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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 자체가 인문학 위기 불러
인문학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 자체가 인문학 위기 불러
  • 고현석 기자
  • 승인 2019.02.19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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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학술동향_ 사망 선고 받은 인문학, 탈출구는 정말 없나

인문학은 단순히 죽어 가고 있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인문학은 이미 거의 죽은 상태라는 지적이 최근 들어 전 세계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위기 차원을 이미 넘어선 인문학을 부활시킬 방법은 없을까.

미국 정치 전문 계간지 <아메리칸 어페어스(American Affairs)> 최근호에 따르면 지난 몇십 년을 거치면서 스코틀랜드에서만 고대 인문학 연구 분야 교수들이 거의 모두 사라진 상태다. 관련 학과는 폐지되거나 다른 과에 흡수됐다. 영국의 자존심인 옥스퍼드 대학은 수백 년 동안 명성을 유지하던 리테라이 후마니오레스(Literae Humaniores, 고전 인문학) 과정을 실용 학위 과정과 비슷한 과정으로 최근 개편했다.

▲ 영국 옥스퍼드 대학 전경(출처: 홈페이지). 옥스퍼드 대학은 수 백 년 동안 명성을 유지하던 고전 인문학) 과정을 실용 학위 과정과 비슷한 과정으로 최근 개편했다.
▲ 영국 옥스퍼드 대학 전경(출처: 홈페이지). 옥스퍼드 대학은 수 백 년 동안 명성을 유지하던 고전 인문학) 과정을 실용 학위 과정과 비슷한 과정으로 최근 개편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이 두 과정은 흔히 인문학으로 부르는 학문을 거시적으로 통합하고 조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세계 인문학의 마지막 남은 보루’였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에딘버러 대학교수를 역임한 저스틴 스토버는 ‘흔적 구조(vestigial structure)’의 위상을 겨우 유지하던 이 두 과정의 소멸은 인문학이 르네상스 시대 대학들의 인문학적 교육과정에 기원적인 연결성만을 간신히 유지한 채 기술적인 학문의 느슨한 연합체로 다시 정의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스토버에 따르면 인문학 소멸의 원인은 학문 자체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이는 현재의 학계 상황에서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21세기 대학의 총장과 학장을 비롯한 중요한 보직 교수들 대부분이 그리스어 동사 변화보다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사례연구를 더 중시하고 있으며 문학의 풍부함보다는 경영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상황이다. 인문학 연구에 의미를 부여할 ‘힘 있는’ 교수들의 부재가 원인이라는 뜻이다.

인문학 위기에 대한 지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문학 부활’ 문제는 이런 위기 상황이 현재의 정치적인 분열과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상대적으로 간과해왔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스토버의 지적이다. 이들 정치적 세력 중 가장 대중 노출이 많이 되는 쪽은 인문학을 거칠게 비판하는 세속적인 보수 세력인 반면, 전통적인 인문학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은 보통 정치적인(또는 종교적인) 보수 세력이다.

인문학을 옹호하는 좌파들은 기업 중심의 천박한 경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문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좌파의 일부는 가부장적, 인종적, 제국주의적 시각에 의해 오염된 상태다. 이들은 ‘쓸모없는’ 학문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공격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효과적인 방어책을 만드는 데는 사실상 거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우파의 인문학 옹호 세력은 인문학의 전통적인 가치를 원칙으로 중시하지만, 이들 역시 인문학에 대한 공격에 실제적인 방어벽을 구축하는 데는 계속해서 실패해왔다. 현재 인문학의 비극은 이 정치세력이 좌우를 초월한 화합이 아닌 양쪽에서 모두 곤란해 하는 ‘뜨거운 감자’를 밀어냄에 따라 그 두 세력 사이에서 와해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스토버는 언어, 숫자, 미술, 문화, 자연에 대한 탐구, 즉 인문학이야말로 대학이 처음 세워진 이유이자 현재의 존재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고전적인 주장에 목소리를 더한다.

인문학 위기에 대한 치료 과정으로 제안된 방법은 위기 자체보다 더 지난하며 더 큰 고통을 수반한다. 현재의 번영을 이루게 만든 조건 자체들을 파괴해 인문학을 구해야 한다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분야의 학자들이 고문서를 연구하고 학술 저널에 난해한 논문 발표를 하는 일을 멈추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만 시간을 쓴다면 결국은 대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스토버는 이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인류 사회는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은 갖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토버는 인문학과 대학 모두 옹호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대학이 존재하는 동안 언제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옹호 세력이 존재해온 것도 사실이다. 스토버는 “인문학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제로 그 질문에 대해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 것조차 쓸모없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인문학을 옹호할 명분을 찾을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학의 필요조건인 인문학은 인류와 함께 계속해서 번창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낯설지만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고현석 기자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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