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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삶 가네코, 죽어서도 유골로 방랑
방랑의 삶 가네코, 죽어서도 유골로 방랑
  •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 승인 2019.04.0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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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④-2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을 찾다
▲ 재현된 박열 생가 모습
▲ 재현된 박열 생가 모습

2. 문경, 가네코 후미코의 묘 : ‘金子文子女史之墓’

기행 - ‘이동의 표시’, 망각에 맞서며 ‘옆길로 새기’
가까이 있었으나 가보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나에게 그런 곳이 많다. 생각해보면 참 미안하다. 문경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 박열의사 기념관도 그 중의 하나이다.

국가의 벽을 넘어, 민족과 종족의 경계와 차별을 넘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인간 끼리 연대’하며 투쟁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찾아보는 것. 나는 그것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특권이자 중요한 윤리라고 생각한다. 기행을 하다보면 이 땅 발 딛는 곳곳 상실과 상처, 고통과 허무로 가득하다. 숱한, 갖가지 이유로 죽어간 억울한 혼령으로 가득하다. 해원(解寃)하지 못한 억울함의 연옥. 이런 역사의 폐허와 허상을, 내 생각 속에 넣어 미분해가면 ‘온고(溫故)’가 아닌 ‘온고(溫苦)’에서 오히려 ‘지신(知新)’의 가능성을 느낀다.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다 차라리 공포이거나 불안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자,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과 불화하며, 불편해하며, 싸워가야 한다. ‘나다움을 위해’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그런 사회를 원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죽은 자들의 억울함을 푸는 ‘위령(慰靈)’도 이런 발상에서 시작될 것이다. 
 

▲ 가네코 이장 전 무덤
▲ 가네코 이장 전 무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이 쓴 『옥중수기』를 편집할 때 참고하라는 부탁의 ‘바람’을 적은 데서, “기록은…사실이라는 것에 생명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왜곡과 날조에 익숙한 일제의 역사를 생각하면, ‘사실’이 ‘생명’이라는 그녀의 말은 더 깊이 와 닿는다. 나의 기행은 기록과 물증을 근거로 ‘사실’을 확인하며 ‘해석’하는 일이나, 나 자신과 사회의 망각에 맞서는 방법이고, 내가 떠도는 ‘이동(移動)’의 표시이다. 아니 재미없는 이 세상의 허망, 그 옆길로 새어 나가는 방편이다. 

비명(碑銘)을 읽다

박열이 태어난 곳,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박열의사기념관’이 세워졌다.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 편 산자락으로 걸어가면,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있다. 묘역의 오른 편 ‘金子文子女史之墓’라 적힌 비석의 뒷면, 고인의 일생을 적은 ‘비명(碑銘)’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원문을 맞춤법에 맞게 바로잡고, 알기 쉬운 한자는 한글로 바꾸고 단락을 임의로 나누었다. 아울러, 독자들을 위해서, 야마다 쇼지의 『가네코 후미코』 한글 번역본에 실려 있는 ‘비문’(정선태 옮김, 307-8쪽)의 오자를 바로잡아두었음을 밝혀둔다.] 

소백산 조령 기슭 여기 이곳에 여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여사가 고이 잠들어 있다. 여사는 1904년 1월 25일 일본 아마나시 현에 본적을 두고 요코하마 시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 자라난 여사는 한때 고모의 유인으로 한국 땅 부강(芙江)에서 방랑하였다. 섬세한 감수성과 명철한 두뇌의 여사는 당시 일본 제국의 포학(暴虐)한 침략 하에서 도탄에 빠져 있는 한국인의 처참한 모습을 남달리 민감하였다.

고모의 학대에 못 이겨 일본으로 되돌아갈 때는 벌써 여사의 가슴 속 깊이 자기의 모국 일본의 부정(不正) · 불의(不義)에 대한 의분(義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여사가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 · 항쟁하던 혁명투사 박열 선생과 생사를 같이할 동지일 뿐만 아니라 부부로 결합하였다는 것은 필연의 결과이다.

흑도회(黑濤會)와 흑우회(黑友會)의 맹원(盟員)으로 활약하던 박열 선생은 여사와 같이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천황을 모살(謀殺)할 계획을 세워 비밀리에 공작을 펴오던 중, 1922년 4월에 김중한(金重漢),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육홍균(陸洪均), 장상중(張相重), 한현상(韓晛相), 동성(徐東星), 서상경(徐相庚), 정태성(鄭泰成), 하세명(河世明), 홍진유(洪鎭裕), 최규종(崔圭悰),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 오가와 다케시(小川武), 노구치 시나니(野口品二) 들 제씨와 더불어 혁명 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 하고 『현사회(現社會)』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동경 대진재(大震災) 당시에 불령사 맹원 전원이 검거 투옥되었다.

이렇게 검거되어 예심을 받던 과정에서 육홍균 씨 외 13명은 석방되고 박열 선생과 여사는 4년이라는 긴 세월에 17회의 예심을 거쳐 1926년 2월 26일에 제1회 재판 개정을 보게 되었으나, 그들의 사상은 추호의 동요 없이 천황유해론(天皇有害論), 약소민족 해방, 한국 독립의 정당성, 인간의 자유를 시종여일하게 주장하였다. 급기야 그들은 대역죄(大逆罪)로 사형선고를 받자 여사는 만세를 외치고 박열 선생은 재판장에게 ‘수고했군’ 하며 조소를 지었다. 이 사상의 일관성, 이 태도의 침착성. 이 생사의 초월성은 만세(萬世)에 있어 사상가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동년 7월 23일 여사는 수감 중이던 도치기(?木)형무소에서 의문의 횡사로 그 한 많은 일생을 마쳤으니 향년 23세이다. 동년 동월에 여사의 유해(遺骸)는 그 무서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많은 동지와 시숙 박정식(朴庭植) 씨 등의 정성으로 본국에 반장(返葬)되었으나, 일경의 날카로운 감시로 성분(成墳)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50성상(星霜)을 거치는 동안에 풍마우세(風磨雨洗)로 그 흔적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 꽃 한송이 피어있는 가네코 후미코 묘
▲ 꽃 한송이 피어있는 가네코 후미코 묘

이를 안타까이 여겨 동지들은 모든 성의를 모아 유지들의 찬조를 얻어 봉분을 개축하고 묘비를 세워 그 투혼을 영원히 기념하기로 한다.

     1973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 묘비 건립준비위원회에서 세우다
     진성(眞城) 이원기(李源箕) 쓰고
     위진(慰珍) 장종만(張宗萬) 새기다
     찬조위원 김선구(金善求)
     강석해(姜錫海)

묘비의 측면에는 묘비건립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짧은 묘비명이지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가 잘 요약되어 있다. 설명을 더 하지 않더라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흑도회(黑濤會), 흑우회(黑友會)의 ‘흑’: 혼돈-새로운 사회의 설계

비문 내용 중에 있는 ‘흑도회(黑濤會)’란 동경에서 조직하였던 사회주의 운동단체를 말한다.
우선 흑도의 ‘흑(黑)’은 당시 공산주의/아나키즘을 지향하는 단체가 지향하던 이념의 색깔이었다. 일반적으로 ‘흑’과 ‘적(赤)’은 동양의 오방정색 중의 주요색이다. 흑은 북쪽-물[水]을, 적은 남쪽-불[火]을 상징한다.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면 좋게 변하고, 나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쁘게 변한다”는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近墨者黑)’(趙在三, 『松南雜識』)이란 성어 속의 색깔 대비는 과거 우리 생활 차원에서 익숙했던 표현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비슷하다. 예컨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이란 제목에서 보듯, ‘적=나폴레옹 시대의 군복’, ‘흑=왕정복고시대의 성직자 예복’ 같은 색깔이 갖는 알레고리다. 아울러 고대 켈트인들의 미인 모습에서도 있다. ‘까마귀 털이 물에 젖은 듯한 검은 머리’+‘우윳빛/눈 같이 흰 피부’+‘장미꽃잎 같은 붉은 입술’처럼 아름다움의 극치를 말한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저 춥고 얼어붙은 북쪽의 겨울을 가리킨다. 퇴계 이황의 「천명도설(天命圖說)」에서 말하듯, 꽁꽁 얼어붙은 북쪽 거기서 물 기운을 얻어내야 봄이 온다고 보았다. 한편 검은 색은 혼돈(카오스)의 색이다. 장자(莊子)가 지키던 옻 밭의 그 ‘칠흑’ 같은 이념의 색이다. 칠흑은 모든 선과 금들을 지워버리고 결국 자연-자유-평등-생명의 원초로 몰아가는 아나키의 색이다.
 

▲ 가네코 후미코 묘비
▲ 가네코 후미코 묘비

황런다는 『중국의 색』(조성웅 옮김/2013, 예경)에서 말한다: “중국의 색 가운데 칠흑(漆黑)색은 윤기가 흐르는 흑발을 묘사할 때 쓰이기도 했고 대자연의 하늘 색, 즉 달빛도 별빛도 없는 밤에 대지를 뒤덮고 있는 흑암색(黑暗色)을 묘사하기도 하는데, 이 색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공포와 위협을 느끼게 한다. 칠흑색은 앞에 뻗은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밤의 색이기도 하다. 무협소설에서는 무공이 뛰어난 복면 자객이 야행복을 입고 밤을 틈타 벽을 넘어 가볍게 적의 스급(首級)을 얻는 장면이 항상 나온다. 또는 밤도둑이 어둠을 틈타 벽을 넘어 범죄를 저지르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한인들이 1921년 11월 동경에서 흑도회를 결성하고, 박열이 주간을 맡아 기관지 『흑도(黑濤)』를 발간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현실을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알리는 등 조선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 무정부주의자의 지도 하에 있었던 박열 그룹과, 공산주의자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원종린 그룹은 내부적인 사상적 대립을 겪는다.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고, 공산주의자는 중앙 집권과 효율을 강조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1922년 12월, 무정부주의 그룹이 이탈하여 흑우회(黑友會)의 전신인 풍뢰회(風雷會)를[풍뢰회→흑우회], 공산주의 그룹은 1923년 1월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한다. 따라서 흑도회는 해체된다.

불령사(不逞社)의 ‘불령’: 뻔뻔스러움=자유를 향한 열정

『흑도』의 간행은 제 2호로 끝나고, 박열과 가네코는 같은 해(1922) 11월 이 잡지를 대신하여 『뻔뻔스러운 조선인(太い朝鮮人)』을 창간하였다. 처음 이들이 정한 제목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이었으나 경시청이 허락해주지 않자, 그 때 경시청 관계자가 ‘뻔뻔스러운 놈’이라고 한 말에서 힌트를 얻어 『뻔뻔스러운 조선인』으로 하였다고 『재판기록』은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의 난외(欄外)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표제를 단 의도는 일제가 말하는 ‘불령선인’이 조금도 ‘뻔뻔스럽고 무례하지 않음’을 일본 민중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가네코는 ‘이른바 불령선인’이란 논설(同誌)(불령선인, 제2호)에서 ‘불령선인’이란 “어디까지나 자유를 향한 열정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이며 “아무리 제멋대로 진압책을 내세운다 해도 또 아무리 교묘한 단속법을 시행한다 해도, 우리 불령선인은 오늘날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이대로 계속되는 한, 늘면 늘었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글을 맺는다(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123쪽 참조).

1923년 4월경 박열은, 흑우회 활동과는 별도로 항일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재일한인 등과 함께 만든다. 불령사의 ‘불령’이란 원래는 『춘추좌전(春秋左傳)』(襄公10年)에 나오며 ‘검속?단속되지(逞) 아니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불만을 품고 법도에 맞지 않는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 외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령사란 한 마디로 ‘뻔뻔스럽고 무례하지 않은 당당한 조직’ 쯤으로 풀이하면 되겠다.

불령사의 멤버는 박열과 당시 동거녀 가네코 후미코, 홍진유?육홍균 등 15명, 구리하라 가즈오?니야마 하쓰요 등 일본인 6명, 총 21명이었다. 같은 해 9월 일제는 불령사를 대역(大逆) 사건을 일으킨 비밀결사로 지목하여 이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관동대지진[=동경 대진재(大震災)] 당시 조선인 6천명 이상을 학살한 일제는, 학살의 책임을 모면하려, 이 단체를 폭동을 계획한 비밀결사로 몰아가려 계획하였지만 진실이 드러남에 따라 실패하고 말았다.

무덤 속, 과연 ‘유골’은 있을까

비명에서 밝힌 대로, 1926년 7월 23일 가네코는 수감 중이던 도치기형무소에서 의문의 횡사로 그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1926년 7월 31일자 《時代日報》(時代日報社)에서는 “不敬罪囚朴烈妻 金子文子의 寂寞! 우도궁형무소에서 적막하게/남편박렬의꿈자리에락화만”이라는 기사를 실어 투옥의 적막한 사정을 전한다.

가네코의 유해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많은 동지와 시숙 박정식(朴庭植) 씨 등의 정성으로 본국에 반장(返葬)’되었다. 하지만 일경(日警)의 감시로 ‘성분(成墳)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50성상(星霜)을 거쳐’ 흔적도 찾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 박열과 가네코 옥중결혼 및 집필뉴스
▲ 박열과 가네코 옥중결혼 및 집필뉴스

유골을 인수하기 위해 박열의 형 박정식씨가 동경으로 갔지만, 일제가 방해하면서 직접 가져오지 못하고 경북 상주경찰서가 인수받았다. 1926년 12월 24자 《中外日報》(中外日報社)에는 “金子文子遺骨을 가지고 들어 왓나하야 朴烈親兄의 入京을 注目”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가네코 유해 반송 여부에 관심이 쏠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주경찰서는 가네코의 유골을 팔령산 밑에 가매장해버리고 박열의 가족이 제사를 못 지내도록 감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묘는 해방 때까지 버려진 채 있었다. 일본인들이 유골을 다시 일본으로 가져가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에서 가네코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73년, 마침내 불령사의 옛 동지 등이 모여 문경읍 팔령리 산중턱의 가네코 묘에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2003년, 박열의 고향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의 ‘박열의사기념관’ 경내로 이장하였다.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은, 야마다 쇼지의 『가네코 후미코』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303-308쪽 참조). 읽을수록 드라마틱하되, 눈물겹다.

나는 여러 가지를 의심해보았다. 과연 현재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에 그녀의 유골이 있기나 한 것일까. 팔령산 밑에 가매장할 당시 유골함이 있었던 것일까. 유골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속은 텅텅 빈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매장된 유골함을 일제가 몰래 도굴해 가 것은 아니었을까. 여러 가지 발칙한 상상과 의심을 해본다.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 석·박사를 했다. 양명학 · 동아시아철학사상 전공으로 한국양명학회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등이,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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