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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독백의 철학에서 대화의 철학으로』(문예출판사 刊)펴낸 최신한 한남대 교수
[저자 인터뷰]『독백의 철학에서 대화의 철학으로』(문예출판사 刊)펴낸 최신한 한남대 교수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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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07 16:51:46

철학이 대화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무지에 무지한 이들에게 지적산파가 되어 대화를 감행했던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철학은 줄곧 ‘독백’하고 있었다. ‘홀로주체’에 몰두하던 철학이 타자를 인정한 사건은 ‘서로주체’라는 인간됨의 조건에 눈 뜬, 이른바 포스트모던 철학이 부상한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20세기 철학이 ‘차이’의 극단화로 소통의 기반마저 위협하자, 대화는 다시 시대의 과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화의 철학을 다시 주제화하기 위해 해석학자 슐라이어마허를 등장시키고 있는 최신한 교수는 “차이가 실제적 대화를 통해 여과되는 ‘공동적 동일성’”임에 주목한다.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우위다툼이 소득없는 싸움이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 교수가 독자의 해석에 이 책의 명운을 거는 것도, 일방적 강의가 아닌 대화를 통해서만 ‘공동적 동일성’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해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의 테두리 내에서만 고찰될 경우 오해되거나 심지어 폄하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부각시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 드러나 있는 저의 수사학은 독자의 해석학과 만날 때 비로소 그 변증법적 결실을 맺을 수 있겠지요.”

최 교수에게 강의실과 학회장에서 슐라이어마허를 가르치고 발표하는 것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죽은 슐라이어마허에 ‘대해’ 말하는 것, 혹은 그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어야 함은 최 교수의 딜레마이다. 그는 “대화 상대자와 공유하는 사실에 대한 관점들의 만남, 즉 그의 관점을 자신의 관점에서 수용하고 자신의 관점을 전달하는 관계”를 엮어야만 하는 것이다. 최 교수가 이런저런 모임에서 의미를 두는 것도 이것이다. “사실 학회나 세미나에서 이 점이 성취되지 못한다면 그 모임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관점이 없는 사람이 토론에 참여할 수 없으며 다른 관점과의 교호적 관계를 배제하는 사람이 보편을 논할 자격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간에 쫓겨 토론이 제한되는 행사 위주의 학회나 세미나에서는 관점들의 만남이 상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저는 독일 유학 시절 철학과 신학 세미나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국제슐라이어마허 학회 발표를 통해서 이러한 관계를 인상적으로 체험한 바 있습니다. 또한 관점들의 교호적 관계가 학문의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사회 정치의 장에서도 실질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흥분된 마음으로 지켜본 기억이 새롭습니다.”

최 교수가 지금, 우리에게 슐라이어마허와의 대화를 권하는 것은 ‘외적 대화’뿐 아니라 ‘내적 대화’의 빈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대화에는 다른 사람과의 ‘외적 대화’에 앞서 문제 자체와의 ‘내적 대화’가 필수적입니다. 내적 대화는 분명한 정치적 견해와 이유 있는 신앙과 교육의 규정적 목적을 갖게 합니다. 생동적인 개별 견해가 ‘외적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과 만날 때 ‘공동적 견해’가 산출되며, 이것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외적 대화’는 오히려 분방하게 넘치면서도 ‘내적 대화’가 빈곤한 탓에 ‘공동적 견해’, 즉 생산적인 문화로 발산하지 못한다는 말은 뼈아픈 지적이다.

최 교수에게 ‘내적 대화’란 한편으로는 특정철학에 대한 현재성 규명작업이기도 하다. “한국철학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학자의 세부전공이 예컨대 칸트를 하면 평생 칸트를 다루고 헤겔을 하면 평생 헤겔리안이 되는 식으로 항상 동일한 것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고유한 사상 지평을 위해서는 특정 철학에의 몰두와 더불어 그 현재성을 규명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슐라이어마허를 지금에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프랑스제 철학’의 유행에 성찰의 계기를 불식시킬 또 하나의 수입철학이 아니려면 슐라이어마허와 대화하면서 당대적인 의미를 산출해야만 한다는 그의 말은 곰삭은 대화의 결과인 듯 보였다.
이옥진 기자 zoe@kyo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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