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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해야 할 보수의 품격과 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
수호해야 할 보수의 품격과 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
  • 정홍섭 아주대·다산학부대학
  • 승인 2019.02.25 2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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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에필로그_ 『에드먼드 버크 보수의 품격』 (에드먼드 버크 지음, 정홍섭 옮김, 좁쌀한알, 2018.12)

“존경받는 곳에서 자라고 어릴 때부터 저급하고 지저분한 것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대중의 눈으로 검열과 감사를 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일찍부터 여론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러한 수준 높은 토대 위에 서 있음으로써 큰 사회의 인간과 공적 문제의 광범하고 무한히 다양한 조합 양상을 폭넓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읽고 성찰하고 대화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어디에 있건 지혜롭고 학식 있는 사람들의 경의와 관심을 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군대에서 명령하고 복종하는 데 익숙해지고, 명예와 의무를 추구할 때 위험을 무시하도록 배우고, 어떤 잘못도 처벌 없이 넘어가지 못하고 가장 사소한 실수도 가장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상태에서 최고 수준의 조심성과 통찰력과 신중함이 몸에 배도록 교육받고, 동료 시민이 가장 염려하는 문제들의 교사로 여겨지고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 행동한다고 생각하면서 신중하고 단정한 행동을 하고, 법과 정의의 집행관으로 채용되어 인류에게 처음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 중 하나가 되고, 과학과 인문학과 순수예술의 스승(professor)이 되고, 사업에 성공하여 예리하고 원기 왕성한 이해력이 있고 근면, 질서, 꾸준함, 조화로움의 미덕을 지니고 있으며 교환의 정의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고 여겨지는 부유한 상인이 되는 것, 바로 이러한 것들이 제가 말하는 자연적(natural) 귀족을 형성하는 상황이며, 이런 자연적 귀족이 없는 국가는 없습니다.”

▲ 에드먼드 버크(1729-1797)
▲ 에드먼드 버크(1729-1797)

『신 휘그가 구 휘그에 올리는 호소』(1791)의 한 대목이다. 상당히 긴 한 단락의 이 문장에는 서구 근대 보수주의의 원조로 인정받는 에드먼드 버크가 생각한바 명예혁명(1688) 이래로 영국 헌정 체제의 전통을 떠받쳐 온 세 기둥, 즉 군주제와 귀족제와 민주주의 가운데 핵심인 귀족(제)의 조건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요컨대 영국은 이런 품격을 갖춘 귀족들이 다스려 온 나라라는 것이다(명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런 의미에서 버크에게 영국의 군주는 영국 헌정의 상징적 중심이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평생 휘그당 정치인으로 성장한 사람으로서, 명예혁명을 주도한 자신의 백 년 전 휘그당 선배 정치인들을 자랑스러워한 버크가 당대 자당의 지도적 정치인들과 대립하게 된 것은 그들이 프랑스혁명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버크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사기, 폭력, 신성 모독, 가족의 대대적인 파괴와 몰락, 한 위대한 나라의 자부심과 정수의 이산과 망명, 무질서, 혼란, 무정부 상태, 재산 침해, 잔인한 살해, 비인간적 몰수, 그리고 마침내 잔학하고 흉포하며 무감각한 사교 단체들의 무례한 지배”로 스스로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다. 버크가 거의 혈혈단신으로 영국 헌정의 결사 수호를 외치며 쓴 책이 바로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1790)이고, 과거에 그의 정치적 동료였던 토머스 페인이 그것을 비판한 것이 유명한 『인권』 1부(1791)이다. 이른바 팸플릿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페인의 비판을 받고 버크가 곧바로 펜의 전열을 가다듬어 발표한 책이 바로 『신 휘그가 구 휘그에 올리는 호소』이고, 페인 역시 곧바로 이를 재반박하는 『인권』 2부(1792)를 출간한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알려진 에드먼드 버크는 정작 보수 또는 보수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영국의 보수당도 버크 사후에 만들어진 당이다). 보수라는 개념이 자명하지 않은 것처럼, 유구한 세월을 거치며 아무런 역사의 우여곡절 없이 자명한 것으로 인정된 보수의 가치는 없다. 요컨대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던진 충격에 대응하면서 보수해야 할 자국의 진정한 전통에 관해 깊이 사유하게 되었고, 이것이 근대 보수주의론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버크가 주장하는 바의 설득력 정도는 일단 차치하고 볼 때, 프랑스혁명의 부정성을 극렬히 비판하면서도 위 인용문에서 보듯 자신들이 수호해야 할 (귀족제의) 품격과 적극적 가치를 명료하고 자신감 있게 제시하는 18세기 말 버크라는 거울에 비춰본다면, 분야를 막론하고 오늘날 한국의 ‘보수’는 어느 수준의 품격을 스스로 지니고 있으면서 어떤 보편적 · 긍정적 가치를 명징하게 제시하고 있는가?

버크 보수주의 경제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는 또 한 편의 논문 「궁핍에 관한 생각과 세부 고찰」을 포함하여 『에드먼드 버크 보수의 품격』에 담긴 두 편의 글은 이번에 한국어로 처음 번역되었다(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번역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일본에서도 이 두 편의 글은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 ‘보수’에 관한 성찰의 담론을 조금이라도 깊어지도록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정홍섭 아주대·다산학부대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 『채만식 문학과 풍자의 정신』, 『소설의 현실 비평의 논리』, 편저로 『채만식 선집』, 『원본비평정본 탁류』, 역서로 『코페르니쿠스: 투쟁과 승리의 별』, 『상상력과 인지학』,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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