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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열차
청룡열차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9.03.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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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 (1)

"나는 늘 고민한다. 내 강의가 조금이라도 이런 소설과 영화를 닮을 수 없
을까 하고. 젊은이들은 더 이상 지루한 강의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무리
학구적이라도 재미를 담지 않는다면 외면 받을 수 밖에 없다"


방학이 되면 마구잡이 책 읽기로 학기 중의 바쁨을 달랜다. 아니, 방학이 되었다는 것을 나름대로 즐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못 읽었던 책을 읽는다는 거창한 변명보다는 밤새워 책 읽어도 늦잠자기가 가능해졌다는 모종 권리감의 실현이다. 방학이 있는 직업으로 이 정도도 못하면 내가 너무 처량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소설, 때로는 베스트셀러, 때로는 무겁지만 꼭 읽어야 할 기념비적인 저서도 있다.

다시 보고 싶은 책도 있는데, ‘과연!’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뭔가 좀…’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어 조금은 주저한다. 20대의 감동을 50대에까지 이끌지 못하고 그만한 느낌이 다가오지 않을 때, 참으로 서운하다. 나의 청춘이 세상을 깊게 보지 못했던가, 나의 청춘이 너무도 어리석었던가, 아니면 청춘의 열정과 순백이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거꾸로 ‘과연!’도 늘 좋지만은 않다. 내가 아직도 그 모양이라는 자책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었으면 커야 하는데, 아직도 못 컸다는 자괴감이다.

소설을 영화화한 것을 볼 때도 이런 머뭇거림이 있다. 영화화가 실패했을 때 원작의 감동이 손상 받는 것 같아 그렇다. 그러나 별거 아닌 소설을 영화로 성공한 예가 점차 많아지면서 역방향으로 즐길만한 경우가 많이 생겼다. 최근 들어 영화기술이 좋아지면서 그런 거 아닌가 싶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내용이 좋아 소설을 찾아 읽어보게 되는 것이다. 최근 것으로는 ‘창문 넘어 도망친 백세 노인’(2013)이 그랬다. 소설(2009)의 반만을 영화화 한 것이니 영화의 속편을 보는 것 같아 재밌었다. 한마디로 ‘포레스트 검프’의 유럽판이었다. 그보다 앞선것이라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를 꼽을 수 있겠는데, 영화가 좋아서 소설을 찾았더니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1922)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늙어가는 노인이건 젊어지는 노인이건, 모두 노인이 주인공이니 시간을 담는 소설은 어쩔 수 없이 늙은이들이 나와야 하는 모양이다.

어느 것이 낫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영화로는 이만희 감독의 유작인 ‘삼포로 가는 길’(1975)이 황석영의 그것(1973)을 잘 표현했다. 이후 이것은 여러 곳에서 다시 만들어지기도 했다. 내 생각 속 작부 백화(百花: 영화포스터의 백화는 흰 백이 아니라 온 백이다)의 모습이 중첩되는 것을 보니 그렇다. 이렇듯 짧은 소설보다 긴 영화가 오랜 그림을 남게 하기도 한다.

나는 늘 고민한다. 내 강의가 조금이라도 이런 소설과 영화를 닮을 수 없을까 하고. 젊은이들은 더 이상 지루한 강의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무리 학구적이라도 재미를 담지 않는다면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오해는 마시라. 재미가 없다고 해서 학구적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학구적인 것이 반드시 재미없지는 않다는 말이니. 학구적인 것은 대체로 재미없지만, 학구적이면서도 재밌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재밌는 것은 대체로 학구적이지 않다는 말도 성립하지만.

‘청룡열차’라는 말을 아직까지는 젊은이들이 제법 알아듣는다. 물어보니 ‘롤러코스터 같은 거 아니예요?’라는 화답이 온다. 스무 살에 어린이대공원에 처음 생긴 청룡열차를 타면서 생각했다. ‘철학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는 없을까?’하고. 철학이 이렇게 짜릿하고 신날 수 있다면, 철학이 이렇게 박진감이 있다면, 철학이 이렇게 기승전결이 있다면, 철학이 이렇게 짧지만 핵심을 찌를 수만 있다면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좌청룡, 우백호’에서 머물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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