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1:45 (목)
"나의 국적은 천국" 일제에 항거했던 아나키스트 일본 여인
"나의 국적은 천국" 일제에 항거했던 아나키스트 일본 여인
  •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 승인 2019.03.25 1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재목의 무덤기행 ④-1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을 찾다
[여기가 '천국'일까?]  일본인으로 태어나 조선의 해방을 위해 저항하다 스물셋 나이에 조선땅에 묻힌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나의 국적은 천국"이라 외쳤던 경북 문경 그녀의 단촐한 무덤엔 왠지 모를 천국의 평온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 녹음이 짙푸른 7월의 어느 날.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소멸'이 아닌 '영원한 실재'로 다시 피어났다.
[여기가 '천국'일까?] 일본인으로 태어나 조선의 해방을 위해 저항하다 스물셋 나이에 조선땅에 묻힌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나의 국적은 천국"이라 외쳤던 경북 문경 그녀의 단촐한 무덤엔 왠지 모를 천국의 평온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 녹음이 짙푸른 7월의 어느 날.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소멸'이 아닌 '영원한 실재'로 다시 피어났다.

1. ‘방법’으로서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나를-이렇게-만들었나?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나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를 찾아다니며 사자(死者)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문경의 봉분을 쳐다보며, 그리고 그녀가 7년을 살았던 부강(충북 청원. 현재 세종시 부강리)의 산과 강물을 쳐다보며, 그녀를 회상했다. 

가네코가 쓴 옥중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를 틈틈이 읽어가며, 내 내면의 많은 생각들을 나는 지웠다 쓰고 썼다가 지우곤 했다.

영화 〈박열> 이후 새롭게 주목받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그녀는 일본의 아나키스트이고,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동지이자 부인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 23세의 나이로,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 도치기(?木)지소에서 목매달아 죽었다. 자서전이 된 그녀의 옥중수기 제목을 나는 ‘무엇이-나를-이렇게-만들었나?’라고, 떠듬떠듬 끊어서 읽고 싶다. 무언지 모르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녀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 자신도 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있는 독자라면 이 기록으로 충분히 알아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옥중수기, 맺음말에서)

그녀의 묘는 현재 경상북도 문경에 있다. 박열의 유해가 북한에 있으므로, 그녀는 홀로 거기 묻혀 있다. 사르트르의 희곡 ‘무덤 없는 주검’에서처럼, 참다운 인간으로 저항하며 해방을 위해 살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외롭고 힘들었다. 외로움에 주저앉지 않고 ‘고절(孤絶. 절대고독)’을 안전지대로 삼아,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그녀에게서 나는 일단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네코 후미코』를 쓴 야마다 쇼지(山田昭次)는 가네코를 “식민지 조선의 고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며, 일본 제국에 항거했던 한 아나키스트”라 평가했다(정선태옮김, 『가네코 후미코』, (산처럼, 2003) 참조). 한국인 가운데 고국이 아닌 타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죽어간 사람이 있던가. 솔직히 내겐 그런 배움도 기억도 없다.

불안한-외로운 ‘나’=안전지대

1903년, 가네코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출생.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해 출생신고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적자(無籍者)’로 일본의 친척집에 맡겨져 자랐다. 이후 1912년 충북 청원(현재 세종시 부강리)에 살고 있던 고모의 집에 들어갔다. 학대를 당하면서 약 7년간 조선 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 조선인의 참상, 아울러 재조(在朝) 일본인들의 삶을 잘 살필 수 있었다. 1919년에는 3·1 운동을 직접 목격하며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에 ‘공감’한다.

가네코는 타자의 울타리-안전권을 벗어나 불안한-외로운 ‘나’로서 살았다. ‘나’는 불안한-외로운 곳이지만 마지막으로 찾아낸 안전지대이다. 여기서 동지 박열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고통과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자발적 복종을 거부하고 ‘고독’을 택했다. ‘동지’, 뜻을 같이한 사람만을 필요로 한다. 타자는 불안-상처의 원천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최소한 불가피한 경우로 제한된다”(볼프강 조프스키, 『안전의 원칙』, 이한우옮김, (푸른 숲, 2007), 104쪽). 그런 타자들의 정신세계를 허물어버리고, 불편한 그네들 사유의 파편을 딛고서서, 폐허 위에서 새로운 안전지대를 구축해 나간다. 기존의 가치, 체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화’, ‘망각’, ‘뒷걸음질 침’, ‘옆길로 샘’, ‘방황, 유랑’ 등의 방법들이 활용된다. 폐허 위에서의 새로운 집짓기이다. 어쩌면 그것은 말짱 도로묵일 때도 있다. 아니, 뭔가 하나쯤 건질 수도 있다. 아니면 크게 한방을 터뜨릴 경우도 있겠다.

어쨌든 폐허 위에서 집을 지으려는 처절한 사유, 그것은 남들에게 보여주고, 나누는 일이다. 하여, 하이데거의 말처럼 ‘사유는 곧 감사이다(DENKEN IST DANKEN)’.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동지 박열의 사유에 깊이 감사한다. 그리고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무사유로 살아왔다. 이런 생각 끝에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을 찾았다. 우선 문경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7년을 보낸 부강으로 향했다. 박열의 무덤은 북한에 있으니 갈 수가 없다.

▲ 문경 박열기념관의 가네코 후미코 설명
▲ 문경 박열기념관의 가네코 후미코 설명

이중의 무적자(無籍者), “나의 국적은 천국”

그녀는 왜 그렇게 죽어간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가네코를 ‘나는 나’라는 주체의식 혹은 에고의 좁은 틀에 가두어 해석하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해석방법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주목한 것은 일본인이었던 그녀가, ‘국가적, 민족적 에고를 초극하는 방법론’이었다. 나는 거기서 미래 동아시아가 걸어가야 할 ‘방법’ 같은 것을 찾아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신체의 ‘무적자(無籍者)’에서 정신의 무적자로 나아가, 민족-국가의 에고를 허물어뜨린, 결국 불교의 ‘공(空)’ 같은 무아(無我)의 지평에 서보는 일이다. 

한편 나는 가네코에게서 허무주의를 만나기도 한다. “곧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질 뿐, 영원의 실재 속에서 존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옥중수기, 맺음말에서)는 대목을 읽으면, 그녀의 허무주의는 ‘영원의 실재’라는 관념을 통해 자연스레 해소됨을 알 수 있다. 낱낱의 빗방울이 바다에서 평온을 찾듯, 육신의 죽음은 대지의 흙이라는 실재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사라지는 육신이나 현상[=籍]에서 파악된 가네코의 허무주의는 ‘영원의 실재’[=無籍]에서 정화되고, 끝내 ‘인간 영혼의 자유’를 얻어낸다. “나는 지금 평안하고 냉담한 마음으로…”라는 ‘제 3의 시야’를 갖는다. 가령 루쉰 (魯迅)이나 나츠메 소세끼(夏目漱石)에게 과연 ‘무적자’ 관념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1924년 1월 22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있었던 ‘제 3회 피고인 심문’ 가운데 가네코 후미코는 이런 말을 했다.

“일본 땅에 살면서도 일본인도 아니고 다른 어떤 나라사람도 아니었다. 나의 국적은 천국에 있었다. 나는 일본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일본의 제도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학대를 받았다.”(제3회 피고인 심문, 1924.)   

그녀가 자신의 조국이 천국이라고 한 말은 그녀를 이해하고 위로해줄 곳은 이 땅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토로였다. 그녀는 신, 종교에 귀의하지 않았다. ‘영원의 실재’만을 믿었다. 나를 알아줄 사람은 오직 저 하나님 한분뿐이라던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다른 곳에 있었다.

가네코의 고절(孤絶)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언설이 떠오른다.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태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라는 구스타프 말러의 ‘이방인’ 관념. 그리고 “내 조국은 네덜란드가 아니고 세계이다”라는 에라스무스의 ‘세계’라는 관념. 그것은 일국주의(一國主義)를 넘어서 있다. 천국은 누구나 죽기만 하면 적을 올릴 수 있는 곳이다. 정신적 이방인들, 이 세계의 무적자들도 적을 얻는, 공동의 묘지이자 나라이다. 가네코는 그런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호출’의 의미

가네코 후미코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니, 사실 기분이 좀 착잡하기도 했다. 역사 차원에서 일본을 두 번 세 번 더 생각해 봐야하고, 그들이 남긴 역사적 트라우마 속을 불편한 마음으로 가로질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독도영유권,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등, 한일 간의 현안은 어지간히도 복잡하다. 아니 지금 한일관계는 꼬일 대로 꼬여있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한일관계를 가네코 후미코를 호출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호출(呼出)’이란 ‘어떤 사람을 일정한 곳까지 오도록 불러내는 것’이다. 내 시선의 앞쪽, 내 사유가 미치는 지점까지 불러내어 ‘기억’을 되새김하며 번민을 공유하는 최소한의 형식이다. 기억 속에서 일반적-평면적-병렬적으로 있었던 누군가를 특수적-가치 우위적 역사 인물로 부각시키는 작업이다. “사물들은 가장 눈에 뜨이는 것 까지도/거기 정신을 쓰지 않으면, 언제나 그 자리에 없었던 듯,/요원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고 했던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일제강점기라는 일상 세계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또 저 ‘기억’ 속으로 아련히 사라져 갔었다. 그러다가 박열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통영의 ‘박경리 묘’를 찾아,  『일본산고』를 읽다

솔직히 가네코 후미코를 쓰기 시작하니 머리가 좀 복잡했다. 바람을 쐬러 통영을 갔다.  

통영에 온 김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말을 남긴 박경리의 묘에도 들러볼 생각이다. 박경리기념관에 들러 둘러보고, 맨발로 묘소까지 걸어 오른다. 오른 손에는 기념관에서 구입한 2013년 출간된 박경리의 『일본산고(日本散考)』(마로니에북스)를, 왼손에는 신발을 벗어들고, 터벅터벅 꽃샘추위 속의 산길 포장도로를 오른다. 맨발만큼 참 홀가분한 것도 없다. 인생은, 올 때도 맨발 갈 때도 맨발이기에, 틈틈 맨발의 존재를 확인해두어야 한다.

3월 중순, 통영의 바다가 멀리 바라보이는 박경리의 묘역은 참 따스했다. 묘비는 없다. 묘역을 덮은 보드라운 잔디는 푸른 하늘, 멀리 바라다 보이는 통영 바다의 색조와 호응하며 정갈함을 더한다. 묘소 뒤편으론 감나무가 쭈욱 둘러서 있다. 가을이 되면 주렁주렁 감이 열릴 것이나, 지금은 침묵해 있다.
박경리의 『토지』는 그 자체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증언하는 ‘일본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이야기를 모아놓은 『일본산고』를 읽으면 일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일본인들을 만났을 때 박경리는 자신을 “철두철미 반일 작가”(66쪽)라고 소개한다. “일본의 양심에 기대하며”, 그런 양심이 많아질 때 “진정한 평화”를 일본은 누릴 수 있다(192쪽)고 권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러 젊은 사람에게 충고한다”는 대목에서는 예리하다.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189쪽)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는 일본. 여기서도 그런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힘과 도덕, 어느 쪽을 더 존중하는가의 차이이다. 애당초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이다. 붓[文] 보다는 칼[武]이 우선이다. 일본은 과거나 지금이나 병영국가이며, 병학(兵學)이 기본이다. 그래서 일본은 국가가 국가다움을 낭만적 평화에서 찾지 않는다. 현실적 힘[무력]의 우위에서 찾는다. 따라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묻는 이상적 왕도(王道)보다도 권모술수를 활용하는 현실적 패도(覇道)를 존중한다. 역사적으로 『맹자』의 도덕에 기반하는 성선설보다도, 『순자』의 욕망에 기반하는 성악설에 친숙해 왔다. 우리나라(조선)는 어떤가. 조선시대를 보라. 철저한 맹자의 나라였다. 그래서 왕도주의를 사랑했다. 일본은 어떤가. 순자의 나라였다. 그래서 패도주의를 사랑한다. 이 간극을 간과하기 쉽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상’을 받을 자격은, 그만한 ‘예우’를 받을 덕성을 갖춘 인물이다. 이런 입장에서 일본은, 칼자루 쥔 무사의 나라로 힘 있는 자를 존중하기에, 곰배상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최고는 그들에게는 최저였고, 우리에게 최저는 그들에게는 최고였다. 이렇게 일단 말할 수 있다.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 석·박사를 했다. 양명학 · 동아시아철학사상 전공으로 한국양명학회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등이,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