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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를 사랑한 김유 … 그의 글엔 파도와 바람이 일렁인다.
청산도를 사랑한 김유 … 그의 글엔 파도와 바람이 일렁인다.
  •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 승인 2019.03.11 1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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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3)-2 청산도 '풀무덤'을 찾다
▲ 청산도 범바위 풍경
▲ 청산도 범바위 풍경

2. 김유, 청산도를 사랑하다

표류 끝에 여서도로, 청산도로

김유는 청산도에서 71세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후 청산도의 40여 제자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게 된다. 현재 청산도 청산면 부흥리(復興里)의 숭모사(崇慕祠)에서는 매년 음력 3월 3일 김유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부흥리 입구 마을 소개 글에는, (김유로) 인하여 “청산가면 글 자랑 말라”는 말이 이 고장 문명 수준을 동경(憧憬)하는 말로 유래되어 청산 사람들은 비록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다 하더라도 문예가 대단하여 속담에 장군(排泄物收紬桶)을 지고 다녀도 한시(漢詩) 한 수는 능히 지었다고 전해온다”고 적혀있다. 

김유는 사후 청산도에서 고향 거문도로 옮겨가서 묻힌다. 그의 묘소는 현재 거문도 유촌리 귤은당 뒷산 너머에 있다. 최근 방문을 해보니 벌초할 사람이 없어 묘소엔 풀만 무성하다.

청산도, 표류자들의 기억

청산도는 표류자들의 기록에도 나온다. 예컨대 제주도에서 태어난 장한철(張漢喆. 1744-?)의 경우이다. 그는 1770년(영조 46) 12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풍랑으로 류쿠제도(琉球諸島)에 표착한다. 이듬해 1월 일본 행 안남(安南)의 상선을 만나 흑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지만, 다시 풍랑으로 청산도(靑山島)에 표착하였다. 나중에 이 일련의 경험담을 적은 『표해록(漂海錄)』에서, 그 당시 그가 청산도에서 본 관리들의 횡포를 묘사하고 있다. 즉 장한철이 본 청산도는 낙원이 아니었다. 관청의 하급 관리가 마을의 책임자를 몽둥이로 때리고, 음식과 돈 심지어는 과부의 농우(農牛)를 빼앗는 장면을 목도한다(장한철,  『표해록』, 辛卯年 正月 十日條). 김유가 청산도를 기록한「소도원기(小桃源記)」에서 “관청(衙門)을 설치하여 치안을 전담하게 한 것이 선향(仙鄕)의 흠되는 일[欠典]…”이라고 말한 대목과도 합치된다. 정치는 늘 자연과 인간을 선하게 관리-보호한다지만, 결국 악하게 규율-지배하려 달려든다. ‘약 주고[藥-利) 병 주는[毒-害]’ 얄궂은 이중성이 본질이다. 

▲ 거문도 등대 앞바다
▲ 거문도 등대 앞바다

‘꿈 같은 이 세상’ 청산도

김유는 청산도에서 여서도로, 그리고 거문도로 다니며 글을 가르쳤다. 그는 고향 거문도보다 정을 붙인 청산도에 더 오래 머물렀다. 섬의 유학은, 현재 거문도 귤은당 옆에 있었던 귤은서당을 통해서, 청산도의 서당에서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귤은재유고』의 시편들을 가만히 읽어보면 안다. 출렁이는 파도 위 뱃전에서 그가 한 장 한 장 넘겼을 흉금속의 서적들. 그 문자 사이사이에 배여 있는 짭짤한 소금기. 어른어른 휙 지나가는 곰삭은 사유의 남쪽 풍경. 끊임없이 출렁이는 바다의 가락. 거문도나 청산도의 바닷가에서, 바다 위에서, 섬에서, 그는 뭍에 사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그만의 감각으로 조선의 유학을 새롭게 미분하였다. 아니 그의 몸에 맞는 개념세계 속으로 끌어들여와 재구축했다. 섬의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전달하기 위해 유교 지식을 번안해갔다. 나는 여수에서 거문도로 가는 배 위에서, 비 내리는 바다 한가운데서, 이런 텍스트 밖의 텍스트를 상상하게 되었다. 

김유는 거문도의 동도 귤은서당(현재 귤은사당의 오른쪽. 허물어져 흔적밖에 없다.)에서, 홀로 맑고 잔잔한 바닷가에 앉아 시를 읊었다. 어쨌든 거문도는 그의 고향이라, 청산도가 아무리 좋다 한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더 좋았으리라. 

그는 청산도에 조금도 마음 흔들림 없이 숨어서 살고 있었다. 좁은 섬의 공간을 좁게 여기지 않고 또한 부끄럽지 않게 생각했다. 한 평생 섬 위를 지나가는 달을 쳐다보며, 이 섬에서 한가로이 지냈다는 심정을 잘 드러낸다. ‘섬옹(蟾翁)’은 『두껍전』 등에 나오는 두꺼비를 의인화한 것이다. 그는 메이저 리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오직 고요한 변방 청산도의 아웃사이더로 있으면서, 크게 만족해했다. 그러나 김유의 대은(大隱)은 청산도라는 소굴(小窟)에 대비된다. 일단 대은은 거문도에서 은거, 다시 청산도에 와서 은거를 하고 있으니,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가 인형 속에 인형을 담고 있듯, ‘은거 속에 다시 은거’를 품고 있는 격이다. 그런데 청산도(=소굴)는, 달을 찾아보려는 꿈이 있는 것처럼, ‘갇혀있으면서 열려있는’ 공간이다. 융이 바다를 ‘죽음과 재생’으로 보았듯이, 섬 또한 현실적 ‘한계-제한’인 동시에 ‘개방-희망’의 땅으로 재탄생한다.

▲ 청산도 풍경
▲ 청산도 풍경

3. 김유의 유토피아, ‘소도원(小桃源) = 청산도’

백성들이 안락한 곳(民之安樂)!

김유가 은거하는 청산도, 그것은 한마디로 ‘작은 도원경[小桃源]’ 즉 ‘작은 유토피아(small utopia)’였다. 그는 「작은 도원이라는 설명[小桃源說]」의 글에서 말한다. 우선 그가 알고 있는 도원은 귀로만 들었던 ‘카더라!’ 통신사의 ‘귀(=풍문) 도원’이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한 ‘눈(=실재) 도원’이 아니란다.

김유가 말하는 소도원은 한마디로 작은 유토피아다. 『장자』에 나오는 이상향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 <어디에도(何) 있지(有) 않은(無) 곳(鄕)>이란 뜻이듯이 유토피아(utopia)는 <‘없는(ou-)’ 그러나 ‘좋은(eu-)’ ‘장소(toppos)’>이다.

이상향이기에 현실적으로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별천지이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절절하게 그런 ‘이상의 나라=이상향’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김유는 이런 천당/극락 같은 곳은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 본다.

도원(桃源)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다. 도원(桃源)/도화원(桃花源)/도원향(桃源?)/선원(仙源)/선경(仙境)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 호남성(湖南省) 도원현(桃源縣)의 남서쪽에 있는 지명으로,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의 배경이 된 곳이다. 「도화원기」의 내용은, 동진(東晋)의 태원연간(太元年間)에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복숭아나무 숲속에서 길을 잃고서 배에서 내려 산 속의 동굴을 따라 나아가다가 마침내 이르렀다는, 별천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곳에는 진(秦)나라 말기의 전란을 피해 살던 사람들의 후손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평화롭게 살아오고 있었다 한다. 혼란한 세상을 피해 찾아들었다는 낙원. 그러나 다시는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그 곳. 사실 낙원은 그래야 제 격이다. 기본적으로 김유의 소도원 이야기도 이런 고전적 맥락에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가미하여, 판소리의 더늠처럼, 스토리텔링 된 것이다.

잠시,「몽도원도(夢桃園圖)」를 회상하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찾는 꿈을 꾸고, 그 내용을 안견(安堅)에게 설명한 뒤 그리게 했다. 안평이 꿈에 거닐던 도원 속, 아련한 풍경 묘사에는 사람의 자취가 없다. 모든 소리는 가물가물 멀어지고, 눈꺼풀 속에 갇힌 눈알의 검푸른 고요. 간간이 스치는 황금빛 자락들, 붉은 복숭아 꽃잎 넘실대는 평온의「몽도원도(夢桃園圖)」를 그려본다. 죽림과 기와집. 집에는 사립문이 반쯤 배시시 열려 있었고, 앞개울에는 작은 배 한척이 물살에 흔들흔들. 집은 인기척 뚝 끊겨 쓸쓸한 ‘고절’(孤絶)의 터일까.

김유가 생각한 청산도도 그랬을까. 그가 그곳에서 새 부인을 만났고, 푸른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뭍으로부터 아득한 그곳은, 아마도 그랬으리라.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그 무엇이 있는 곳으로 눈길이 향하는 법. 그것이 바로, 천홍만자(千紅萬紫)의 ‘복숭아 꽃잎’이기 때문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동사서독(東邪西毒)」(1994)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복사꽃이 피는 시절이면 사랑했던 여인이 있는 백타산 쪽으로, 그저 눈길이 향하는 그런 마음을.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음을. 

현실이 피폐할수록 그리운 ‘세상의 저쪽(이상향)’

현실이 괴로울수록 세상의 저쪽(이상향),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을 쳐다본다. 이 점을 김유도 간취하고 있었다. 피폐한 삶 속에서,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스토리텔링이 작동된다. 이야기 하는 인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의 본질 아닌가. 

요즘 세상의 학정에 시달린 사람들이 모두 살기 좋은 곳을 원하는 말이 “도원에서 살고 싶다”고들 한다. 이 말은 세속에서 밥 먹고 차 마시듯 내뱉는 말이다. 꼭히 알지는 못하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어느 곳에 다시 이와 같은 도원이 있을 것인가.

▲ 청산면 부흥리 승모사
▲ 청산면 부흥리 승모사

요즘 청산도는 바다 가운데 떠있는 듯한 하나의 조그마한 별 세계[別界]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백성들의 호적이 강진(康津)에 속하였고, 중기에는 다시 (강진의) 계동(桂洞)에 속하였으며, 궁중에서 관할 영역[茅土]으로 내린 적 있다. 또 다시 지금의 임금께서는, 즉위하신 지 3년째인 병인(丙寅. 1866)에 비로소 절제사(節制使) 관청을 설치하여 치안을 전담케 하였다. 이것이 비록 선향(仙鄕)의 흠되는 일[欠典]이었기는 하나, 도리어 흠되는 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절제사를 두기 이전에는 궁중에서 적극 협력하여 생활을 돌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움을 받지 아니하였고, 최근에는 누차 현명한 관리(賢侯)를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덕망에 감복되어 그 지역 30리 내에 살고 있는 1,100 호가 각자의 거처를 평안히 하고 있다. 각자의 복을 누리며 기뻐하고 화락하여, 모두가 발을 덩실대며 춤추고 안락하게 살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도원이라 이를 것이라.

김유가 정확하게 짚은 것은, 무릉도원이 다름 아닌 ‘백성들이 안락한 곳’이라는 점이다. 이상향은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락하다면’ 바로 ‘이곳 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사실이다. 청산도도 역사적으로 보면, 흠결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안락한 삶이 있는 무릉도원이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뭍의 정치상황이 복잡할수록 사람들은 저쪽의 섬나라 청산도를 가리켜서, 천홍만자(千紅萬紫)의 복숭아 꽃잎 흐드러지게 피는 ‘소도원’이라 해댄단다. 이런 생각과 말은 김유가 청산도에 바치는 찬사이자 그 당시 그의 삶의 만족도를 가늠해볼만한 대목이다.   

사실 나도 무릉도원을 믿는다. 그것은 ‘현실 속 어딘가’에 있다. 월급쟁이로 살아오면서 내 마음 속에서 오랫동안 되뇌어왔던, “에라, 다 집어치우고, 어서 이곳을 떠나야지!”라는 마음,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저쪽’을 현실화하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내 마음 속에, 그런 세계를 갖고 살아가니, 그것은 분명 나에게 있는 현실세계였던 셈이다. 

청산도의 범 바위에 올라, 전망대 건물 밑에서 파는 막걸리 한 사발 사서 마시고, 바다를 굽어보라. 거기가 바로 선경이다. 유유히 떠다니는 배. 햇살에 비늘지며 아롱지는 잔물결.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의 풍경 속에, 내가 살아서 걸어 다니고, 울고 웃으며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언어는 나라는 존재가 보내는 천사이거나 그런 소식이다. 눈물과 웃음, 바로 그것은 나라는 한 그루의 복숭아에서 핀 꽃잎이 천홍만자로 휘날리며 스스로의 존재 위치를 알려대는 우주적 신호인 것이다. 나는 어디 있는가. 나는 그런 파동으로서 존재해 있다.

4. 타박타박 청산도 초분(=풀무덤)을 찾아가는 길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화두

거문도에서 만난 김유라는 인물. 그를 좇아 빙빙 둘러,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정작 내가 청산도를 찾고 싶었던 것은 초분(=풀무덤)을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허망함과 자연스러움. 그것을 성찰하는 나 자신의 명확한 관점을 되짚어보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어 나가떨어지는=나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스스로(=주체적으로) 죽어가고 싶은’ 것이었다. 죽음을 가로질러, 그 위에서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종말을 위한 준비

슬슬 은퇴를 생각하며, 고향에 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미리미리 내가 태어난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고향은 근원이다. 고향가기=귀향(歸鄕)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시인이란 존재의 근원으로 끝없이 귀향하는 자’라고 했듯이, 귀향하는 자의 마음은, 근원의 언어인 시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존재의 부름, 존재의 숨결에 닿으며,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는 연습, 친했던 것들과 손을 흔들고 냉담하게 돌아서는 훈련을 미리미리 해보는 것이다. 슬프다거나 쓸쓸하다든가 하는 등등의 모든 감정을 청산하고, 조용히 냉담히 떠나는 다짐과 용기이리라. 허물어지고 사라지는 것들, 퇴락하고 소멸해가는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그것들과 함께 가며, 오히려 그것들보다 더 앞서가서, 더 위쪽에서 바라보는 연습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흘러가는 사태를 읽고, 분명히 바라보며, 그것을 넘어서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것 보다 더 위에 서게 되어 한결 초연’해지고 평온해지리라. 망각과 종말을 일찍부터 준비하는 것이다.

▲ 거문도 동도 유촌리 마을 풍경
▲ 거문도 동도 유촌리 마을 풍경

‘묻힐 땅’에 대한 사색

잘 알려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가르쳐준다. 

소작인 파홈이라는 사람은 땅값 1000루블을 내고 아침 해뜨기 전에 출발하여 다섯 군데 표시를 하고 해지기 전까지 돌아오면, 그 다섯 군데를 연결한 안쪽의 땅을 모두 준다는 마을을 찾아간다. 아침 일찍 출발한 파홈은 사방에 펼쳐진 비옥한 땅을 보고 욕심을 부린 나머지 너무 멀리까지 가게 된다. 아뿔싸! 해지기 전까지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 덕에 그는 해가 떨어지기 전 겨우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기진맥진한 나머지 안타깝게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결국 죽음의 대가로 파홈은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나 그게 무슨 소용인가.

세상을 떠난 그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관을 묻을 쪼끄만 땅이었다. “조그마한 뱁새 한 마리가 깊은 숲에서 둥지를 틀 때도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다.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실 때에도 자신의 작은 배하나 채우는 것이면 족하다(??巢於深林, 不過一枝, 偃鼠飮河, 不過滿腹)”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말이다. 파홈이 묻힌 몇 평의 땅, 그의 고향은 바로 그 무덤이었다. 더 이상은 필요 없었다. ‘지금-여기’라는 ‘있음’을 계속 점, 점, 점으로 찍어가다 보면 닿는, 저 진정한 고향. 무덤. 노신이 말대로, 무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다.  

해변의 묘지에서, ‘내 속에서 타자를 만나다’

죽음은 삶과 연결된 것이다. 삶의 완성이거나 또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다. 장자가 말하는 ‘물화(物化)’ 같은, A에서 B로, C로, D로, E로…, 끝없이 이어지는 존재의 여행이리라.

올해 다시 거문도의 영국인 묘지를 찾았다. 20여 년 전에도, 지난해에 들렀을 때에도 이방인들의 죽음이 좀 낯설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죽은 자에게 이방(異邦), 이국(異國)이란 것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고향에 묻힌다고 죽은 자가 과연 편안해 할까. 그런 해석과 판단은 누가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어느덧 날은 저물고, 나는 산길을 걸어 내려온다.

해변의 묘지. 유채꽃이 피기 시작한 길을 따라 쭈욱 내려가면, 바다에 닿으리라.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나는 어떻게 죽어 묻힐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유채꽃이 핀 바닷가의 풍광을 뜬금없이 가슴에 품어보면서, 봄 쑥이 자라는 포슬포슬한 흙 길을 밟아보면서, 나는 내 삶이 이미 그곳에 가만히 접촉하고 있음을 느낀다. 타자들의 죽음이 내 삶 속에서 닿고, 내 몸에 그들이 잠든 흙과 섞이며 내 정신 속으로 왕래하는 소리를, 나는 듣고 있다.

▲ 청산도 해변
▲ 청산도 해변

내 속에서 맴돌다 고요히 다시 어두워져가는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그 침묵의, 쩌렁쩌렁한 소리를. 나는 해변의 묘지내리막길에서 듣는다. 이렇게 묻혀서 모든 것은 또 조용히 어두워져 가리라. 뚜벅뚜벅 내 속에서 땅으로, 바다로, 꽃 속으로, 걸어 나가는 ‘또 다른 나’=‘타자’의 발자국 소리가 해변을 따라 어둑히 묻히고 있다.

거문도 등대에서 바라보던 파도치던 흐린 날의 바다, 천년을 홀로 철썩이는 그 물결. 동백 숲길을 따라 터벅터벅 오르락내리락 밟아댔던 동백꽃 붉은 꽃송이, 홀로 뚝-뚝 떨어진 열망과 정열. 이렇게 내 삶은 또 한 수를 얻으며, ‘오늘도 걷는다마는!’ 다시 마음은 청산도의 초분으로 이어지고 있다.                       (계속)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 석·박사를 했다. 양명학 · 동아시아철학사상 전공으로 한국양명학회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등이,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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