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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바꾸기, 추억 바꾸기 … 그리고 세상 바꾸기
공간 바꾸기, 추억 바꾸기 … 그리고 세상 바꾸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9.03.25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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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 (3) _ 남용동 대공 분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말이지만 한번쯤은 기억해보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언어를 상기하자. 대공(對共),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모든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 앞에 붙던 명칭이었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자신이 권력기관임을 자랑하던 어휘였다. ‘대공 업무’라는 말자체가 갖고 있는 무서움을 그 말이 판이 치던 시절을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앞뒤가 안 맞아도, 증거가 부족해도, 대공이면 다 통했다. 인신을 구속할 수 있는 가장 큰 구실은 대공이었다. 노조를 해도 대공이 걱정이었고, 학생운동을 해도 대공을 겁냈다. ‘밀린 임금을 달라’하고 ‘대통령 그만 하라’는 데도 대공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모두가 벌벌 떨어야 했다. ‘사람’이 아니라 ‘빨갱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로로 남쪽에서 서울역으로 가다보면 지하철 남영역이라는 큰 표지판이 나오고 바로 그 옆 짙은 갈색 건물이 이른바 ‘남영동 분실’로 불리던 치안본부 대공수사대였다. 남영동 분실도 길어서 그냥 ‘남영동’으로 불렸다. 마치 남산의 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를 ‘남산’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았다. 영화 <1987년>의 바로 그 장소가 남영동이다.

권력은 업무처의 이름이 없이 지명만으로도 충분히 그 힘을 발휘한다. 줄여서 말할수록, 돌려서 말할수록, 그곳의 권력은 세다는 말이다. 요즘도 대통령보다는 청와대, 청와대보다는 BH(Blue House)라는 말을 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감히 부르지도 못한다니.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자꾸 눈이 쏠린다.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고나 해야 할까. 어제 탄 KTX에서도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경찰청 인권센터’가 되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까? 정말로 격세지감이다. 같은 건물인데도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같은 건물이지만 하는 일이 바뀐 곳은 많다. 목욕탕인데 식당이자 술집으로 바뀐 곳을 비롯해서, 근대화 초기의 건물이 더 이상 쓸모없게 되면서 색다른 용도로 활용되는 것이다. 군국주의 시대를 벗어나자, 근대화의 미명을 버리자 공간이 탈바꿈을 하는 것이다.

10수년전 나는 화력발전소를 레스토랑으로 바꾼 외국의 예를 보면서 참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큰 건물을 내부의 중심구조물은 내버려둔 채로 양조장 겸 식당으로 쓴다는 것은 여러모로 걸맞았다. 높은 천장과 숨은 동선, 검은 기계와 누런 맥주가 교묘한 느낌을 주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일은 벌어진다. 베이징에는 ‘798예술구’라는 데가 있다. 798연합군수공장 자리를 국가가 예술가에게 통째로 내준 것이다. 여기에서는 국내외 작가의 전시회가 늘 열린다. 나도 세계적으로 고가를 자랑하는 쩡판즈(曾梵志: Zeng Fanzhi)의 작품전시회를 그곳에서 본 적이 있다. 마르크스도 그리고, 병원 연작도 그리는 그다. 전시가 열렸던 울렌(Ullens) 현대미술센터(UCCA)야 고급스럽게 탈바꿈을 했지만, 일반적인 전시장과 작업장의 하프파이프 형 천장에는 아직도 ‘사회주의 혁명 만세, 모택동 주석 만세’라는 구호가 붉은 색으로 적혀있었다. 그 밑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는 그것자체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되었다.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화폭에 등장시킨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위주의기관에서 나와 다음날까지 떼라고 종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청주의 연초제조창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분관’으로 탈바꿈해서 상설전시를 한다. 공간, 바꾸면 그만이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 대표적인 곳이 요정에서 절로 바뀐 길상사다. 가야금 뜯던 독채마다 이제는 중들이 들어가 수행을 하니.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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