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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9.04.0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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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교수

오랫동안 연구직 공무원생활을 하다가 교수로 늦깎이로 온 친구와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참으로 훌륭한 마음가짐을 지녔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대학에 늦게 왔기에, 그래서 아직도 교수라는 직업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점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무 살, 정확히는 열아홉에 자신의 진로를 선택할 때 주어진 판단의 미숙함, 용기 없음, 포기를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스무 살의 나를 판단해보니 아쉽고 안타깝고 바보 같은 것이지, 스무 살의 나는 여전히 똑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보여주는 ‘원숙함과 원만함’의 근저를 느낄 수 있었다. 교수생활을 하면서도 엄격한 조직생활을 하듯,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대화술은 내가 감히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교수가 된 사람이 종종 갖는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자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교수는 연구실에서 ‘혼자’(獨) 지낸다. 그것은 교수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다. 그래서 독선(獨善)과 독단(獨斷)의 위험성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조직은 아무리 혼자 잘한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둥글둥글’(圓)함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 그래서 원만(圓滿)과 원숙(圓熟)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가 회상하는 스무 살의 모습은 정말로 스무 살이었다.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대부분 우리는 스무 살을 되돌이키면서 ‘오늘의 나’로 ‘스무 살의 나’를 떠올린다. 지금의 나처럼 경험도 많고 인식도 탄탄한 내가 스무 살로 팽그르르 가버린다. 진짜 스무 살의 나는 무엇을 할지도 모르고 하라는 대로 하는 나였는데도 말이다. 
사실 이런 실수는 교수의 교수(敎授) 일에서 자주 나온다. 학위를 받고 2, 30년간 공부를 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는데도, 책상에 앉아있는 학생과 자신을 비교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스무 살 때도 지금처럼 많이 알고 널리 겪어본 스무 살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오는 발언이 ‘자네는 왜 몰라?’다. 스무 살의 나도 분명 몰랐을 것인데도, 쉰의 나이를 스무 살의 젊은이에 갑자기 대입시켜 마치 자신은 안 그랬을 것처럼 착각한다. 스무 살의 나는 지금의 스무 살의 학생들처럼, 어리석고 덜 떨어졌을 텐데 말이다. 

3, 40년을 뛰어넘어 타임머신을 타고 간 나는 분명 머리도 희고 군데군데 빠진 나이며, 스무 살의 나는 검은 머리에 숯도 많은 애송이 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늙은 내가 아무리 어린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해도, 스무 살의 나는 예전에 스무 살이었던 내가 선택한 길을 또한 선택할 것이라는 것이다. 

젊은 패기 때문이라도, 갑자기 다가온 사랑 때문이라도 스무 살의 나는 여전히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퇴임한 교수가 말했듯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욕정을 못 이기고 결혼한 것’이지만 그것은 퇴임을 앞두고 깨달은 것이지 스무 살로 되돌아가면 스무 살의 나는 여전히 ‘욕정을 못 이기고 결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남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 시절을 이해하는 것, 단순히 공간의 저편만이 아니라 시간의 저편까지 이해하는 것이 좋은 교수되는 길이라는 것을 그 친구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나의 어리석음이 어쩔 수 없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젊은 학생을 이해하는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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