 땅을 지키려고 하는 아버지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천금이 쏟아진대두 난 땅은 못 팔겠다. 내 아버님께서 손수 이룩허시는 걸 내 눈으로 본 밭이구, 내 할아버님께서 손수 피땀을 흘려 모신 돈으루 장만허신 논들이야. 돈 있다고 어디가 느르지 논 같은 게 있구, 독시장 밭 같은 걸 사? 느르지 논둑에 선 느티나문 할아버님께서 심으신 거구, 저 사랑마당엣 은행나무는 아버님께서 심으신 거다. 그 나무 밑에를 설 때마다 난 그 어룬들 동상이나 다름없이 경건한 마음이 솟아 우러러보군 헌다. 땅이란 걸 어떻게 일시 이해를 따져 사구 팔구 허느냐? 땅 없어봐라, 집이 어딨으며 나라가 어딨는 줄 아니? 땅이란 천지만물의 근거야. 돈 있다구 땅이 뭔지두 모르고 욕심만 내 문서 쪽으로 사 모기만 하는 사람들, 돈놀이처럼 변리만 생각허구 제 조상들과 그 땅과 어떤 인연이란 건 도시 생각지 않구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 다 내 눈엔 괴이한 사람들루 밖엔 뵈지 않드라.
- 소설 「돌다리」(1943) 중에서

원래 조선 시대에 ‘독서당’이란 곳은 뛰어난 젊은 문관을 선정해 고향에서 조용히 학문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한 장소였다. 이에 비해 율이리 독서당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독선생(獨先生)을 두고 글 읽기를 즐긴 서당과 같은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지명인 탓에 현재 ‘독서당교’, ‘독서당길’ 외에 독서당과 관련된 직접적인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율이리에 2006년에 들어선 폐기물처리장 주변에서 뜻하지 않게 그 이름을 발견한다. 철원군의 생활폐기물을 트럭으로 반입하는 환경미화원과 군 장병의 대기 장소로 쓰이게 될 작은 정자가 2015년 철원환경자원사업소 입구에 세워졌는데, 그 정자에 ‘독서당’이라는 간판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라도 그 유서 깊은 명칭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할지, 그 장소가 애석하다고 할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발길을 옮긴다.

‘백마고지역’, 우리 안의 분단 트라우마를 들여다본다

이태준은 온건한 모더니스트에서 해방 직후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로 변신하는데, 이는 아마도 무기력하게 숨죽이며 지냈던 일제강점기 말의 자책과 울분에서 나온 변화일 것이다. 그가 1946년 3월 『문학』에 발표한 「해방전후」는 자신의 일부 친일 활동에 대한 자아비판과 사상의 급변에 대한 심경이 담겨 있다. ‘8.15 광복’의 기쁨을 누렸던 고향의 모습은 상허의 작품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일본이 지고 말었다면 우리 조선이 어떻게 될 걸 짐작들 허시겠지요?”
그제야 그것도 조선옷 입은 영감 한 분이,
“어떻게든 되는 거야 어디 가겠소? 어떤 세상이라고 똑똑히 모르는 걸 입을 놀리겠소?”
한다. 아까는 다소 흥미를 가지고 지껄이던 운전사까지,
“그렇지요. 정말인지 물어보기만도 무시무시헌 걸요.”
하고, 그 피곤한 주름살, 그 움푹 들어간 눈으로 버스를 운전하는 표정뿐이다.
현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조선이 독립된다는 감격보다도 이 불행한 동포들의 얼빠진 꼴이 우선 울고 싶게 슬펐다.
‘이게 나 혼자 꿈이나 아닌가?’
현은 철원을 와서야 꿈 아닌 『경성일보』를 보았고, 찾을 만한 사람들을 만나 굳은 악수와 소리 나는 울음을 울었다. 하늘은 맑아 박꽃 같은 구름송이, 땅에는 무럭무럭 자라는 곡식들, 우거진 녹음들, 어느 것이고 우러러 절하고 소리 지르고 날뛰고 싶었다.
- 소설 「해방전후: 한 작가의 수기」(1946) 중에서

현재 운행 가능한 경원선의 남쪽 중단점인 백마고지역
현재 운행 가능한 경원선의 남쪽 중단점인 백마고지역

이 자전적인 작품에는 해방 이후에도 반민족 행위를 일삼는 문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을 개탄하는 작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해방 이후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겪으며 일제강점기를 견뎌온 동포들이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모습이란 도무지 참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적극적인 단체활동과 남쪽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의 월북을 이해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첨예하게 나누어진 그 ‘경계’ 위에서 자신의 급격한 방향 전환이 인생 후반부 작품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곤, 월북 당시의 그도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위해 가설한 경원선 철로는 드넓은 철원평야를,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산(辛酸)한 운명에 빠진 이태준의 삶을, 그리고 70년 넘는 세월 동안 갈라져 있는 남북을 가로지른다. 상허는 1930년대 당시 빠르게 번화가로 변하며 인구가 늘어나던 철원읍의 풍경을 어떻게 보았을까. 서울역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온 이태준이 ‘철원역’ 플랫폼에 내리면 친구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는 상허의 어느 문장을 읽으면 지금의 그 폐허 위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에 아득해진다.

그런데 2007년 백마고지역의 역명을 결정할 당시의 이야기는 계속 회자된다. 대북안보의 상징적인 장소인 백마고지역을 대체할 다른 새 역명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역민들 중 일부가 새롭게 제시한 것은 주변의 역사적 자원과 근대문화를 포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태준역’이었다. 상허와 관련된 아무런 기념 시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철원군청 추산으로도 연간 5만여 명이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철원을 찾고 있었지만, 그 안에 대한 군부대의 ‘반대’는 강력한 것이었고 최종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결국 남북협력의 산물인 경원선 복원사업은 ‘평화’를 확장하고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으로 활용된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하지 않은 안보교육의 재료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사례는 우리가 살아온 분단시대가 만들어낸 북에 대한 적대감이 얼마나 뿌리 깊고 견고한 것인지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옛 경원선로가 새로운 선로의 복원공사 이후 ‘외로운 섬’처럼 남았듯이, 분단시대를 지나오며 딱딱하게 굳어진 고향의 마음은 상허와 계속 불화하고 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세워진 ‘장벽’을 해체하는 과정은 끊어진 철길을 복원하는 작업이나, 봉우리 위의 GP를 철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일지 모른다. ‘백마고지역’과 ‘이태준역’ 사이, 좁히기 어려웠던 입장 차이 그 어딘가에 우리 안에 내재된 ‘분단의 트라우마’가 있다.
그 아픔은 남북의 분단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지만 계속 세대를 넘어 전해진 ‘마음의 생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8년부터 불어온 ‘평화의 봄바람’이 그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지 못한다면 이태준은 결코 고향에서 환영받을 수 없을 것 같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다양하게 재구성되고 풍부하게 재발견되어야 한다. 촌뜨기길을 주도적으로 기획했던 시인 정춘근은 이렇게 말한다. “상허 이태준은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고향인 철원에서조차 제대로 된 평가나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이 촌뜨기길을 통해 지역의 인적·물적 유산을 선입관 없이 객관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길 바랍니다.” 식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고난이 생산하는 고통은 한 세대만의 적대감과 증오 감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태준문학비’, 드넓은 ‘생명평화일굼공원’엔 문학비 하나 세울 곳이 없다

백마고지가 보이는 대마리 ‘두루미평화정보화마을’의 영농조합법인에서 운영하는 식당이자 홍보관인 ‘두루미평화관’ 앞에는 ‘이태준 문학비文學碑’와 ‘이태준 흉상(胸像)’이 세워져 있다.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곳에 서 있다. 그 위치만 보아도 ‘월북작가’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과정 자체가 강한 반대에 부딪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비석은 ‘이태준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사)민족문학작가회의, 대산문화재단, 철원문학회가 주축이 되어 2004년 10월에 건립되었다.
2019년에는 두루미평화관 뒤편 농지를 매입하여 만드는 ‘생명평화일굼공원’ 개장했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26,570㎡의 면적에 각종 조경과 편의시설을 갖춘 이 문화공원에는 녹지와 정원, 연못과 생태수로, 수변 데크, 가족 쉼터, ‘생명의 마당’, 평화전망대, 다목적운동장, 체력단련장 등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태준과 그의 문학에 대한 기억은 들어설 공간은 단 한 뼘도 허용되지 않았다.

작품 속 배경에 따라 총 13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지는 촌뜨기길(안내판)
작품 속 배경에 따라 총 13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지는 촌뜨기길(안내판)

 그러든 말든 흉상으로 만들어진 이태준의 차가운 얼굴은 군사분계선 너머 북녘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동상의 양쪽 어깨높이가 비대칭이다. 제작자는 남과 북 양쪽에서 잊혀져 온 이태준의 비애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 삐딱한 어깨 형상이 마치 남과 북 어디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그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계속 눈에 밟힌다.

내 고향은 철원도 아니요, 배기미도 아니요, 서울도 아니다. 부산 부두에 발을 올려 딛는 때부터 내 고향이다. 내 고향은 나에겐 편안히 쉴 자리를 줄 리가 없다. 그것을 바라고 그것을 꾀할 나도 아니다. 그곳에는 여러 동무들이 있을 것이다. 어서 신 들메를 끄르지 말고 그대로 뛰어나오시오. 당신만은 몸을 사리고 저편에 붙지 말고 용감하게 우리 속에 와 끼어 주시오. 이렇게 부르짖는 힘차고 씩씩한 친구들이 나를 맞아 줄 것이다. 오! 어서 닥뜨려다고!
- 소설 「고향」(1931) 중에서

문학비 뒷면에 새겨진 작품 속 구절은 마치 작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 같은 말이다. 원래 ‘고향’이란 말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태어나 자랐거나 조상이 오래 살던 곳이다. 두 번째 의미는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거나 정답게 느끼는 곳’이다. 이태준이 고향 마을에 와서 느꼈던 정답고 평화로운 마음을, 그를 그리워하며 철원을 찾는 사람들도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고향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그 고향은 남북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화합의 땅’일 것이다. 그곳은 좁은 경계에 끼어 있던 상허만의 고향이 아니라 활짝 열린 이 땅 전체일 것이다. 그래서 ‘이태준 문학마을’은 단지 누군가의 꿈이 아니라 우리 모두 만들어갈 평화로운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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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조 2019-06-16 18:41:19
안녕하세요! 이 글을 쓰신 분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이태준 작가가 다녔던 봉명학교를 세우신 설립자이자 독립유공자 이봉하 선생님의 외 증손녀입니다. 이태준 작가 생전 저희 외가에 머무를 당시 유일하게 이태준 작가를 만난던 제 친정 어머니께서 이태준 전문가로 활동하시는 어떤분이 어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계시다며 안타까워 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연히 이런저런 뉴스를 검색중 이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촌뜨기길 안내도에 나온 고증은 도대체 누구의 고증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 기사 작성자가는 어떠분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