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3-20 02:48 (수)
미륵불을 자처했던 궁예의 영욕이 잠든 태봉의 수도와 분단의 상처
미륵불을 자처했던 궁예의 영욕이 잠든 태봉의 수도와 분단의 상처
  • 교수신문
  • 승인 2019.03.05 1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DMZ 접경지역을 마나다_21. 금학산-동주산성-천황지-도피안사-철원향교지-태봉국 도성 터

철원에는 산악지형이 발달한 중부지역에서 드물게 넓디 넓은 평야가 있다. 이 철원평야를 감싸고 있는 산들은 그 이름처럼 쇠 울타리[鐵原]를 두른 듯 철원 땅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된다. 넓고 안락한 평야가 있다는 것은 ‘함께 살기’에 더 없이 좋은, 자연이 준 천혜의 선물과 같은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천 백 년 전, 이곳을 터전 삼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꿈을 쫓아 철원에 온 사람이 있었다. 철원에 터를 잡았지만, 901년에 먼저 송악(松嶽)에서 고려(高麗, 918년~1392년)의 발판이 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했던 궁예(弓裔, ?~918)다. 그는 905년 7월 다시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태봉(泰封, 905-918)’이라 선포하면서 자신이 현세에 내려온 ‘미륵불(彌勒佛)’임을 널리 알렸다.

철원 DMZ 한가운데 남겨진 ‘태봉국 도성 터’에서 보듯이 짧았던 태봉국의 18년 흥망성쇠를 간직하고 있는 땅이다. 철원 땅 곳곳에는 미륵 세상을 꿈꾸었던 궁예의 자취가 지명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진하게 남아 있다. 궁예는 여기서 가장 화려했던 전성기와 몰락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그가 느꼈을 법한 감정이나 그를 보면서 느낀 철원 사람들의 애잔한 정서는 이 땅에 전설처럼 남겨져 있는 것이다. ‘금학산(金鶴山)’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주산성’, ‘천황지’, ‘도피안사’, ‘철원향교지’, 그리고 평화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도성 터가 그러하다.

금학산, 왕궁의 진산(鎭山)이 되지 못한 산

철원이 한 나라의 수도를 삼기에 충분한 땅이라는 점은 금학산(947.3m)에 올라보면 알 수 있다. 금학산은 이름 그대로 학(鶴)이 막 내려앉은 듯 신령스러운 산세를 갖고 있으며, 철원의 서쪽에서 철원평야를 둘러싸고 길게 누워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웅장하지만 그 높이가 보여주듯이 금학산은 매바위능선, 큰바위능선, 용바위 등 기암괴석들이 이어져 있어 오르기 가벼운 산이 아니다. 산의 정상인 기봉(깃대봉) 부근에는 기우제 터가 남아 있고,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이 사랑했던 말인 ‘용마(龍馬)’가 나온 곳이라는 ‘용탕(龍湯)’도 있다. 하지만 금학산에 얽힌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태봉국의 도읍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 가을의 금학산,  사진출처=철원군청 제공
▲ 가을의 금학산, 사진출처=철원군청 제공

901년 궁예는 송악, 지금의 개성(開城)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준비를 하면서, 당시 음양풍수(陰陽風水)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에게 도성을 세울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그러자 도선국사는 금학산을 천거하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300년 동안 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25년밖에 가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궁예는 이 예언을 무시하고 ‘고암산(高巖山, 780m)’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왕궁을 조성했다. 그 후 금학산의 나무들이 너무나 원통했던지 3년 동안 잎을 피우지 않았고 곰취는 써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철원을 수도로 삼았지만 매우 짧았던 태봉국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긴 철원 사람들의 아쉬움이 배인 이야기일 것이다.

동주산성, 철원의 요충지에 자리를 잡은 궁예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려고 할 때, 송악을 떠난 후 칠일이 못되어 ‘동주산성(東州山城)’에 입성했다고 한다. ‘동주(東州)’는 고려의 도읍을 개성에 두면서 왕도의 동쪽에 있다 하여 그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철원평야가 굽어 보이는 동주산성은 동서남북이 각각 김화, 금천, 연천, 평강으로 나누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요충지였다. 지금은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 동주산성 터에서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이 다량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으며 몽골의 침입 이후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궁예도 지금의 ‘철원향교’ 자리와 ‘도피안사(到彼岸寺)’가 내려다보이고, 애초 궁성터로 삼으려 했다는 ‘천황지(天皇地)’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올라 태봉국의 미래를 구상했을 것이다.

▲ ‘동주산성 터’에서 바라 본 철원평야
▲ ‘동주산성 터’에서 바라 본 철원평야
▲ ‘동주산성 터’ 안내문
▲ ‘동주산성 터’ 안내문

바로 여기서 궁예가 금학산이 아닌 고암산 아래에 도성을 세우기로 계획했을 수도 있지만, 그가 도선국사의 예언을 쉽게 무시했을 것 같지는 않다. 궁예가 처음 송악에서 개국한 후 철원으로 천도한 이유는 송악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한 왕건(王建, 877~943)과 같은 지역 토호들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컸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금학산과 관련된 전설은 궁예의 최측근이었던 왕건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한반도 중부의 넓은 터전에서 신라 왕족의 후예로 알려진 궁예가 새로운 미래를 설계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천황지, 지명에 남은 궁예의 자취

철원 향토사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군대를 이끌고 들어온 궁예는 동주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현재의 철원읍 화지4리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금 이곳에는 궁예의 당시 행적을 증명하는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곳의 과거 지명은 그의 행적을 짐작하게 만든다. ‘화지리(花地里)’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명칭이었던 ‘화전리(花田里)’와 ‘천황지리(天皇地里)’를 합쳐 만들어진 이름이다. ‘천황지(天皇地)’라는 명칭은 이 땅이 바로 하늘이 낸 황제, 즉 ‘천황(天皇)’이 거주하는 곳이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철원읍사무소에서 내려다본 천황지 마을인 화지리.  사진출처=철원군청 제공
▲ 철원읍사무소에서 내려다본 천황지 마을인 화지리. 사진출처=철원군청 제공

하지만 이런 지명에 대한 다른 설도 있다. 이곳에 ‘천황사(天皇寺)’라는 절이 있어서 이곳을 ‘천황지리’라 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향토사학자들을 비롯한 철원 사람들은 궁예가 철원에 처음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여기라고 믿고 있다. 예로부터 철원 사람들은 궁예를 고려사가 기록하는 패악한 군주가 아니라 하늘이 낸 황제로 여겨왔다. 또한 이 지명 유래에 대한 다른 근거로, 화지리 옆 계곡의 이름이 태봉 군사들의 식량을 저장했던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군량곡(軍糧谷)’이라는 점도 알려져 있다.

도피안사, 철원에 깃든 미륵 정토의 꿈

궁에는 천황지로 들어와 군영을 꾸린 뒤, 아마도 금학산을 배경으로 한 철원평야에서 ‘미륵의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당시는 신라 말기의 권력투쟁과 지역 토호들의 발호로 민심이 혼탁했던 시절이었다. 끊이지 않는 전쟁과 지배층의 수탈에 지친 민중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소망했고 ‘미륵신앙(彌勒信仰)’은 이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의 열반 이후 56억 7천만 년이 흐른 뒤, 도솔천(兜率天)의 미륵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러 이 땅에 와서 꽃과 향이 만발하고 지혜, 위덕, 기쁨이 가득한 세상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세상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죽음의 그림자가 늘 사람들을 따라 다니던 시대였다. 궁예 또한 그런 세상에서 민중의 참혹한 고난을 보며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륵불의 재림은 시대의 간절한 소망이었고 그렇기에 ‘56억 7천만 년’이라는, 지금 들어도 천문학적인 숫자는 가혹하도록 긴 세월이었다. 어쩌면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을 자처한 것은 그 당시 혼란했던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의 염원이 모아져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철원에는 그 염원이 하나의 이름에 남아 있다. ‘도피안사(到彼岸寺)’다.

도피안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유행했던 ‘비보사찰(裨補寺刹)’ 중 하나이다.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사상(裨補寺塔思想)’은 ‘사탑(寺塔)’을 지어 ‘비보(裨補)’, 즉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는 것으로 땅의 부족한 기운을 보완한다는 사상이다. 도피안사가 위치한 ‘화개산(花開山)’은 물 위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유약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엔 약해 보였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고자 도선국사가 1,500명과 함께 조성한 사찰인 도피안사는 ‘피안(彼岸)의 세계에 이르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곧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

▲ 도피안사.  사진출처=철원군청 제공
▲ 도피안사. 사진출처=철원군청 제공

그 이름에 걸맞게 산사는 고즈넉하고 아담하다. 산사 마당에는 보물 제22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고 본당에는 높이 91cm의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鐵造毘盧遮那佛坐像)’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이라는 수인을 취하고 있다. 지권인은 이치와 지혜,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본래 하나라는 의미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에 쉽게 타지 않는 ‘철조비로자나불’을 세운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찰을 세웠는지를 남겨 놓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불상 등 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석가불이 … 삼천대천세계에 빛을 비추지 않고 돌아가신 지 1806년이 되었다. 이를 슬퍼하여 이 금상을 만들고자 … 서원(誓願)을 세웠다. 오직 바라건대 비천한 사람들이 마침내 창과 방망이를 스스로 쳐 긴 어둠에서 깨쳐날 것이며 게으르고 추한 뜻을 바꾸어 진리의 근원에 부합하며 바라건대 …. 당(唐)나라 함통(咸通) 6년(865) 을유년 정월 일에 … 거사(居士)를 찾아 1,500여 명이 인연을 맺으니 금석(金石)과 같은 굳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써 힘든 줄 몰랐다.”

▲ 국보 제63호 도피안사 철로비로자나불좌상.  사진출처=철원군청 제공
▲ 국보 제63호 도피안사 철로비로자나불좌상. 사진출처=철원군청 제공

명문에서 보듯이 그들은 통일신라 말기의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미륵’을 희구하는 마음을 담아 이 사찰을 조성했다. 그런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까? 도피안사에는 비로자나불과 관련해 독특한 전설이 전해진다. 원래 도선국사는 이 불상을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암소를 끌고 옮겨가다가 지금의 화지리인 천황지 뒤쪽 암소고개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불상이 사라지는 변고가 생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일대를 샅샅이 뒤졌고 현재의 도피안사가 세워진 곳에서 불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철조비로자나불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彼岸)에 이르렀다’는 의미에서 ‘도피안사’라 지었다고 한다.

철원향교지, 태봉국의 2인자인 왕건의 집터

도피안사가 보여주듯이 당시 철원은 미륵사상을 신봉했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하지만 궁예가 너무 일찍 온 것일까? 아니면 감히 인간이 꿈꿀 수 없는 경지를 참칭(僭稱)했던 것일까? 미륵의 현신이라는 궁예가 가지고 있었다는 신비한 능력, 즉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觀心法)’은 그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독약’이 되었다. 결국 모여든 인재들은 태봉을 떠났고 궁예는 총애하는 부하인 왕건에게 쫓겨난 ‘패주(敗走)’가 되었다.

도피안사를 나와 보이는 맞은편 왼쪽 산자락 아래는 왕건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철원향교지’라고 알려진 이곳이 왕건의 집터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철원향교가 도호부 남쪽 3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본래 고려 태조가 궁예에게 벼슬하고 있을 때 살던 옛집’이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고려조의 고택이 지금은 향교가 되다(麗祖故宅今爲鄕校)”라는 시가 실린 이민구의 『동주집(東州集)』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지금 그곳엔 그와 같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 빈 터로 남아 있는 철원향교지
▲ 빈 터로 남아 있는 철원향교지

철원향교지엔 현재 왕건의 집터는 고사하고 공터에 잡초만 우거져 있다. 심지어 여기가 철원향교지였다는 사실조차 육안으로는 짐작하기 어렵다. 향교 건물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보육원이 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후 이곳은 월하초등학교 부속시설 용지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언젠가 있을 유적지 조사를 위해 시·도기념물 제87호 철원향교지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월하(月下)’라는 지명이 궁예의 역린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왕건이 자신을 ‘달’로 자처하면서, 그의 사저가 있는 마을을 ‘월하리’로 불렀다는 전설을 근거로, 이곳이 왕건의 집터라고 믿는다.

태봉국 도성 터, 휴전선이 가로지르는 남북분단의 현장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한반도 역사에서 전설처럼 사라진 중세의 어느 왕국에 대한 철원 사람들의 향수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궁예도성 터’는 이들의 향수가 신기루가 아닌 언제든 복원될 수 있는 ‘오래된 미래’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엔 수풀이 켜켜이 우거져 도성 터는 전쟁 이후 65년 넘게 묻혀 있다. 하지만 평화전망대 바로 옆에 설치된 ‘태봉도성 복원모형’을 보면 궁예가 꿈꾸었던 왕국의 웅장한 풍모를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천년왕조 신라처럼 태봉국도 천년 사직을 이어가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극적 영웅 궁예와 운명을 같이한 태봉은 ‘승자들이 쓴 역사’에 의해 너무나 무참히 잊혀졌다. 외성, 내성, 왕궁성의 세 겹으로 이루어져 견고하다던 도성은 겨우 10여 년을 지탱했을 뿐이다.

▲ 태봉국 도성 복원 모형
▲ 태봉국 도성 복원 모형
▲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태봉국 도성 터
▲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태봉국 도성 터

기존에 ‘궁예도성’으로 불리던 도성 터는 2005년 공식적으로 철원군에 의해서 ‘태봉국 도성’으로 정정되었다. 하지만 도성의 규모나 현재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아직 알 수 없다. 남북을 동서로 가르는 휴전선이 정확하게 태봉국 도성 터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엔 거대한 궁터와 부도 등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유적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본격적인 남북공동 조사가 진행되면 이 미지의 도성 터에 남북의 연구자들이 함께 발굴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는 DMZ 안에 있는 태봉국 도성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철원 태봉국 도성 조사자료집』을 발간했다. 현지조사와 일제강점기 자료를 모아 펴낸 이 자료집에 기록된 도성은 중국의 장안성(長安城)과 유사한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장방형(長方形)의 성벽을 갖춘 왕궁이다. 이런 궁성은 전북 익산의 왕궁리(王宮里)나 평양의 안학궁(安鶴宮)에서 이미 조사된 바가 있다. 여기서 추정된 도성의 크기는 외성의 둘레가 약 12,306m, 내성의 둘레가 약 7,656m이었다.

철책선이 가로지르는 도성 터를 바라보면 궁예가 도성의 배후로 삼았다는 북쪽의 고암산이 보인다. 오늘날 이 산은 남쪽에서 ‘김일성고지’라 불린다. 한국전쟁 당시 ‘철의 삼각지’를 놓고 치열하게 싸울 때, 김일성이 직접 내려와서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분단과 전쟁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에서 방치된 태봉 도성 터의 기구한 운명은 어쩌면 미륵의 세계를 꿈꾸다 스스로 파멸한 궁예의 운명과 닮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태봉의 도성은 현대의 발달한 복원 기술을 통해 ‘역사의 진실’이 드러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날’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적대의 경계선이 걷어지는 날이며 분단의 상처에 대한 치유가 시작되는 날이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