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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를 걷고 공동체로서의 '커먼즈'로 가자
울타리를 걷고 공동체로서의 '커먼즈'로 가자
  •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 · 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9.03.25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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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下)

필자가 국가 및 자본의 통제와 지배에 맞서는 새로운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제기되고 있는 커먼즈(commons)를 현금의 대학문제와 관련지어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커먼즈는 일차적으로 공유지를 일컫는 말이고, 이 공유지는 서구의 역사에서 울타리치기(enclosure)를 통해 구획되고 사유화되면서 근대적인 자본주의 시대에 점차 소멸되거나 소멸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공유와 ‘함께하기’를 특성으로 하는 커먼즈 패러다임은 단지 자연자원만이 아니라 사회의 여타 부문에까지 확장되고 있고 사적 소유와 자원의 상품화에 복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공동체의 이념과 결합하여 그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 아울러 일각에서 커먼즈는 자본주의의 사유화 모델을 대체할 수 있는 공유모델의 창출을 위한 인식과 실천그리고 운동을 통칭하는 범주로 떠오르고 있다.

거의 역사에서 묻혀 있던 공유지 문제가 학문과 운동의 의미 있는 실천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공유지의 부정적인 결과를 주장한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에 대한 비판이 활성화되면서였다. 하딘은 공유지를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맡겨두면 필연적으로 각자의 최대이익을 쫓아서 결국 공유지가 고갈되고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이를 사유화하거나 국가적인 통제를 통해 관리함으로써 이 비극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딘의 논리는 흔히 사유화 내지 민영화를 위한 자본이나 시장의 요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동원되어 왔지만 공유지 문제를 수면으로 떠올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공유지의 비극론을 비판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와 협력을 통한 공유지 관리의 성공사례를 제시한 것을 기점으로 사유재산과 자본주의적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거나 거기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커먼스의 영역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대학이라는 기관을 커먼즈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딘이나 오스트롬과는 다른 차원의 논의가 필요할 법하다. 오스트롬이 말하는 커먼즈는 자연자원을 대상으로 한 작은 규모의 공유지를 가진 공동체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령 사립대학의 소유 여부를 따질 때면 흔히 ‘사학에는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오는데, 거의 상식화된 이러한 관념에는 대학을 사유재산으로 보는 시각이 내재해 있다. 과연 사립대학을 커먼즈로 보고 공동체의 자치에 맡기게 되면 하딘이 말하는 ‘공유지의 비극’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인가? 오스트롬의 성공사례는 자연자원의 관리에서 공동체적 협의의 효율성을 입증하고 있지만, 실상 대학의 경우에도 공동체적 합의에 의한 운영방식은 민주적 거버넌스가 정착되어 있는 선진 대학들에서 일정 수준으로 실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립대학의 경우에도 대개의 문제 사학들은 오히려 대학의 사유화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오너가 퇴출되고 난 후 이른바 ‘주인 없는’ 대학들이 오히려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이 공유지는 반드시 사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고, 국가나 외부적 권위의 개입 필요성을 말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가 과도하게 이루어지면서 대학이 그 본령을 상실할 지경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 작금의 대학의 위기상황이다. 당면한 구조조정도 그같은 방향의 경쟁을 강요하고 있다시피, 이 과정에서 한국의 대학은 지표관리를 통한 관료주의적 통제의 가장 극심한 사례가 되어 있다.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동체적 결정이라는 대학의 자율성은 허울에 불과하고 국가 자체가 대학이 자본의 종복이 되고 시장의 요구에 부응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대학의 폐허화를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떤 점에서는 ‘공유지의 비극’이 아니라 ‘국가통제의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 대학의 현실이 아닌가?

고등교육이 국민 누구나 진학할 수 있는 국가적 제도로 존재하는 점에서는 대학은 공공재의 속성을 가지지만, 경쟁을 통해 선발하고 선발된 학생에게만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공유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학은 등록금을 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적 재화이기도 하다. 대학은 이처럼 다양한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혼합재(mixed goods)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을 커먼즈로 보는 것은 이 혼합적인 성격 가운데서 그것이 이 기관의 본질을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학이 비록 폐허화되고 자본의 종복이 되었으며 국가의 통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같은 억압에 대한 어떤 저항력을 가지고 존재하는 커먼즈의 영역이 여전히 대학에 살아 있다는 인식이다.

커먼즈로서의 대학이라는 발상이 국가와 자본의 이중적인 억압으로 위기에 처한 대학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극복을 위한 실천과 맺어져 있다면, 과연 현재의 대학의 현안들에 어떤 대응이 가능한 것인가?

대학개혁의 신자유주의적 추세와 구조조정이 결합하여 대학을 압박하면서 강사를 포함한 대학의 비정규교수가 전체 교수의 과반수를 넘는 급격한 변화가 근래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재정압박이 심각한 군소사립대는 물론이고 상위권의 대학들조차 강사에 대한 구조조정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예산의 확보 여부가 아니라 대학을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가 그릇되기 때문이다. 대학의 교수구성이 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의 커먼즈적 속성에 대한 인식이다. 상품화를 전제로 한 재화가 아닌 보편지식, 나아가서 진리 차원에 대한 탐구의 권리와 책무를 국가나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곳이 바로 대학이다. 일찍이 어떤 외부적인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오직 ‘이성’의 관점에서 판단할 권리를 대학기관에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칸트의 논증은, 현재의 대학에서도 학문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로 구현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커먼즈로서의 대학에서 생산된 지식은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이며, 사적 이윤추구가 아니라 공개와 공유를 속성으로 한다고 할 것이다. 미래의 대학을 지식이 자유롭게 교환되고 소통하는 플랫폼의 형태로 제시하는 구상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교수사회 내부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적 지위와 분리도 극심하고, 실제로 강사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그 시행과정이 순탄치 않은 근저에는 정부의 예산부족 핑계만이 아니라 정규직 교수들의 굳어진 기득권적 관행이 쉽사리 혁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학의 적폐청산과 민주화는 대학의 독점적 권한을 행사해온 교수사회의 기득권을 구성원들과 나누지 않고는 진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이 시장자본과 국가권력의 이중적 족쇄에 걸려 있고 대학들의 생존을 건 경쟁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같은 공동체적 인식을 촉구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커먼즈로서의 대학에 대한 인식은 지금이곳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공동체적 이념을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실천과 운동의 제안이기도 한 것이다. 국가와 자본과 같은 외부의 힘이 이러한 대학의 변화를 위해 나설 리가 만무하고, 오히려 그 공유지를 울타리 쳐 사유화하고 공리적인 활용의 도구로 삼는 것을 ‘개혁’의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다. 대학이라는 공유지는 그 구성원들의 끊임 없는 주체적인 협력을 통해서 추구되고 이룩되는 공간일 수밖에 없다.
 

 

윤지관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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