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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삶
이반 일리치의 삶
  • 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19.02.25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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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단상_ 레프 톨스토이 (1828-1910)

새 달력을 달고도 또 한해가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카톡으로 들어온 문자 속에는 톨스토이에 관한 내용들도 많았다. 잘 아는 대로 위대한 문호이자 사상가이며 사회개혁가인 그는 러시아 정교의 권위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교회를 주장하며 끝없는 자기개조를 위해 투쟁한 사람이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는 그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의[이반의] 삶은 단순하고 무난하고 끔찍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늘 이 문장 앞에서 멈추게 된다. 단순하고 무난한 삶인데, 어떻게 끔찍할 수 있나. 이반의 죽음 앞에서 톨스토이가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이반이 살아온 삶이다. 그의 삶은 보면 볼수록 단순하고 무난하다기보다는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삶이다. 45세의 앞길이 보장된 판사, 좋은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의 지원을 받고 성실 근면한 그는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같은 계층의 매력적이고 지적인 여성과 결혼, 잘 자란 딸과 아들, 좋은 대인관계, 성공을 향한 정확한 방향감각, 그는 유능하게 고민 없이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고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카드놀이를 한다. 그의 취미와 소일거리는 늘 흠잡을 수 없이 절제가 있다.  그러니까 그는 햇빛 환한 잘 손질된 정원에서, 출세와 권력, 명예와 체면을 섬기며 살아온, 그러니까 완벽한 커리어리스트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왜, 작가는 그의 삶을 끔찍하다고 하는가? 그는 출세와 명예 이외의 것에는 시간과 관심을 쏟을 능력도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의 삶에는 어둠이나 고통, 그리고 갈등이 부재한 듯하다. 그의 주변에서 구질한 친척들이나 실패한 사람들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는 아내와의 불화를 피해 더욱 일과 카드놀이에 몰두한다. 그러니까 성공적인 사회적 삶이 전부인 그에게  삶에 대한 다른 태도, 다른 정서는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의 삶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과 공감, 이해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죽음소식에 자신의 또는 친척의 승진을 먼저 계산하고 카드게임이 취소될까봐 아쉬워하는 그들의 동료들처럼 그 역시 소심하고 이기적인 보통 사람,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삶의 우연성과 취약함이 그의 삶에서만 예외일 리가 없다. 그것은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새 아파트 치장에 몰두하여 커튼을 달다가 발을 헛디디고 문고리에 허리를 부딪친다. 아픈듯하다가 곧 잊혀졌지만 그것이 치명적이 된다. 톨스토이는 그의 삶이 지켜온 환한 조명 속의 삶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불이 꺼지자 어둠 속에 있는 것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반의 죽음 앞에서 그가 삶아온 나날들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실체를, 그리고 자기 삶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마주한다. 그를 시중드는 젊은 하인을 통해서 그는 처음으로 따뜻하고 진심어린 보살핌과 배려를 알게 된다. 그는 자기 속에서 평생 외면당한 어린아이가 되어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성공과 출세를 위해 그의 삶에서 배재된 것은 죽음으로 압축되는 삶의 한계와 연민과 이해, 이런 것들이다. 단순하고 평범하고 모범적인 그의 삶을 그래서 작가는 끔찍하다고 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회개혁과 인간의 영성에 대한 믿음. 그의 말년 작품 속에는 당연히 러시아 혁명이 감지되고 있다.
 

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영문학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하와이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인문대학장을 역임했고 저서로는 『서숙교수의 영미소설 특강』 시리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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