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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교수'와 '교수'사이 … '여교수'와 '욜로' 사이
'여교수'와 '교수'사이 … '여교수'와 '욜로' 사이
  •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 승인 2019.03.2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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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재직 중인 대학에서 이번에 처장 직을 맡게 되었다. 대학 행정보직을 맡는 것이 지난 18년 근무기간 동안 이번이 네 번째이다. 일감이 많은 직책을 맡을수록 단점이 많다. 원래 교수라는 진로를 선택한 주된 목적인 차세대 교육과 후학 양성을 상당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실험실 공동연구 같은 체계적 지원이 없는 인문사회계 교수들은 연구도 거의 내려놓아야한다.

행정보직이라는 것이 과연 교수로서 연구와 교육을 제쳐놓으면서까지 맡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매번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고심 끝에 또 다시 행정을 맡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예전보다 현저하게 나아졌지만 남성 교수는 ‘교수’로, 여성 교수는 ‘여교수’로 흔히 칭해지는 사회에 살면서 자문하게 된다. 만일 내가 ‘남교수’였더라도 이 보직 제안을 수락했을까?

만일 ‘남교수’였다면 교육과 연구에 좀 더 시간을 쓰고, 미술사 전공을 구실삼아 매년 두어 달씩 동서를 종횡하며 여행하면서 유유자적하게 한번뿐인 인생을 사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와 ‘소확행’적 방법론을 수호했을 것 같다. 말인즉슨, 보직을 수락할 때 동료, 후배 '여교수'들의 사회적 진출과 발언권 확대의 저변역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철저한 자기중심적 착각의 발로로 치부될 수도 있다.

돌아보자니 이런 식의 결정을 한 적이 많다. 지난 30년간 여러 나라에 소재한 십수 개 기관에서 직책을 맡아 살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선택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선택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 중 예닐곱 기관에서는 소수자인 여성이었을 뿐 아니라 유일한 한국인이었기에, 힘들어서 포기하거나 대충 하고 싶을 때마다 인간 아무개로 간주되기보다는 한국인 여성 아무개로 간주되는 현실을 의식해서 내 나라에 덕은 끼치지 못할망정 누는 끼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버텨내곤 했다.

스스로 애국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단지 80년대 후반부터 외국생활을 하며 어린 마음에 경제사정이 녹록치 않은 나라에서 자금 가져다가 공부하느니 차라리 귀국하는 것이 도리라는 다짐으로 치열하게 살면서, 타국의 연구기금들로 순전히 지탱한다든가 하는 정도였다. 애국이란 개념이 나이와 상황에 따라 변하거니와, 지금은 국내에서 벌어서 외국에서 여행하며 쓰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되돌아보면 애국보다는 오히려 두어 세대 앞서 태어나서 ‘2등급 시민’이나 한낱 소유물 취급을 당하면서도 일제강점기 때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애국운동을 했던 선배 한국여성들이 무덤 속에서 혀를 찰 정도로 부끄럽고 안이한 삶을 ‘여교수’로서 영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국외에서는 ‘한국인’ 아무개, 국내에서는 구성 비율이 월등히 적은 소수자 ‘여교수’ 아무개라는 사회정체성이 개인의 자아정체성보다 앞설 때가 많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을 겨를도 없던 터라 밤11시 넘어서야 학교에서 이 글을 쓰노라니 문득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속 대사가 떠오른다. “내 삶 속에 진정한 나는 어디에 묻혀있는 것인가?” “내 생이 상자 몇 개로 정리되건만.” “즐길 줄을 몰라. 주중에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주말에 파자마 차림으로 집에서 뒹굴며 지내는게 전부이지.” 구구절절이 꼭 대필된 자서전 같다.

주변의 ‘여교수’들도 대부분 놀 줄을 모른다. ‘유희적 인간(호모 루덴스)’의 본성이 DNA에 결핍된 것인지, 아니면 생존경쟁의 분투 때문인지, 연구와 교육,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느라 경황없이 지낸다. 언제쯤이면 NHZ(No Human Zone)을 정해놓고 이삼일 간 두문불출 하면서 스스로 놀 줄 안다고 착각하는 식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후세대 여성 교수들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희망해본다.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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