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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배먹고 이딱기'의 돌세포
[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배먹고 이딱기'의 돌세포
  • 권오길 명예교수
  • 승인 2019.04.22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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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한겨울에는 정녕 봄이 올라나 하는 마음이었으나 봄 이기는 겨울 없다고 겨울이 물러나자마자 하루가 멀다 하고 새뜻한 봄이 물밀듯이 한창이다. 꽃 대궐 과수원에 배나무가 온통 화사한 백옥 같은 꽃을 피운다.
  배나무(Pyrus serotina)는 장미과, 배나무속에 드는 목본식물이고, 세계적으로 서양 배와 동양 배로 나뉘며, 생김새와 맛이 제각각이다. 배나무는 갈잎큰키나무(落葉喬木)로 양성화인 배꽃은 새하얗고, 잎보다 먼저 피며, 꽃받침과 꽃잎은 각각 5장씩이고, 암술은 2∼5개, 수술은 여럿이다. 열매는 꽃자루 맨 끝의 불룩한 꽃턱(花托,receptacle)이 발달해서 생긴 것이고, 종자는 무척 검다.
  배에는 탄수화물인 당분(과당 및 설탕)이 10∼13%이고, 사과산?주석산?시트르산 등의 유기산과 비타민 B와C, 식이성섬유(dietary fiber), 지방이 들었다. 배는 날로 먹거나 주스?통조림?잼 등을 만들어 먹으며, 육고기를 연하게 하는 軟肉酵素가 있어서 고기에 갈아 넣기도 한다. 또 감기?기침(해소)?천식?가래 끓음에 좋아서 배 속을 파내고 그 속에 꿀을 넣어 푹 쪄서 배숙(梨熟)을 만들어 먹는다. 큰 이익은 남에게 주고 거기서 조그만 이익만을 얻음을 놓고“배주고 배속 빌어먹는다.”고 한다던가.
  생물과학생들에 가르치는 해부학책의 위벽그림설명에 배 모양을 한 세포(pear-shaped cell)가 나오는데, 그 그림이 우리 배와 생판 달라서 처음엔 얼마나 헷갈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마냥 끙끙 앓아오다가 미국에 갔을 적이다. 과일상점에서‘pear’라고 쓰인 것을 보고야“그랬구나!”하고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사실 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찰나였다. 우리 배는 굵고 둥그스름한데 비해 서양 배는 못 생기고, 작은 백열전구나 조롱박을 빼닮았다. 게다가 서양 배는 질긴 果肉이 하도 딱딱하여“잇금도 안 들어간다.”는 말이 실감난다.

  배 과육, 작약이나 달리아의 덩이뿌리, 매화나 복숭아의 종자껍질엔 돌세포(石細胞,stone cell)라는 세포가 들었다. 이것은 세포벽이 아주 두껍고 딱딱하게 된 후막세포로 리그닌(lignin), 수베린(suberin), 큐틴(cutin)들이 들었다. 그리고 ‘배 먹고 이 닦기’란 배를 먹으면 이까지 하얗게 닦아진다는 뜻인데, 실제로 딱딱하게 씹히는 석세포가 치약연마제 몫을 한 탓이다. 또한 그것은 워낙 야물어 소화가 안 되고 대변에 묻어난다.
  대학 2학년 2학기에 기생충학강의를 하신 李周植선생님은 1920년생이시니 살아계셨으면 올해가 100세이시다. 그 때만도 호랑이 담배 피울 때라 大便檢査(stool test)라는 것조차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실험시간에 대변 속 기생충 알을 눈이 빠지도록 찾고 찾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나오라는 회충, 요충 따위의 蟲卵은 안 보이고 하나같이 돌세포만 무진장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데 과연 선생님께서 가져다주신 실험용대변들이 어느 대학생들의 것이냐를 놓고 우리끼리 논쟁이 벌어진다. 결론은 둘레에 배 밭이 많은 모 여대생들의 것임을 확인하고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여태 생생하다. 도리 킬 수 없는 물 같은 세월은 아득히 멀리 흘러갔어도 그런 그 자취(餘震)는 아련히 남는다. 암튼 지금은 이들 인체기생충도 보호해야 할 만큼 줄고 말았다.
 “배 썩은 것은 딸을 주고 밤 썩은 것은 며느리 준다.”란 그래도 얼마간 먹을 수 있는 썩은 배는 딸을 주고 전혀 먹을 것이 없는 썩은 밤은 며느리를 준다는 뜻으로, 며느리보다는 자기가 낳은 딸을 더 아낌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고, ‘烏飛梨落’이란 일이 잘 안 될 때는 안 좋은 일이 겹친다는 말이렷다.
  겨레말 지킴이 외솔 최현배선생은 비행기를‘날틀’, 라디오를‘소리틀’, 이화여자대학교를‘배꽃 계집 큰 배움터’따위로 부르시며 한글보급에 매진하셨다. 梨花女子大學校의 상징은 싱그러운 배꽃인데, 대학배지를 들여다보면 안쪽 암술자리에 학교건물과 함께 眞善美가 들었고, 둘레 수술 자리에는 설립연도와 한자, 영어로 교명을 썼으며, 그 테두리를 5장의 꽃잎이 둘렀다.
  그리고  예로부터 봄을 알리는 하얗게 핀 배꽃의 비할 바 없는 아름다움을 많은 시와 노래로 읊었다. 배꽃하면 잊히지 않는‘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다정(多情)도 병(病)인 양(樣)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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