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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진단]비상등 켜진 이공계 실험실 안전 문제
[과학진단]비상등 켜진 이공계 실험실 안전 문제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7.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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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판 연구실.. 열악한 환경에 안전불감증

1997년 ㅊ 대 이 아무개 교수는 곤란한 경험을 했다. 실험실에서 여자 대학원생이 얼굴에 2도 화상을 입은 것. 자연발화된 에탄올 때문이었다. 사고발생 당시 근처에 소화기가 3대나 있었지만, 학생들은 이것을 사용하지 못했다. 학생과 학부모가 형사·민사 소송으로 보상을 요구했다. 당시 대학은 교수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었지만, 재판결과 대학과 교수가 함께 사고의 책임을 분담하고, 각각 50%씩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이 모든 결론이 나기까지에는 자그마치 3년이 걸렸다.
국내 대학의 실험실이 시한 폭탄과 같다는 진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99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의 폭발사건, 지난 5월의 한국과학기술원 우주항공공학과 대학원생의 죽음 등 언론을 통해 부각된 대형사고에, 통원·입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안전사고까지 보탠다면 실험실은 그야말로 사건사고의 현장이다. 문제는 이같은 상황이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 예방교육 전무
 
실험실 사고가 빈번한 이유는 분명하다. 적절한 예방과 후속 처리가 없기 때문. 실제로 각 대학의 이공계 실험실을 둘러보면, 위험 요소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소방호스를 확보하기조차 힘들만큼 각종 실험기계·시약들이 복도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 다반사. 화재가 발생한다면 대피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한 대학의 화학과 교수는 "위험한 시약을 보관해 놓는 냉동고에 열쇠조차도 없다"라고 고백했다. 여러 명이 사용하기 때문에 열쇠가 있으면 불편하다는 게 이유다. 안전 사고 교육여부에 대해 "1년에 1번 정도 소화기의 위치와 사용법 정도만을 공지하고 있다"라고 대 말하는 교수도 있었다.


이처럼 실험실 안전이 방치된 가장 큰 원인은 두 가지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는 "연구 환경의 열악함"을 원인으로 꼽았다. 학생수와 기자재에 비해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험 기자재들이 복도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연구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건물을 추가로 짓거나, 전문 안전관리 인력을 고용하는 방안들은 상당한 예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다. 공학의 메카로 불리는 몇몇 학교들이 장소에 비해 학생수와 기자재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대형사고의 위험이 높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고를 경험한 ㅊ 대의 이 교수는 "안전교육 및 의식의 부족"을 원인으로 꼽았다. 사고 당시 소화기만 사용했어도 학생은 안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외국의 경우 안전교육 학점을 이수하지 않으면, 연구실에 들어올 수 없다"라며 "안전교육용 비디오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거나, 안전교육 수업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에서 대학에서 안전교육을 필수과목으로 진행하는 곳은 없다.


사고 이후 조치도 허술한 편이다. 대형사고가 발생한 이후 대부분의 대학들이 취한 조치는 보험에 가입하는 정도였다. 안전교육 강화나 실험실 환경 개선 등은 극히 미미한 수준. 그나마 최근에는 많은 대학들이 경영자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고 있어, 대형사고의 경우 피해자들에게 보상액을 지급하고 있다. 경영자배상책임보험은 공장·기업 등에서 기자재 등에 의해 인적·물적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해 만든 보험으로, 대학마다 보상 범위는 다르다. 그러나 학생들은 어떻게 보험처리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교수와 실험기자재에 대해서는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속기관의 무관심이 사고 키워

그렇다면 대학의 실험실 사고를 책임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교육부 교육시설담당관실의 유기현 씨는 "대학에서 발생하는 모든 안전사고의 책임은 기관장 및 책임자에게 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국가 차원에서 제시하고 있는 안전규제는 아무 것도 없다. 1999년 서울대 폭발사고 이후 교육부에서 '실험실 안전관리 지침'을 각 학교로 내려보내기는 했지만, 말그대로 지침서에 불과했을 뿐 강제성은 없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차원에서 실험실 안전 점검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현재 사고의 책임을 떠맡고 있는 사람들은 연구실의 '책임연구자'들이다. 국가와 대학 어느 곳에서도 실험실 안전 관리를 보장해 주지 못하면서, 사고 발생 이후 책임은 교수급인 책임연구자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미국 대학의 경우 대부분 안전센터와 수십명의 안전요원을 확보하고 있다. 노스웨스턴대는 철저한 안전관리로 유명한 학교다. 전기·화재에 대한 일상점검은 물론이고, 유독가스를 다루는 사람들은 연 1회 8시간씩 의무적으로 안전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미국 대학이 이렇게 안전에 신경을 쓰는 것은 사고로 소송을 당할 경우 거액의 보상비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험실 사고의 책임을 상당부분 학교가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과학기술원의 폭발사고 이후, 조속한 원인규명과 학교의 공식입장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다. 사고 발생 후 두 달이 지났지만, 대학에서는 아무런 내용을 밝히기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국과학기술원 홍보과의 윤달수 씨는 "검찰 수사 결과가 이제 막 나왔다"라며 "수사 결과를 토대로 보험회사와 처리할 문제이기 때문에 학교측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혼선을 빚을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안전사고 처리에 대해서 대학이 한발짝 물러서 있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는 "현재로서는 솔직히 실험실 안전문제의 대안은 없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안전관리를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 증액이 필요한데, 정부와 대학은 수수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교수의 무한 책임' 같은 제도 안에서는 더 이상 이렇다 할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정부와 대학, 연구자들의 역할을 다시 고민하지 않는다면, 대학실험실 안전은 여전히 살얼음판 위에 있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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