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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후 사회' 연구 미래 과제...여군 늘며 '젠더' 주제도 부각
'전쟁후 사회' 연구 미래 과제...여군 늘며 '젠더' 주제도 부각
  • 교수신문
  • 승인 2019.04.1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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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죽은 자만이 전쟁의 종말을 보았다"는 경구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지구상에서 무력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하면 이러한 '시지푸스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영국군사사 연구의 흐름과 전망

 

 군사사(軍事史, military history)란 기본적으로 군대 및 전쟁 - 군사제도, 군사전략 및 전술, 군사사상, 무기와 장비 등 - 에 관한 이야기로 정의될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연구범위를 어느 선까지로 정할 것인가와 연관되어 있다. 군사사를 여전히 실제로 벌어진 전쟁의 역사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너무 편협한 정의라는데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오늘날 군사사는 단순히 전쟁 자체만이 아니라 이와 관련된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는 문화와의 상호작용까지 포괄하는 분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흔히 전쟁사로 불리던 이 분야 연구는 1970년대 중반 이래 군사사라는 보다 포괄적인 명칭 아래 그 관심 범위를 꾸준히 넓혀 왔다. 단순히 군대와 전쟁 자체만이 아니라 군대와 사회의 관계, 전쟁과 평화의 관계, 그리고 전쟁과 문화의 관계 등 총체적인 접근과 이해를 도모해 온 것이다. 이러한 다층적인 접근 덕분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승리를 위해, 보다 직접적으로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인간 군상(群像)의 고뇌와 열망을 더욱 총체적이며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군사사, 9세기 들어서야 학문 정립

군사사는 인류의 문자발명과 더불어 태동했다고 볼 수 있다. 글쓰기가 시작될 시점에 이미 왕과 군대는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자신이 다른 집단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승리했고, 이로써 획득한 것이 무엇인가를 구전(口傳)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바로 원초적 형태의 군사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그리스, 로마, 중세, 그리고 절대왕정 시대를 거치면서 전쟁 관련 기록들이 풍성해져 왔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군사사가 하나의 학문 분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였다. 절대왕정 시대에 전쟁이 다반사로 벌어졌고 게다가 마우리츠, 구스타프 아돌프,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위대한 군사지도자의 출현도 있었으나, 군사사에 관한 한 내세울 만한 창의적인 저술은 거의 없었다. 기꺼해야 군사 교범이나 전쟁 회고록 수준의 저작들이 선을 보였다.
19세기에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양대 조류의 영향으로 획기적인 사회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뒤질세라 군사사(학)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 나폴레옹이라는 군사적 천재의 유럽제패 전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군사사가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야로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와 조미니(Antoine Henri Jomini)가 등장했다. 전자는 『전쟁론』 그리고 후자는 『전쟁술』을 집필해서 전쟁의 개념에서부터 전략전술, 그리고 전쟁수행에 이르는 군사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무엇보다도 나폴레옹이 벌인 다양한 전투들 속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전쟁 원칙을 찾고자 했다.

 

크리시경, 선악구도의 연구법 제시

영국의 경우, 크리시경(Sir Edward Creasy)이 나타나 제2차 대전 직후까지 군사사의 전범(典範)으로 답습될 연구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저서(Fifteen Decisive Battles of the World: From Marathon to Waterloo, 1851)에서 역사적으로 결전(決戰)의 성격을 지닌 전투들을 선별해 이를 선악 구도로 대비시킨 후 선(善)의 승리가 서구사회를 진보로 이끌었다는 방향으로 서술했다. 이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장군이나 국가의 중흥을 가져다준 결정적 전투에서의 승리 등은 군사사 연구자의 단골 분석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더구나 이러한 접근법은 이 시기에 기승을 부린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진출과 어우러져서 서구의 우월한 군사적 전통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는 19세기 말∼제2차 대전까지 다른 문화권의 군사적 전통이나 발전을 도외시하는 유럽 중심주의적인 태도를 조장했다.

침체된 군사사에 社會史가 활로 제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군사사 연구를 이끈 인물은 리들 하트(Liddell Hart)와 그의 군 선배인 풀러(J. F. C. Fuller) 장군이었다. 특히 리들 하트는 자신이 직접 참전한 제1차 대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역사적으로 영국의 전쟁수행 방식을 도출하고, 이후의 전쟁에 대한 전략적 대비책을 제시하고자 했다(The British Way in Warfare, 1932). 풀러는 전차로 대표되는 기계화 시대의 전쟁 개념과 운용방식을 고안하고 이를 실제 야전훈련을 통해 체계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넓게 보면, 이들 역시 여전히 크리시경이 제시한 군사사의 전통 - 직접적인 전투나 작전에 관한 내용 ? 에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2차 대전을 연거푸 겪은 후 전쟁 참화의 원흉이라는 인식 탓에 군사사는 역사학계에서 더욱 주변부로 밀려났다. 새로운 활로가 절실하던 참에 1960년대 이후 서구 역사학계에서 유행한 사회사(社會史)가 군사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이제 군사사는 전역(戰域)이나 전투에 대한 분석에서 벗어나 전쟁이 사회변화에 미친 영향도 검토해야만 했다. 전쟁과 사회(war and society) 연구라는 새로운 문을 여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은 하워드(Michael Howard, ed., The Theory and Practice of War, 1965)였다. 전쟁이 사회변화의 동인이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전쟁과 사회연구에 힘입어 군사사의 범위가 단순한 무력충돌을 넘어서 전쟁이 사회제도나 정책 등에 끼친 영향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역사학 내 다른 분야와의 소통이 원활해졌다. 특히 마윅(Arthur Marwick)의 저술(The Deluge: British Society and the First World War, 1967)은 전쟁을 일반역사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커다란 도움을 줬다.

장군아닌 병사 중심의 新군사사 등장

하워드에 이어서 군사사의 지평 확대에 공헌한 역사가는 키건(John Keegan)이었다. 그의 저술(The Face of Battle: A Study of Agincourt, Waterloo and the Somme, 1976) 덕분에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쟁연구가 ‘신군사사’라는 이름으로 역사학계 내에서 주목을 받게 됐다. 그는 전장에서 일반 병사들이 겪은 경험과 심리상태를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동안 위대한 장군이나 결전 장면의 서술에만 집착해온 전통 군사사의 접근방식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그의 선구적 연구로 인해 이제 군사사는 인류학, 고고학 등 인접 학문 분야와 긴밀하게 협업할 필요성이 불가피해졌다. 인류학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재성찰하는 기회를 얻었고, 이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고고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심리학은 과거의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연구방법을 제공했다.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군사사가 역사학 학문 세계의 중심부로 진입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질적 도약이 절실하던 차에 이번에는 파커(Geoffrey Parker)가 그 역할을 했다. 그의 저술(The Military Revolution: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1500-1800, 1988)은 군사사가 일반역사의 범주로 진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난 두 세대 동안 군사사 분야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주제가 ‘군사혁명’에 대한 것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16∼17세기에 화약무기 및 요새진지 등 새로운 군사기술의 등장으로 전쟁 양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고, 군사 면에서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곧 해당 사회구조 및 국가 시스템의 체계화를 촉발했다는 명제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군사 측면의 발전이 유럽 대륙 안에서는 근대국가 형성에, 그리고 외부 세계에서는 19세기 이래 서구가 우위를 점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논의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러한 꾸준한 논쟁을 통해 군사혁명은 역사적, 지리적, 그리고 개념적으로 확대 진화해 온 현상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90년대 중반 ‘문화’요소 가미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군사혁명에 대한 관심은 소강상태에 접어든 반면에, 이후로는 전쟁과 문화의 관계가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라고 불릴 정도로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문화는 정의하기도 그렇다고 설명하기도 쉽지 않은 모호한 분석개념이지만, 군사사 연구에 문화적 요소가 가미됨으로써 연구범위가 더욱 확장됐다. 무엇보다도 문화적 접근은 서구의 경계를 넘어서 비(非)서구세계의 군사적 실상에 대해서도 주목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서구예외주의 또는 유럽 중심주의에서 탈피하여 다른 대륙의 경우와 비교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도 서구와 비서구 세계 간의 상호작용(interaction)을 드러냄으로써 군사사의 내용을 좀 더 객관적이고 다채롭게 만들어주었다. 조만간 비서구세계에서 군사사 연구가 더욱 축적되어 궁극적으로는 서구 중심으로 설정된 기준 및 넓게는 패러다임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문화 측면에 대한 강조와 동일 선상에서 1980년대에 접어들어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한 국가의 전쟁방식을 당사국이 속한 문화권의 역사적 전통과 연계해 고찰하려는 경향이 대두했다. 그동안 이질적인 것으로만 여겨져 온 전쟁 행위와 무형(無形) 유산인 문화라는 두 분야를 접맥시켜 전자에 대한 이해를 보다 풍성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각국의 고유문화가 해당 국가의 전략구상 및 전쟁방식 결정에 암암리에 영향을 끼쳐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각국의 전통문화와 전쟁수행 방식 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 미국 정치학자 스나이더(J. Snyder)가 ‘전략문화’라는 개념을 처음 제기한 뒤 이는 곧 역사학으로 확대됐다. 특히 영국의 경우, 1932년에 리들 하트가 저서(The British Way in Warfare)에서 이미 정리한 바 있던 해군력을 주축으로 한 ‘간접접근’이라는 전통적 전쟁방식에 대해 전략문화라는 좀 더 포괄적 관점에서 분석하려는 연구를 자극했다. 1970년대 이래 하워드를 필두로 스트라찬(Hew Strachan), 프렌치(David French) 등 영국의 저명한 군사사가들도 이에 가세하면서 전쟁연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제로 주목을 받았다.

서구적 관점의 편향된 연구에 경종

최근 문화적 접근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대표적인 연구자로 블랙(Jeremy Black)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저서(Rethinking Military History, 2004)에서 전(全) 지구적 관점에서 군사사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이의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 향후 군사사 연구의 중심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군사사 연구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서구세계 연구자들의 비서구세계에 대한 단순화된 시각을 꼽았다. 한 예로 이들은 흔히 서구가 대항해 시대 이래로 다른 대륙을 군사적으로 압도해 왔다고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오해라는 지적이다. 심지어 19세기 이전까지 서구는 세계의 다른 문화권에 대해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전투행위에서 우수한 무기나 무기체계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블랙의 연구는 베트남 전쟁이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 보듯이 우월한 무기가 항상 승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다.
비서구세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때문인지 식민지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쟁과 전투에 대한 연구 역시 관심을 끌었다. 특히 스트라찬은 편저(Big Wars and Small Wars: the British Army and the Lessons of War in the Twentieth Century, 2006)를 통해 식민지 전투에서 미래전에 유용한 군사적 교훈을 도출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물론 군사사 연구자들의 관심이 비단 인도나 아프리카와 같은 영국의 식민지 군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서양세계와 접촉과 교류를 이어온 오토만 제국은 물론 중국을 비롯한 동양세계의 군사적 전통이나 군사사상에 대한 연구도 비교사적 측면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포터(Patrick Porter)는 비서구세계의 군사적 발전을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새롭게 조망하는 책(Military Orientalism: Eastern War Through Western Eyes, 2009)을 선보인 바 있다. 이처럼 다른 대륙이나 문화권의 군사문제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군사사의 공간적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2천년대 기억, 추모에 관한 연구도

2천년대 접어들어 군사사는 오히려 역사학 내 다른 분야와의 구분이 모호해질 정도로 연구주제가 한층 다양화됐다. 대표적으로 최근에도 꾸준히 관심을 끌고 있는 전쟁기억과 전쟁기념 및 전사자 추모에 관한 연구를 꼽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윈터(Jay Winter)의 저술(Sites of Memory, Sites of Mourning: The Great War in European Cultural History, 1995)로 촉발됐지만, 이후에도 힘찬 기세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전쟁을 주도한 장군이나 정치가들보다도 직접 전투에 참여했던 장병들의 개인적 경험을 ‘기억’이란 매개로 재구성해 전쟁의 폭력성과 비극성을 부각하고 이로써 향후 전쟁을 방지한다는 의도가 주제 자체에 은연중 내포되어 있다. 전쟁기념도 마찬가지이다. 제1차, 2차 대전 이후에 영국 곳곳에 세워진 전쟁기념 조형물들에 대해 승리를 선양하는 찬가(讚歌)로서보다는 폭력에 의한 희생을 기억하고 나아가 개개인의 죽음을 집단화해 추모하는 공간 표상으로 해석하려는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오늘날 이러한 노력은 한껏 발전한 다양한 이미지 재현 기술들과 어우러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군사사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되어 자칫하면 전쟁연구의 본령(本領)인 군대의 전투행위 및 무기발달에 관한 연구라는 ‘군사사의 본질’이 희석될 수도 있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러한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군사사가 진입해야 할 영역은 여전히 남아 있다. 향후 군사사가 더욱 주목을 요하는 주제는 젠더(gender)와의 관계가 아닐까 한다. 전통적으로 군사사 연구는 주로 남성 엘리트 전사의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남성성의 구축이라는 성(性)의 문제가 암암리에 연계되어 있었다. 전투행위, 군사문화, 그리고 젠더라는 세 요소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천착이야말로 향후 군사사 연구의 주메뉴가 되리라 예측해 본다. 특히 현실적으로 오늘날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남성의 아성으로 여겨져 온 군대 내에서 여군의 비중과 기여도가 빠르게 향상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전쟁후 사회’대 대한 연구 미래 과제

이어서 전쟁 결과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종전 후 전쟁이 해당 국가의 제반 측면에 어떠한 후유증 또는 상흔을 남겼고, 이에 대해 해당 국가나 사회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하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1970년대 말 이래 전쟁과 사회에 관한 연구가 꾸준히 진전되어 왔으나, 시간 범위상 주로 전쟁 와중의 시기에 집중된 경향이 농후했다. 전쟁이 모두 끝나고 난 다음에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은 일상 속에서 전쟁이 초래한 변화와 충격을 어떻게 수용 및 해결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고, 특히 국내 군사사의 경우에는 공백 지대라고 할 정도로 관련 연구가 미진하기에 더욱 분발이 요구된다. 다행히 서양사학회가 금년도 학술대회 주제로 대전 후 각국의 사회상을 설정하고 있어서 기대된다. 제1차 대전 후 전쟁이 남긴 다양한 유산들은 얼마 후 또 다른 대(大)전쟁의 요인으로 작용했기에 심층적 분석이 불가피하다.

끝으로, 군사사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전투)사 측면에서 전쟁수행 과정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한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에서 지상·해상·공중에서 벌어지는 전투행위를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해당 국가가 취한 전략 및 전술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이해가 가능한데 그동안 전쟁사 연구는 주로 육상전 위주로 진행되어 온 경향이 있다. 더욱이 제1차 대전을 통해 공군이 급성장하면서, 일찍이 이탈리아 항공전략가 줄리오 두헤가 예견했듯이, 공군력과 이의 운용은 국가전략 수립에서 불가결한 고려요소가 됐다. 이러한 군의 통합성 또는 합동성 강화에 대한 필요성은 학문적 논의의 장을 넘어서서 현실적으로 오늘날 각국 군대의 화두로 자리하고 있다. 전쟁 계획 단계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각 군 상호 간에 얽혀있는 복잡한 관계망 및 연결망에 대한 종합적 접근과 분석이 절실한 시점이다.

비극의 사슬 끊기위한 군사사연구

근본적으로 군사사는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탐구한다. 왜 연구할까? 과거에 해당 무력충돌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등을 밝히는 목적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인류 역사를 통해서 끈질기게 이어지는 집단희생의 사슬을 끊는데 과거의 경험에서 다소나마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전쟁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다. 심지어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오로지 죽은 자만이 전쟁의 종말을 보았다”는 경구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지구상에서 무력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시지푸스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바로 그 비결이 군사사 어딘가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한다. 장차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최선의 비결은 지금껏 우리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이고, 역사상 중요한 전쟁이나 전투의 결과는 실제로 상당한 정도로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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