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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에 방황했던 실험실 10년, 되돌아보니 '채움'이었다.
'비움'에 방황했던 실험실 10년, 되돌아보니 '채움'이었다.
  • 조진성 경희대학교 식물환경신소재 박사후연구원
  • 승인 2019.03.2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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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자신 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길 god-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많은 후배들을 만나왔고, 중도에 이 길을 포기하고 나갔던  후배들을 보면서 내가 이들을 위해 가슴에 와 닿는 얘기를 못해준 건 아닐까, 그들이 이 길을 지속할 수 있도록 과연 최선을 다해 응원과 용기를 북돋아 줬을까, 분명 잘 할 수 있는 친구들임을 알고 있었는데 결국 그들을 잡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며, 이 글이 지금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몇 자 적어 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한 실험실 생활은 나에게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한 보람찬 시간이었다기보다는 실험실 선후배간의 위계질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만 집으로 귀가할 수 있는 피곤한 일상의 반복, 그리고 무엇보다 실험실에 묶여있느라 친구들과 점점 멀어지게 되면서 느낀 소외감에 밤마다 눈물을 훔치며 방황했던, 고통으로 얼룩진 시간으로 기억되는 것 같다.

석사과정을 시작한 것도 연구에 대단한 열정이 생겨서가 아닌, 연구원으로 취직하는 길이 공부해서 공무원으로 취직하는 길보다 빠르지 않을까하는 나름의 인생전략으로 시작한 길이었다. 학부 때의 실험실 생활은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하는 데서 오는 인내와 고통을 감수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기였다면, 석사 과정의 실험실 생활은 낮아진 자존감에 허덕이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학회에 참석하면 나와 같은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나보다 훨씬 어려운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만 같았고, 저들처럼 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져 또다시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의심을 품어왔었다.

그렇게 2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석사연구원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년 동안 석사연구원으로 지내다가 문득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가 되어 뛰어난 연구를 해서 이 분야에 업적을 남기고 싶다는 멋진 이유가 아닌, 무시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스스로 연구계획을 세워 독립적으로 연구를 이끌어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지식이 부족했고, 박사님의 지시에 따라 연구를 수행해야만 하는 스스로의 한계에 자존심이 상했다. 무시 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고, 이 당시에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박사학위는 받고 이 길을 접을지 말지 결정하자는 마음으로 버텨왔다. 그렇게 박사과정이 한해, 두해 지나고 나의 이력서(curriculum vitae)가 하나 둘씩 채워지면서 그와 함께 자존감도 높아졌고, 비로소 주변 환경에 이리저리 휘둘리던 내가 아닌, 실험실 생활과 연구에 즐거움을 갖게 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평생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던 한국연구재단의 박사후국내연수라는 감사한 기회를 받아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이 길이 내 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린 듯하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10년의 세월동안 의심과 방황으로 가득 찼던, 남들보다 뒤쳐져 보이고 스스로 더 나아지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그 시간들이 결코 허송세월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많은 후배들이 학부, 석사, 박사과정으로 실험실에 들어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실험실 생활에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그만두겠다고 할 때 과거의 나 자신을 보는 듯해 차마 쉽게 잡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후배들이 그만두겠다고 했던 이유들 중에서 연구가 체질에 맞지 않고 재미가 없어서라는 이유는 거의 없었다. 노력하는 것에 비해 실험결과가 나오지 않는데 대한 좌절감, 교수님의 무서운 훈계, 개인시간의 부재에서 오는 불만 등의 이유로 이 길이 내 길인가 방황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자신이 연구와 체질이 맞지 않다고 착각하지 않길 바란다. 처음부터 뛰어나고, 처음부터 실험실생활이 즐거운 될성부른 떡잎이 아닐지라도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너무 진부한 얘기지만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말을 느끼게 될 때가 있으니 열매는 맛보고 그만둘지 판단하길 바란다. 지금 그만두고자 하는 그 순간에도 나의 열매는 익어가는 중이고, 그 끝에는 열매와 함께 열매를 딸 만큼 키가 커져있는 나 자신이 기다리고 있으니 많이 힘들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조진성 경희대학교 식물·환경신소재공학과 박사후연구원

경희대학교에서 식물유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본식물을 대상으로 한 이차세포벽합성 기작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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