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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사후 주체와 거리두기 전략
기형도의 사후 주체와 거리두기 전략
  • 오연경 교수
  • 승인 2019.04.25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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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30주기 기념 시전집(문학과지성사,2019.03)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30주기 기념 시전집(문학과지성사,2019.03)

한국 사회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문학적 대응으로 민중시, 노동시, 농민시 등의 리얼리즘 문학이 전성기를 누리던 1980년대의 끝자락에, 극적인 죽음의 후광을 입고 세상에 나온 기형도의 유고 시집은 당시 비평계의 담론이나 시사적 계보에 의해 범주화되기에는 다소 난감한 대상이었다. 1980년대 노동시는 전통적 서정시와 ‘1인칭 서정의 장르 문법’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근대 문학의 ‘진정성 담론’과 밀접하게 결탁된 것이었다. ‘노동자-시인’의 언어가 현장과 밀착된 재현의 진정성 신화를 구가하던 자리에서 기형도는 ‘지식인-시인’이라는 자의식 하에 다른 언어, 다른 시를 꿈꾸었다. ‘노동자-시인’의 언어가 쟁취한 진정성은 ‘시인=화자’라는 1인칭 문법, 그리고 그것이 담보하는 1980년대의 ‘정치적 개인’, 즉 집단적 정체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형도는 ‘시인=화자’의 문법에 내재한 억압성을 성찰하면서 현장과 육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지식인-시인’의 언어로 도시적 개인의 실존적 정체성을 모색하였다.
특히 1인칭 발화의 억압성에 대한 경계는 인칭 및 시선에 대한 기형도의 고민이 출발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내면-고백이라는 1인칭 장르 문법의 극복 방안을 일관되게 모색해 왔으며, 그러한 미학적 전략을 추동한 원동력은 1인칭의 동일화 작용에 저항하는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다. 거리두기는 진술하는 목소리와 진술되는 대상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마련함으로써 발화하고 기록하고 바라보고 구성하는 주체의 행위를 전면에 노출시키는 방식이다. 이러한 전략은 사실성보다는 상징성을 추구하며 감정의 폭로보다는 지적인 분석을 주안점으로 삼는다. 기형도의 시에서 거리두기는 시간적 간극을 벌리는 방식으로 실현되는데, 여기서 ‘사후(事後/死後) 주체’가 출현한다. 사후 주체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 이후에 도래하는 주체이자 기록의 시점에서 사건의 시점을 조망하고 구성하는 쓰기의 주체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참담했던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포도밭 묘지1?) 등의 구절은 사후 주체의 압축적 형상을 보여준다. 먼저 상실의 사건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쓰기가 지금 행해지고 있다. 관습적인 시 장르의 문법에 따르면 ‘나는 쓴다’라는 행위는 괄호 속에 감춰지고 상실의 사건 자체만 텍스트로 재현되지만, 기형도의 시에서는 ‘나는 쓴다’라는 텍스트화의 과정이 동시에 재현된다. 따라서 사후 주체는 이중의 대상화를 수행한다. 하나는 과거의 사건의 대상화이며, 다른 하나는 대상화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대상화이다. 따라서 주체의 발화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사건으로 겹쳐지며, 주체의 내면은 육성으로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을 통해 장면이나 사건으로 전시된다.
이러한 사후 주체의 특성은 기형도 시에 대한 그간의 비평적 통념을 재고하게 한다. 우선 유년의 체험이 어머니와의 분리 이전의 유토피아라거나 현재의 시인의 의식을 잉태한 무의식적 원형이라는 관점은 수정되어야 한다. 유년의 체험은 사후(事後) 주체의 현재적 관점에 의해 변형되고 재구성된 것이며, 그렇게 구성된 유년의 공간은 홀로 버려짐이라는 실존의 냉혹한 풍경이자 존재의 상징적 질서로 제시된 것이다. 또한 기형도 시에 만연한 죽음 의식을 시인의 돌연한 죽음과 닿아 있는 비극적 세계관, 시인 자신의 절망과 환멸의 투영으로 해석해 온 관행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기형도에게 죽음은 삶의 구조와 질서를 구축하게 해주는 상징적 기제이며, 최후의 미래로 보내진 사후(死後) 주체로 하여금 삶의 형식적 완결로 가정된 죽음의 관점에서 삶 전반을 조망하게 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의 현대시에서 기형도만큼 시 쓰기에 대한 자의식과 텍스트에 대한 성찰을 적극적으로 표면화한 시인은 없었다. ?흔해빠진 독서?나 ?오래된 서적?에서 드러나듯 그는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고자 하였고 자기 자신을 하나의 텍스트로 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계와 대상을 읽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주체의 의지가 아니라 주체 안의 타자, 그것이 가져오는 불안과 균열과 우연에 의해 성취된다. 그는 이러한 세계 이해의 방식을 ‘나’와 ‘그’라는 인칭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었다. 기형도의 시에서 ‘그’는 내 안의 타자, 익숙하고도 낯선 또 다른 나이며, 삶에 맞붙어 있는 죽음이자 일상에 감춰져 있는 실재, 무엇보다 ‘나’라는 1인칭을 뒤흔들어 비인칭화하는 또 다른 인칭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나’의 발화에 균열을 가하는 ‘그’의 출현 양상은 시적 주체에 대한 기형도의 가장 심오한 미학적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기형도는 시인과 화자를 분리하는 목소리의 고안에 몰두했으며, ‘쓴다’는 행위에 대한 메타적 인식과 ‘쓰인 것’의 가상적 텍스트성을 최대한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의 사후 주체는 서정시의 장르 문법인 동일화에 저항하는 미학적 전략이자, 유년의 방에서 죽음의 묘지에 이르는 인간 실존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존재론적 거점이었으며, 나아가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고민하며 시의 윤리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원동력이었다. 기형도는 시의 주체에 대한 첨예한 고민에서 출발하여 장르 문법의 미학적 실험을 통해 존재와 타자의 윤리를 실천하는 현대시의 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이제 기형도라는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새롭게 펼쳐볼 때가 되었다.

오연경·고려대 기초교육원 교수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 평론으로 등단하여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나의 알량한 글쓰기가 세상과 스스로를 속이는 사이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글을 쓰고 연구하고 있다. 함께 엮은 책으로 『새로 쓰는 현대시 교육론』 『국어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문학과 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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