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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의 외교정책은 '고립'만이 아닌 '고립-간섭'의 이원체제
19세기 영국의 외교정책은 '고립'만이 아닌 '고립-간섭'의 이원체제
  • 김현수 단국대 문과대학 사학과
  • 승인 2019.03.27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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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역사_20세기 영국사 연구의 발자취 6. 영국식 외교정책의 재평가
▲ 빈 체제의 일환으로 열린 한 회의 모습
▲ 빈 체제의 일환으로 열린 한 회의 모습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유럽에는 빈 체제(Vienna system, 1815)가 형성되었다. 체제에 합류했던 영정부는 베로나회의(1822.10) 이후 ‘국가 간에 맺는 동맹을 취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고립정책(Isolation Policy)을 표명하고 이듬해인 1823년에 체제에서 이탈하였다. 체제이탈 후 고립정책이 영국식 외교정책의 핵심코드가 되었다. 한편 이때부터 당연시하고 받아들이던 이 정책에 대한 의문도 시작되었다. 고립정책이란 용어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사용한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국에 직접 위해(危害)를 가해오는 국가를 대하면서도 ‘고립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까? 분명 해당 상대국과의 직접적인 외교적 조처로서의 다른 정책이 진행되었을 것인데, 이 경우 고립정책을 어떻게 정의(定義)해야 할 것인가?

위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최초 고립정책입안자와 그의 생각부터 확인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떠오르는 인물은 캐닝 외무장관(후에 총리)이다. 그는 두 차례의 외무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영국만의 정책방향을 잡으려 고심하다가 고립정책을 진행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립정책을 분석하려면 동시대에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캐닝과 수차례 논쟁한 캐슬레이 외무장관의 생각도 배제 할 수 없기에 그도 함께 주목되어야할 것이다. 

한편 두 인물을 주목해보더라도 고립정책에서 갖은 의문점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서 캐닝이 영국외교정책을 정립했더라도 과연 그의 정책이 현실 속에 지속적으로 녹아들며 뿌리를 제대로 내렸는지 확인할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 의문점으로 남아서이다. 왜냐하면 캐닝은 총리가 되면서 외무장관 때 정립한 고립정책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총리 재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해 줄 인물은 누구일까?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오랜 기간(40여 년)을 외무장관직과 총리직을 지낸 파머스턴이 눈에 띈다. 이유로는 첫째 그의 외교경력과 경험이라면 캐닝의 정책을 현실적으로 정착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 점이다. 둘째 캐닝에 이어 줄곧 외무장관직을 지속한 파머스턴의 외교정책 수행과정을 살펴보면 캐닝으로 출발한 영국식 외교정책이 퇴보하였는지, 발전하였는지, 아니면 수정되었는지 등 다각적 각도에서 점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도 한 몫을 한 때문이다.

캐슬레이(Lord Castlereagh)의 ‘불간섭 외교노선’

영국식 외교정책인 고립정책이 정립된 베로나회의(1822)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당시 복고정통주의(절대왕정 복귀)를 주장하던 빈체제의 주요 국가들(독·오·러)은 회의주제로 올라온 에스파냐의 자유주의 운동을 빈체제의 위반사항으로 여기고 에스파냐를 진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입헌군주제의 길을 걷고 있던 영정부의 외무장관 캐슬레이는 에스파냐 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지지하는 쪽이었다. 때문에 그는 회의에서 “빈체제의 유지에 현실적인 위협이 되는 경우라면 진압의 대열에 함께 하겠지만, 에스파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보기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공표하였다. 이런 캐슬레이의 공표는 “직접 관계가 없는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음”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 불간섭(不干涉, non-interference) 또는 내정불간섭(內政不干涉)이란 이론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었다. 특히 캐슬레이가 이렇듯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 그가 ‘불간섭의 원칙(the principle of nonintervention)’을 핵심의제로 한 정부문서인 “State paper of May 5, 1820”을 의회에 제출하고 동의를 얻어 놓았었기 때문이었다.

▲ 캐슬레이 경
▲ 캐슬레이 경

사실 그가 베로나 회의보다 앞서 별개로 불간섭 원칙 안건을 의회에 발의한데에는 그 자신만의 어떤 외교 정책적 속사정이 있었다. 알다시피 나폴레옹 전쟁을 끝마친 주역은 영국이었다. 그러나 전후 유럽 외교가 삼국(독·오·러)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영국은 전후외교 무대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듯 보였다. 이를 파악한 캐슬레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국외교의 위치를 체제 중심으로 다시 옮기고 동시에 자신도 국제사회로 화려하게 데뷔를 하고자 고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빈 체제 안에서 전후 영국의 이익을 챙기려는 것도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다보니 영정부 및 자신의 의도와 뜻에 맞지 않는다고 복고정통주의를 주장하던 체제내의 동맹(5국 동맹)국들에게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여기서 캐슬레이는 보험차원에서 동맹 체제를 파기하지 않겠지만 동맹국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방법으로 “정부문서(State paper of 1820)”를 의회에 발의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의회가 동의한 정부문서 덕분에 베로나회의 때 에스파냐 자유주의 운동 진압에 참여하길 거부한 의사를 당당히 표명하며 국내 잡음 없이 불간섭 쪽으로 외교노선을 잡을 수가 있었다.

캐닝(G. Canning)의 ‘고립정책’

캐슬레이와 동시대에 활동한 캐닝은 캐슬레이가 공표한 불간섭 원칙을 우선순위에 둔 것이 사실이지만, 베로나에서 맞닥뜨린 일련의 국제적 사태들(에스파냐 진압건, 그리스 사태건)을 돌아볼 때 ‘불간섭만으로 무마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그가 의구심을 가졌다는 논자의 유추가 크게 틀리지 않았음은 1823년 4월 13일에 하원에서 자신의 외교정책 방향을 공표한데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의 하원연설을 살펴보면, 그의 외교정책은 1820년 캐슬레이가 공표한 불간섭 원칙을 이어간 것이지만 일정 부분은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캐슬레이는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우위권 확보를 만들고 지켜야한다는 유럽주의(Europeanism)를 고수하는 선에서 불간섭을 정책화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캐닝자신은 자국의 입헌군주제란 위치와 이 입장을 국제사회에서도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자 영국중심주의(Englishness)를 바탕으로 시도하는 불간섭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결국 이런 주장으로 캐닝은 빈체제와 결별에 이르게 되었고, 그가 독자적으로 외교를 펼쳐나가는 ‘고립정책(Isolation Policy)’이라는 영국식 외교정책을 국제사회 속에 확실하게 소개하게 되었다. 동시에 베로나 회의 때의 상황들이 영국식 외교정책 탄생의 직접적 동기였음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 빈 체제 일환으로 열린 베로나 회의(1822년 10월)
▲ 빈 체제 일환으로 열린 베로나 회의(1822년 10월)

한편, 캐닝은 자신이 표명한 고립정책이 혹여 모든 외교적 상황을 ‘나 몰라라’ 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염두에 둔 캐닝은 중도(中道 Neutrality)를 고립정책의 실질적 방식이라고 추가로 제시하였다. 중도란 “중간입장을 지킨다”는 중립(中立)에 ‘상황이 좌·우로 너무 기울 때는 중간 상태로 돌아오도록 모든 상황을 능동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는 의미부분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중도란 방식을 대입하면 불간섭을 유지하다가도 상황에 따라 간섭을 취할 수 있는 외교정책 방향이 논리적으로 정립된다. 캐닝은 이런 정책 방향과 뜻을 분명이 인지하고 외교를 진행해 나아갔다.

캐닝의 의도대로라면, 막상 에스파냐 반란과 연관된 고립정책 속에 간섭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 볼 수 있는가? 캐닝은 빈체제 국가들과의 동맹관계를 1823년에 끊었지만 빈체제 동맹국들(러·프·오·독)이 에스파냐가 갖고 있던 (남)아메리카 식민지들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자, 이에 대해선 다른 행동을 취했다. 영국은 유럽국들의 아메리카 진출을 경계하여 이를 막으려는 외교적 조처 및 남미 지역을 독립시켜 영국의 시장으로 만들려는 작업으로 미국에게 먼로독트린(1823.12)을 공표하도록 유도했다. 여기에서 캐닝의 외교적 간섭 모습을 찾을 수가 있다. 동시에 그가 취한 외교정책의 방법론도 명확히 읽힌다. 캐닝은 표면적으로는 캐슬레이처럼 불간섭 원칙을 담은 고립정책을 세워놓았지만, 이면에는 철저하게 간섭(정책)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세간(世間)에서는 여전히 영국외교를 ‘동맹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고립정책으로만 인식하였고, 고립정책이란 틀 속에 실질적으로 간섭(정책)이 한 몫을 담당하고 있음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다.

파머스턴(3rd Viscount Palmerston)의 ‘대응간섭정책’과 ‘위대한 고립정책’

1828년에 포르투갈에 새로 추대된 국왕인 미겔 1세가 권력분산을 거부하는 반동정치를 하였다. 이어서 그는 권력분산을 용인하고 자유주의적 정책을 내건 브라질 왕 페드로 1세(미겔 1세의 장인)와 충돌하면서 내전으로 치달았다. 파머스턴은 자신이 외무장관이 된 상황에서도 이곳에서 내전이 지속되자, 1830년에 빈체제 동맹국들과 고립관계를 취하였고 포르투갈 자유주의 지지자들에게는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런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파머스턴은 강대국이 약소국의 영토를 임의로 점령하거나 전용하는 시도는 유럽 내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란 근본적인 외교시스템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국가들 사이에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간섭을 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이를 이론적으로 대응간섭(counter-intervention)정책이라 한다.

▲ 파머스턴 경
▲ 파머스턴 경

그렇다면 그는 전임자의 외교방식이자 기존의 (캐닝식) 고립정책은 전혀 따르지 않았던 것인가? 역사적 흔적을 따라가 보면, 파머스턴도 자국의 이익관계가 있지 않으면 (캐닝식) 고립정책을 적용하였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로 파머스턴의 장관시절,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에 자유주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는 이들에 대해서 외교적으로 전혀 관여 하지 않았다. 이곳은 주로 러시아·오스트리아·독일 삼국의 이해관계가 있는 곳이지 영국의 정치·경제적 이익과는 무관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파머스턴도 기존의 고립정책의 틀 안에서 주변 상황에 따라 취하는 캐닝식 간섭(정책)을 자신만의 방식인 ‘대응간섭정책’이란 의미로 부각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국식 외교정책이 고립정책 외에 간섭이 함께 진행된다는 것을 캐닝 때 보다는 세간에 좀 더 뚜렷이 인식시켜주었던 것이었다.

위의 논리라면 파머스턴은 외무장관 때 시행했던 자신만의 외교정책을 총리직을 수행하던 기간 중(1855-1865)에도 그대로 답습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과연 그러한가?

1851년 영국이 세계만국박람회를 열은 목적은 자국 상품들이 질과 양적으로 최고임을 자랑하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박람회가 열린 몇 해 후에 발발한 크리미아 전쟁(1853-56)도 영국의 자랑을 막지 못했다. 전쟁 중 전시산업이 산업혁명의 질적 부분을 빠르게 변화시키며 영국 상품의 질이 더욱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국은 1850년 대 중반부터 산업제국(대영제국)이란 황금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독일을 비롯한 여타 유럽국들이 영국 상품의 질을 따라잡던 1880년대 초까지 영국은 세계무역을 독점하였다.

▲ 먼로 독트린을 보여주는 삽화
▲ 먼로 독트린을 보여주는 삽화

이 시기 파머스턴의 영국식 외교정책을 돌아보면 이전과 많이 달랐다. 주목되는 부분은  당시 외교정책은 외무장관 때의 작품인 대응간섭정책처럼 주변국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차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영제국을 위한 외교적 조처야만 한다고 판단하면 자신의 결정만으로 즉각 간섭을 실시했다. 이런 간섭을 취한 대표적인 사례는 유럽 국가들이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에서 나타났다. 영·중간에 난징조약(1842년)이 체결되면서 열린 6개 개항지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 1856년에 애로호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총리였던 파머스턴은 현지 외교관들을 통해 사건의 경위를 파악한 뒤, 애로호 사건은 중국내 개항지가 제 역할을 못한 후유증이며 이렇게 된 주된 원인이 중국황제의 관할 하에 개항지의 책임이 놓여있지 않았던 때문이라고 단정하였다. 파머스턴은 이런 원인을 해소할 근원적인 방법으로 북경에 황제와 직접 대면할 영국공사관을 설치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여전히 젖어있던 중국정부는 황제가 거주하는 베이징에 외국인이 상주할 수 없다고 극구 반대하였다.

반대에 직면한 파마스턴은 중국 황제와 그의 정부가 영제국 존속의 핵심요소인 자유무역을 막는 주요인이라고 재차 인식하였다. 결국 그는 베이징내 공사관 설치를 강력히 요구하였고, 상황이 여의치 않자 전쟁으로 치달았다. 이를 2차 아편전쟁 (Arrow War, 2차 중영전쟁)이라고 한다. 파머스턴이 이 전쟁을 결정하는데 유럽 여러 제국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었다. 그는 영제국의 발전에 방해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영국정부의 ‘간섭 필요’란 결정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파머스턴이 외무장관시절 취한 대응간섭정책과 사뭇 다른 직접적이고 단독적인 (무력)간섭정책이었다.

위 상황을 고려해보면, 총리로서의 파머스턴은 고립정책에 있어서도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진행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전의 고립정책은 주변 강대국들을 의식하고 이 틀을 벗어나지 않고 진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본국이 영제국이란 자신감 있는 위치에 서자, 그는 여타 국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영제국의 위치에 타국이 범접하지 않도록 ‘스스로 단절하는 예방차원의 외교적 고립’을 정책화하여 추구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당시에는 뚜렷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세기말에 언론을 통해 표현된 “위대한 고립정책(Splendid Isolation)”이란 용어가 갖는 의미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19세기 영국외교정책하면 ‘고립정책’이라고 익히 알고 있지만, 캐닝과 파머스턴의 정책 속에 간섭의 모습들이 분명하게 존재하였다. 또한 파머스턴의 총리시절에는 간섭이 존재감을 표면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드러내면서 ‘고립정책’과 ‘간섭정책’이란 이원체제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이 영국식 외교정책의 바른 이해이다.

 

 

김현수 단국대 문과대학 사학과

영국 글래스고 대학에서 박사를 했다. 대표논문으로 「1840∼60년대의 영국외무부, 내적도약 가능했나?」, 저서로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외교주역: 해리 S 파크스』, 역서로 『왕실 스코틀랜드 영국사』 등이 있으며, 영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 단국대에서 문과대 학장 및 도서관 장 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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