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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가정성’에서 ‘백인 남성의 분노’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가정성’에서 ‘백인 남성의 분노’에 이르기까지
  • 설혜심 연세대 · 사학과
  • 승인 2019.02.25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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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역사_ 20세기 영국사 연구의 발자취_ 6. 서구 남성사(男性史) 연구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하자 사람들은 그 뜻밖의 결과를 불러온 주체로 ‘분노한 백인 남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노한 백인 남성과 그로 인한 파장은 이미 1990년대부터 남성사 분야에서 예고했던 개념이었다.

▲ 2016년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불리는 분노한 백인 남성 지지자. 사진출처=thehagueonline.com
▲ 2016년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불리는 분노한 백인 남성 지지자. 사진출처=thehagueonline.com

역설적일 수도 있지만 남성사(남성성의 역사, History of Masculinities 라고도 한다)는 페미니즘과 여성학, 나아가 여성사의 영향으로 인해 탄생한 분야다. 1960년대 후반 여성사는 여성을 배제해 온 역사 속에서 여성을 되살려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1980년대가 되면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사회적 구성물인 젠더를 탐구의 중심에 놓는 변화가 일어났다. 젠더연구는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그 대립쌍인 남성을 주목하는 남성연구(Men’s Studies 혹은 Masculinity Studies)를 촉발했고 그 맥락 속에서 남성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남성사는 젠더적 존재로서의 남성을 역사성을 통해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이라는 젠더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구성물이며 시대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전제가 깔려있다. 또한 남성성의 구성과 변화가 여성성을 의식하며 반응해왔음을 주목한다. 그런데 남성사는 여성사에 비해 전통적인 역사서술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과거의 ‘보편사’가 언제나 남성을 일반적인 주체로 내세웠고 역사에서 다루었던 모든 중요한 사안들이 이미 정형화된 남성성과 강하게 연결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사의 문제의식은 전통적 역사학이 백인, 지배집단, 이성애자의 조합인 일부 남성만을 대변해 왔다고 비판하면서 그들이 내세운 이상적인 남성성이 오히려 많은 남성을 주변화시켰음을 강조한다.

초창기 남성사는 전통적 역사에서 소홀하게 다뤄져 왔거나 여성사에서 ‘여성의 주제’로 부각한 가족, 결혼, 육체, 섹슈얼리티 같은 주제를 적극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남성사의 출발이 페미니즘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특히 여성사가 ‘별개영역 이데올로기(separate-sphere ideology)’를 통해 가정에 묶인 여성의 대척점으로 차갑고 권위적인 남성의 전형을 설정했다고 비판하며 일반적 역사서술에서 누락되어온 ‘남성의 가정성’을 되살려내고자 했다. 존 토시(John Tosh)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에티켓 매뉴얼, 이혼기록, 일기, 편지 등을 분석한 『남성의 자리(A Man’s Place)』(1999)를 통해 중간계급 남성들에게 공적인 삶만큼이나 가정생활도 중요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리사 윌슨(Lisa Wilson)의 『남자의 마음(Ye Heart of A Man)』(1999)도 평범한 남성들의 삶을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식민지 시대 미국 동부에 살던 남성들이 청년기를 거쳐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삶을 꾸려가는 과정, 은퇴 후 혹은 홀아비로 남았을 때의 말년까지를 생생하게 재구성한 일종의 집단 생애사다.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남성다움은 생산적인 직업, 시장,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책무가 그 핵심이었는데, 윌슨이 파악하기에 그런 남성의 삶과 정체성이 형성되던 무대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가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접근법은 남성사가 여성사의 ‘남성판’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여성사가 맞닥뜨렸던 한계와 비슷한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었던 것이 모든 남성성을 단일한 권력 패턴으로 본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으로 나타난 것이 ‘복수의 남성성(multiple masculinities)’ 개념이다. 단일한 남성성을 지양하고 여러 종류의 남성성을 가정하며 그들 사이에 분명한 위계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1987년부터 코넬(R. W. Connell)이 발전시킨 ‘헤게모니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 이론을 꼽을 수 있다. 그람시의 용어를 차용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란 권위, 육체적 강인함, 용기, 명예와 같이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남성성의 이상(ideal)을 일컫는다. 이를 중심으로 공모적 남성성(complicit masculinity), 대항적 남성성(competitive masculinities), 저항적 남성성(protest masculinity) 등 다양한 관계가 성립하며, 위계적으로 가장 아래에 종속적 남성성(subordinated masculinity)이 설정되는데, 동성애적 남성성이 이에 속한다.

▲ 영국의 대표적 사립학교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의 모습
▲ 영국의 대표적 사립학교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의 모습

마이클 로퍼(Michael Roper)와 토시가 펴낸 『남자다운 권리행사(Manful Assertions)』는 19세기 영미권에서 복수의 남성성이 조직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려낸 연구로 볼 수 있다.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였던 영국의 사립학교(public school)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수련장이었다. 엄격한 위계와 의식화된 코드, 계율과 질서의 총 본산인 사립학교에는 명문화된 상하 관계가 존재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린 소년들은 힘 있는 사람의 보호를 늘 필요로 했으며, 카리스마 있는 동료를 열렬히 추종하는 영웅 숭배적 현상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단합하고 저항하는 ‘대항적 남성성’을 창출하기도 한다.

이런 사립학교는 결과적으로 형제애로 포장된 배타적인 엘리트 집단을 만들어 냈고 심지어 비밀결사적인 요소까지 띠게 되었는데, 그곳으로부터의 퇴학은 곧 남성성의 추락과 사회적 실패를 의미했다. 학자들은 이런 남성적인 헤게모니가 여성의 정복 혹은 예속에 의존하며 대타적으로 생성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따라서 남성으로만 구성된 이 공간에서 여성적 행동을 집요하게 캐내고 풍자하는 정교한 의식이 발달했는가 하면, 성적 지배력을 둘러싼 그로테스크한 판타지가 넘쳐났다. 남성성 담론과 실천의 기제들은 비단 남성 집단 내에서만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위계에 따라 여성과 약한 남성, 청소년과 노년층, 유색인종 등의 타자를 주변화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확장되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앤더슨(David Anderson)은 19세기 아일랜드에서 대 기근과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국이 어떻게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통해 대응했는가를 분석했다. 이 시기 영국의 엘리트들은 합리적이고 남성다운 자신들과 달리 아일랜드 남성이 비합리적이고 허풍이 심하며 ‘여성적’ 감성을 가진 ‘열등한’ 족속이라고 비하했다. 마리나리니 신하(Mrinalini Sinha)의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 또한 제국주의적 맥락에서 영국의 자기 우월적 남성성이 작동하던 방식을 탐구한 연구다. 1883년 영국 의회에서는 식민지에 거주하던 영국인이 영국인 판사에 의해서만 재판받는 특전을 폐지하자는 일버트 법안(Ilbert Bill)이 상정되었다. 많은 영국인은 감성 과잉의 ‘계집애 같은’ 벵갈인과 자기 통제적이고 남성적인 영국인을 대비하는 담론을 양산해 내며 이 법안에 반대했다.

코넬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많은 연구의 길잡이 역할을 했지만, 곧 이 이론에 내재한 여러 문제가 지적되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이상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남성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엄청난 사회적 권력을 쥔 사람들조차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요소들을 갖추지 못했음이 드러나면서 이 이론의 근거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코넬은 실제 남성의 삶과 반드시 긴밀하게 부합하지는 않더라도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조형될 수 있다고 항변하면서 오히려 이런 모델들이 광범위하게 퍼트리는 이상과 판타지, 욕망을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 영국 엘리트 양성소인 사립학교의 학생들. 사진출처=Daily Telegraph
▲ 영국 엘리트 양성소인 사립학교의 학생들. 사진출처=Daily Telegraph

코넬은 최근 지구적 시장의 탄생과 그에 부응하는 세계정치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경제의 탈규제화로 인해 경영자와 기업가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들이 지구경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넬은 그것을 ‘초국적 비즈니스 남성성’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 신자유주의 시장의 의제에서는 젠더가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여전히 젠더화된 이 세계에는 암묵적인 젠더 장치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남성연구는 특히 1990년대에 크게 발달하게 되는데, 그것을 촉발한 것은 ‘남성성의 위기(crisis of masculinity)’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20세기 말부터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확대되고 경제적 재구조화, 임금하락이 동반되었다. 또한 기혼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활발해지고 페미니즘이 조직화하는 한편 게이 해방운동 등 소수자 권익을 둘러싼 사회운동이 일어났다. 학자들은 이런 움직임이 불러온 백인·중산층·이성애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이 남성성 자체에 위기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 마이클 키멜의 저서 「분노한 백인 남성(Angry White Men)」의 표지
▲ 마이클 키멜의 저서 「분노한 백인 남성(Angry White Men)」의 표지

그런데 역사학에서는 남성성의 위기가 나타난 시점을 보다 다양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인을 탐구하는 한편, 위기로 인해 오히려 남성성이 강화되게 되는 역설적 결과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린다 샤이어스(Linda M. Shires)는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강한 남성성 신화를 주목한 바 있다. 군왕의 자질이 부족했던 조지 4세와 윌리엄 4세의 통치, 게다가 1837년 어린 빅토리아의 왕위 등극으로 이어지는 1830~40년대는 영국사회에 남성성을 둘러싼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1832년 선거법 개정안과 여권운동, 복음주의 신앙의 부흥, 노동 쟁의, 공교육의 대중화, 직업 전문주의에 대한 인식의 등장은 사회적 위계질서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룩한 자본주의와 구시대적 체제 사이의 균열이 가시화된 것이다.

샤이어스는 이런 혼란 속에서 “정력적이고, 현명하며, 믿음직한 아버지 상이 필연적으로 당대의 문화적 요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강인하며 강력한 가부장적 남성의 모습은 곧 영국본토를 넘어 식민지에도 투사되었다.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 ‘영국 신사’는 곧 국내적으로는 차별화된 성별과 계층의 영역을 유지하고, 국외적으로는 계급에 의거한 인종과 계층의 서열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한편 리오 브로디(Leo Braudy)는 『기사도에서 테러리즘까지: 전쟁과 남성성의 변화(From Chivalry to Terrorism)』에서 강력한 남성성의 등장을 전쟁의 위협과 연결했다. 특히 1890년대는 유럽 제국의 프로파간다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전쟁의 위협이 커져간 시기였다. 그 이전에도 전쟁은 양 젠더에게 자신의 역할에 부합하는 ‘미덕’을 요청했지만 이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날카로운 젠더 구분선을 장려하게 되었고,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이자 이끌어가는 주체로 오로지 남성만이 강조되었다. 브로디는 그런 현상이 가장 대규모로 또한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된 사건이 1차 세계대전이었다고 본다. 참혹한 대전 후 남성의 명예에는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는데, 그 결과 “남성과 남성의 시민 정체성 사이, 그리고 남성과 남성성 사이의 관계들이 전례 없이 노골적인 화두로 대두”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가 특히 남성의 정체성을 더 날카롭게 연마하는 일환으로 성별을 분극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마이클 키멜(Michael Kimmel)은 남성성의 위기가 특정 시점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보다는 항상 계속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성성이란 것이 사실 결코 완벽하게 제시되거나 해결될 수 없고, 심지어 끊임없는 의심의 대상이라서 지속적인 확인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키멜은 『미국의 남성성(Manhood in America)』을 통해 역사적으로 미국의 남성성이 어떻게 발생하고 변천해 왔는가를 추적했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남성성의 위기가 최초로 발생한 시점을 19세기 초로 꼽으며 그 이유를 산업화로 인해 농업중심적인 전통적 질서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인들은 이제 요동치는 시장경제 속에서 훨씬 덜 안정적이지만 잠재적으로 보상이 더 큰 경제적 성공에 남성성을 투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분노한 백인 남성을 주제로 삼은 영화의 효시로 알려진 「폴링 다운(Falling Down)」(1993)의 한 장면
▲ 분노한 백인 남성을 주제로 삼은 영화의 효시로 알려진 「폴링 다운(Falling Down)」(1993)의 한 장면

산업화와 미국 경제의 관료체제화, 그리고 서부 프론티어의 유혹은 미국인에게 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과 기회를 제공했다. 위기감을 느낀 남성들은 골드러시를 맞아 캘리포니아로 몰려갔다. 또한 여성이 공격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남성들 사이에는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소년들을 ‘진정한’ 남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보이스카우트의 열풍,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 이상 카우보이가 중요하지 않은 시점에 카우보이 신화가 고양되면서 말달리고 총을 쏴 대는 남성성이 전파된 것도 그런 위기감에 대한 반작용이다. 키멜은 심지어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활약을 멈추지 않았던 수많은 형제회나 KKK 등도 남성성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보면서 1차 세계대전의 열광적인 참여 또한 문화의 ‘여성화’와 ‘허약화’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남성성을 끊임없는 확인과정으로 본 키멜은 지난 두 세기 동안 미국 남성들이 ‘자수성가한 남자’로서의 이상에 근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말한다. 그 치열한 노력은 사실 숨겨진 불안감과 함께 지속하여온 것으로, 그 불안이 결국 분노로 바뀌게 된 과정을 그려낸 연구가 『분노한 백인 남성(Angry White Men)』이다. 키멜은 분노한 백인 남성들이 인종적·성적 소수자, 정부의 관료, 페미니스트 등을 표적으로 삼으며 미국의 쇠퇴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이런 분노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남성들 스스로가 남성적 본질에 관한 감각을 버려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으로, 그의 말을 빌리자면 “평등은 어떤 제로-섬 계산에서 남자들에게 ‘손실’이 아니다: 그것은 윈윈(win-win)이다.”
 

설혜심 연세대·사학과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양 근대 사회사를 전공했으며 문화사와 젠더사에도 관심이 많다. 연세대 인문학부장, 연세춘추 주간을 역임했으며 현재 영국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도 만드는 사람: 근대 초 영국의 국토, 역사, 정체성』, 『그랜드 투어』, 『소비의 역사』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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