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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에서 귤은재 김유의 ‘둥긂(圓)의 실학’을 만나다 下
거문도에서 귤은재 김유의 ‘둥긂(圓)의 실학’을 만나다 下
  •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 승인 2019.02.25 22: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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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_ “무덤에서 삶을 생각하다” 3-② 청산도 ‘풀무덤’을 찾다
▲ 거문도 풍경
▲ 거문도 풍경

기정진의 도학(道學), 리(理) 중심 비타협 원리주의

기정진은 19세기 호남 유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조선 유학의 큰 주제의 하나인, 리(理)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주리론(主理論)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그의 학문은 ‘리(理)는 하나인데(一) 만물에 나뉘어져서(分) 각각으로 달라진다(殊)’는 ‘이일분수(理一分殊)’ 개념으로 집약된다. 그 내용은 리의 확고부동한 절대성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氣)의 활동을 축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논의(=主氣論), 리와 기의 동시적 활동을 축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논의(=理氣互發論)를 부정한다. 리는, 태양이 유일 절대로 빛나듯, 절대 확고한 주재성을 갖는다. 기정진은 말한다. “‘리(理)’의 존귀함은 비교할 수 없다(理尊無對)”, “리가 본체이고 작용이다(理體理用)”라고(「납량사의(納凉私議)」참조).

기정진이 내세운 리(理)라는 명분주의는 격동의 근대기라는 현실에 적극 개입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태동시킨다. 바른 것을 지키자는 ‘위정’은 성리학과 그 질서의 수호로, 삿된 것을 배척하자는 ‘척사’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사상의 배척으로 이어진다. 기정진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더불어 개화에 반대하는 수구적인 태도를 보인다. 앞서 든 전우의 간재학파도 이 계보에 속한다.

이들 위정척사 계열 학자 군상을 떠올릴 때, 비타협 원리주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스러움. 깡마른 늙은 꼰대 선비의 얼굴들. 예컨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 앞에서, 최익현 등 당시 의병 활동에 앞장선 유학자들이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우러러 존경하고 사서오경이나 섭렵하고 주(周) 나라 시대의 정치적 가르침이나 씹어대기를 일삼고 세상의 변천에 대응할 활동적인 능력이 없다”고 폄하하였다. “그들은 새롭게 불문(佛門)에 귀의한 중이 불경을 암송하는 것처럼 기존의 정해진 텍스트만을 암송하는 데에 머물러 초등학생들이 배우는 정도의 지식에 불과한 것”이라고까지 막말을 해댔다(春畝公追頌會, 『伊藤博文傳』下卷 참조). 최익현이 죽은 뒤, (대마도 유폐의 기록을 담은 한말의 의병장 임병찬이 쓴) 『대마도일기』를 읽고서 이토는 “포복절도(抱腹絶倒)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혹평하고, “한국 일류 유생이 이 수준이니 한국 유생이 고집 세고 사리에 어두우며 시세에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술회했다.

식민통치자 측의 안목은 그렇다 치고, 비타협 원리주의에 대한 우리 역사 속의 평가 또한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꼰대 기질의 깡마른 선비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스스로의 원칙과 철학에 철저한 것은 뒤떨어진 것인가. 비현실적인 것일까.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하찮은 것인가. 절조와 지조를 껌처럼 내뱉어 버리고, 이익과 권력에 아부하며 영혼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판을 칠 때,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비타협 원리주의자들이 정말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김유의 유학, ‘둥긂(圓)의 실학’

거문도에서 청산도(靑山島)로, 청산도에서 여호도(麗湖島)로 …. 섬에서 섬으로, 떠돌며 학문을 했던 김유. 기본적으로 그는 스승 기정진의 주리론-위정척사론을 이어받는다.

▲ 귤은당
▲ 귤은당

김유는 스승 ‘노사 선생 영전에 쓴 글’에서, 스승의 학문이 “오직 도학(道學)으로 근본을 삼았고, 도학이 담긴 서책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어서 “노사 선생께서 평소 강론하신 것은 무엇이었던가.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군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네. 임금이 (이런 이치를) 활용할 줄 몰라서 나라가 치욕을 당했다는 것이네. (스승은) 한 고을의 행정을 조금이나마 해봄직 했으나, 세속이 자신의 뜻과 다르다 하여 아예 문 걸어 잠그고 바깥으로 나오시지 않으셨네. 오직 일삼으신 것이 ‘우리의 길은 우리에게 있다(吾道在吾)’는 것이었었네”(「제노사선생문(祭蘆沙先生文)」). ‘오도재오(吾道在吾)!’ 김유 또한 섬에 살면서, 섬사람으로의 ‘자신의 길’을 갔다. 바로 그 자체로 도학의 실천이었다. 

그런데 그의 도학은 딱딱하고 엄격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기정진이 주장하던 ‘이일분수’라는 이론 형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 내용은 취향이 달랐다. 그의 사유에 특이하게도 ‘둥긂(圓)’의 이미지가 도처에 박혀있다. 그래서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자유롭다. 한마디로 둥글둥글하다. 어쩌면 이것은 내륙적 사유와 섬-바다의 사유 차이라 할까. 바다에서 살아가려면 현실적, 구제적, 구상적, 실제적일 수밖에 없다. 섬에서 섬으로 떠돌며 학문을 했던 그에게 철학은 붙박이 옷장 같은 엄격함이 아니라 바닷물에 떠서 흐르는 공처럼 이리저리 유동하는 탄력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왕복순환의 변화성, 원환의 유동성이 살아있다. 내륙 지역은 게르만 풍으로 무겁고 엄숙하고 흐릿하며, 고정적, 추상적, 이념적 사유가 두드러진다면, 섬-바다 지역은 라틴 풍으로 가볍고-발랄하고 투명하며, 유동적, 현실적, 실제적 사유를 보여준다. 수직적 정태성을 상징하는 산(山) 쪽이 아니라, 수평적 동태성을 상징하는 물(水) 쪽에 그는 위치해 있었다. 김유가 시 ‘안경(眼鏡)’에서, ‘둥글고 정결하여, 두 눈알을 환하게 한다(圓輪淨潔, 照雙明)’고 읊었듯, 그의 사유는 ‘원륜정결’이라는 말로 딱 들어맞는다. 

그는 ‘태극(太極)에 대한 설명’에서는 하나의 리인 태극이 만물로 갈라지는 ‘이일분수’ 논의를, 둥긂(圓)이라는 구체적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태극은 본연의 이치인 것이요, 이치는 본래 형체가 없는 것이니, 형체가 없다면 ‘둥글다 둥글지 않다’하는 것은 불가능한 논의이다. 그러나 이미 이치[理]라고도 하였고, 이미 궁극[極. 태극]이라고도 한 것은 천도의 이치가 원만하여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태극의 이치가 둥글기[圓] 때문에 천지의 형체도 둥글고, 천지의 형체가 둥글기 때문에 만물 이치의 형식이 둥글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의 형상이 모두 둥글고, 땅에서 자라고 는 나무와 풀[草木]들의 과실과 물고기와 새[魚鳥]의 알 하나하나가 또한 둥글게 생겼다. 이것은 모두 태극에 근본하여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춘하추동 사시(四時)의 순환, 오행(五行)의 번갈아 움직임도 하나의 범위(圈子)가 둥글기 때문이다. 둥근 뒤에 변할 수 있고, 변한 뒤에 사물을 이룬 것이다.”(하략)(「태극도설(太極圖說)」)

아울러 ‘알을 품은 닭[伏鷄]을 읊은 시’에서는, 어미닭이 품은 ‘알=계란’의 비유를 통해서 ‘태극(太極)-일리(一理)-이기(二氣)’를 읽어간다.  

“저 닭이 품고 있는 저기 저 달걀이
쪼그마한 옥색으로 모양새가 둥글구나.
그 가운데 그 뭣인가 없는 것이 아니고
태극(太極)의 참된 이치 이 속에 담겨 있네.
이기(二氣)가 뒤섞이고 참된 신묘함[眞妙]이 엉겨있네.
일리(一理)가 또렷이 융화[昭融]하여, 생명의 시원[生始]이 이뤄지네.”
(하략) (「복계행(伏鷄行)」) 

김유는 추상적 이치를, 구체적인 사물을 예로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해간다. ‘대나무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렇다. “손님이 묻기를, ‘대나무[竹]의 중심이 비어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답하기를, ‘대나무[竹]는 (주역의) 리괘(離卦: ?)의 형상과 같다. 음(陰) 한 획이 내부에 있기 때문에 내부가 비어있다. 비어있다는 것은 음효(陰爻: ??)의 2로, 짝수[偶]이다. …… 대나무[竹]의 재질이 내부는 비어있으면서도 외부는 튼튼하고, 내부 색깔은 희면서도 외부는 푸르며, 내부는 부드러우면서도 외부는 강직하다.’”[「죽설(竹說)」] 뿐만 아니라 ‘음양(陰陽) 승강(昇降)의 이치를 물음에 대한 설명’(「문음양승강(問陰陽昇降)」) 그리고 ‘밀물과 썰물’이라는 시(「조석(潮汐)」) 등에서도 둥긂(圓), 원환적 사유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김유의 유학을 ‘둥긂(圓)의 실학’이라 규정해도 좋을 듯하다.  

오리 모양의 잠수함 ‘부선(鳧船)’을 고안하다.

김유는 흥미롭게도, ‘오리 모양으로 생긴 잠수함 제작법’ 즉 부선제(鳧船制)를 남겼다. 『국역 귤은재문집』에서는, 원문에 근거하여 아래 그림처럼 친절하게 오리 잠수함의 상상도인 ‘부선도(鳧船圖)’를 재현하고 설명문을 달아두었다. 그림으로 보아서는 이순신의 거북선과 유사하기도 하다.

김유는 배가 오래되면 문짝 틈으로 물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에 ‘동판으로 해야 할 것’이라는 유의점도 적어두었다(「부선제(鳧船制)」).

김유의 『해상기문(海上奇聞)』: 러시아의 첫 외교문서

김유는 푸차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의 기항(寄港)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고, 사건들을 기록한 『해상기문(海上奇聞)』이란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문장이다. 다행히 『국역 해상기문: 러시아의 첫 외교문서(1854)』(세종대학교 출판부, 1988)가 이미 출간되어 있다.

김유가 28세 되던 해인 1842년, 영국 함대 베르체 제독이 와서 거문도를 탐사하고 포트 해밀턴(=해밀턴 항)이라 명명하고, 세계에 해도(海圖)를 선포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영토 확장의 야심으로 시베리아 점령, 흑룡강 진출, 우스리강 진출, 남극지방 진출 등 분주히 진출하며 기세등등해 있었다. 푸차틴 제독은 러시아 황제로부터 4척의 군함으로 극동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와 개항 및 국교 확장이라는 전권을 위임받아 크론시타트 군항을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1854년 4월 거문도에 도착했다. 그 때 김유는 만회(晩悔) 김양록(金陽錄)과 러시아의 함선에 올라,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는 야소회(耶蘇會) 아바큼 신부의 통역으로, 필담을 나누고 『해상기문(海上奇聞)』을 남겼다. 당시 푸차틴 제독은 김유 등에게 정중하게 러시아 황제가 조선 정부와 국교를 맺고, 통상을 하자는 내용의 국서를 건네며 조선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러시아 외교문서는 한·러 간의 첫 문서였다. 이렇게 막중한 문서가 일개 변방의 선비 김유에게 건네진 것은 아마도 그의 풍모나 인격에서 풍기는 신뢰감에서 나온 확신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 문서는 전달될 수는 없었고, 단지 『귤은재유고』 속에 남아 전해올 뿐이다. 조선의 조정은 폐쇄적이었던 데 비해 거문도의 김유 일행은 이미 개방적인 안목에서 당시 역사의 물결을 현실적으로 읽고 있었다고 추정된다(주영하, 「국역 ‘해상기문’ 발간사」, 김유, 『국역 해상기문: 러시아의 첫 외교문서(1854)』, 8쪽 참조).

주변부에서 국제적 ‘섬의 유학’으로

기우만은 김유가 세상을 떠나자 평생 그가 살아온 일을 적은 「행장(行狀)」을 짓는다. 그 가운데서 이렇게 말한다.

“고향으로 돌아간 뒤, 해마다 한 차례 씩 노사 선생을 찾아왔다. 간혹 두 차례 씩 찾아올 때는 8월 중순 경이었고, 40년을 똑같이 하였다. 문답한 어구를 몸소 순서대로 편찬하여 책을 만들어 섬(=거문도 등)의 제자 및 친구들로 하여금 경서[經]·자서[子]처럼 익히게 하여, 남쪽의 선비들이 친히 노사 선생의 깨우침을 받는 것 같이 하였다. 그래서 스승(=노사)의 도학이 해외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공(=김유)의 노력이었다. 지금까지도 섬 지역의 선비들로 하여금 노사 선생의 글을 읽도록 하고, 노사 선생의 말씀을 듣도록 한 것이니 공을, (진한 교체기의 경학자로, 구술로 경전을 전했다는 인물인) 복생(伏生) 같다 아니할 수 없다. 일찍이 교유하던 동문 또는 선배들은 공을, (남쪽 야만국 초나라 사람으로서 북쪽 문명국 주나라의 주공, 공자에 감화되어 간) 진량(陳良) 같다 아니할 수 없다.”

▲ 거문도 풍경(삼산면사무소 앞)
▲ 거문도 풍경(삼산면사무소 앞)

이것은 노사의 학문이, 김유를 가교로, 거문도 등의 섬사람들에게 전해진 공로가 큼을 지적한 말이다.
이어서 기우만은 말한다. “이때부터 명성이 외국까지 알려졌다. 이따금 외국인들이 바다를 건너 거문도에 도착하면, 반드시 김 선생께 문안한다 하여 문 앞에서 몸을 굽혔다. 이때 공의 학생들은 (외국인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바닷가에 도열하였다. 나도 볼 기회가 많았다. 모두가 행동이 질서 있고 삼감이 있어, 그 선생과 그 제자 됨을 알 수가 있었다.”

이렇게 김유는 유학의 중심에서가 아니라 거문도라는 주변부에서, 메이저 리그는커녕 마이너 리그 축에도 못 끼는 아웃사이더로서, 고향 거문도와 청산도 등지에서 떠돌며 제자를 기르던 야인으로서, 어엿한 국제적인 ‘섬의 유학’을 열어갔다. 그래서 곽영보는 지적한다. “외국인들은 김유와 그 제자들의 예절과 학문의 해박함에 감탄하여 종래 불러왔던 거마도(巨磨島)라는 이름의 마(磨) 자를 문(文) 자로 바꾸어 거문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주변부의 보잘 것 없는 한 선비가 유학을 연구하여 지명(地名)마저 바꿔 놓은 것은 김유의 놀라운 업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 우리나라의 유학사(儒學史) 속의 평가는 차치하고서 호남의 유학자 부류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그저 『한국인명대사전』에 몇 줄 기록돼 있을 정도이다”(곽영보, 「포의한사(布衣寒士) 귤은 김유 선생」, 김유, 『국역 해상기문: 러시아의 첫 외교문서(1854)』, 15쪽, 일부 문장 수정). 그러나 슬퍼할 일도 놀라워 할 일도 아니다. 항상 역사는 그랬다. 누군가 기억해주고 다시 발견하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 ‘눈 있는 자 보고, 귀 있는 자 들어라!’는 오래된 말은 지성사의 희망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거문도에서, “글 자랑 하들 말어!”

김유는 고향 거문도를 거점으로 장흥, 완도, 청산 등지를 돌며 후학을 길렀다. 이런 탓으로 이 지역의 유학이 지속되었다. 마치 그리스문명이 에게 해(Aegean Sea)에서 펼쳐지듯, 조선의 유학이 남도의 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 유학의 퇴락이 아니라 새로운 전망이었고, 색다른 개척이었다. 

김유 같은 섬의 유학자들 덕에 거문도에서 “글 자랑 하들 말어!”라는 말이 생겨났다. 클 거, 글월 문, ‘큰?대단한’ ‘문장?문장가’의 ‘섬’ 거문도라는 지명도 이런 배경 아래 정착해온 것이다. 그 중심에 김유가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조선 유학의 사명을 떠안은 탈레반들이었다.   나는 공부가 얕은 터라, 이러한 김유의 유학이 있었다는데 사실 좀 놀랐다. 아, 이 섬에 이런 유학, 유학자가 있었다니!

김유의 사당은 거문도 동도의 거문초등학교 동도분교장 뒤쪽에 있다. 그곳은 내륙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향취를 접할 수 있다. 이곳, 김유의 고향 유촌리에서, 아∼ 나는 김유가 어린 아이들을 앉혀 놓고 글 읽히던 소리를, 또렷이 듣고 있다.

말년에야 마을 아이들 습자 스승(習字師) 되었으니
등잔 아래 누워서 글 읽는 소리 듣노라.
어느덧 백발, 나 자신을 잊고 있었는데
소년 시절 아님을 이제사 알았네.(「청소아독자(聽小兒讀字)」)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 석·박사를 했다. 양명학 · 동아시아철학사상 전공으로 한국양명학회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등이,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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