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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들뢰즈 철학 연구의 분수령
일본 들뢰즈 철학 연구의 분수령
  • 이규원 인제대 . 인문의학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9.02.13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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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에필로그_ 『존재와 차이: 들뢰즈의 선험적 경험론』 (에가와 다카오 지음, 이규원 옮김, 그린비, 2019.01)

한국에서 들뢰즈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 지 사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그의 작품은 거의 전부 번역되고 이제는 재번역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의 이름을 내세운 논문과 단행본이 쏟아졌고, 현대 철학자로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기를 끌었다. 크고 작은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으며 특히 2015년에는 서거 2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학회와 강연이 성황리에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풍의 이면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성급한 원용이 적지 않고, 무엇보다 연구 대부분이 형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현대 프랑스 사상에 정통한 일본 철학계의 중진 히가키 다쓰야(檜垣立哉)는 몇 년 전 일본의 상황을 “단순한 소개, 혹은 정치 및 예술에 대한 일종의 (솔직히 말해서 대체로 조잡하고 엉성한) 적응에 그치거나 단지 슬로건으로서 소비”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위의 문제가 비단 한국만의 허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가와 다카오(江川隆男) 등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이라는 단서를 그 앞에 붙였다. 에가와가 2003년에 내놓은 『존재와 차이: 들뢰즈의 선험적 경험론』을 염두에 둔 말이다.

▲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 사진제공=그린비출판사
▲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 사진제공=그린비출판사

본서는 일본에 들뢰즈가 소개된 지 30여 년 만에 출현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들뢰즈 철학 연구이자 일본 철학계의 특필할 만한 ‘사건’이라 평가받는 저작이다. 에가와가 명료하게 제시하는 과제는, 들뢰즈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선험적 경험론’과 차이의 사유 및 긍정에 불가결한 ‘존재의 일의성’을 종합하여 초월적 규범을 가진 ‘모랄’을 비판하고 하나의 ‘에티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이론 전개를 위해 그는 들뢰즈 사유의 총체를 시야에 두면서도 전기 주요작인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를 특히 중요하게 다룬다.

저자에 따르면, 들뢰즈의 ‘잠재성의 철학’은 ‘현실화’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데, ‘현실화’만을 고찰하면 ‘기초짓기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근거짓기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전개하는 사유, 잠재성이라는 선험적 권역을 하나의 동적 발생으로 파악하는 사유, 즉 ‘반-효과화’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반-효과화’의 운동이야말로 영원한 비종속을 위한 선험철학인 것이다. 그는 나아가 공통개념의 ‘형성의 질서’와 능력들의 ‘초월적 실행’을 끌어들여 ‘반-효과화’의 실재성을 공고히 한다.

에가와는 바람직한 철학적 연구란 텍스트로부터 ‘긍정되어야 할 것’을 표현적으로 확대해가는 과정이며 하나의 글쓰기로 변용하고 철학함 그 자체로 생성·변화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던 ‘반-효과화’론을 들뢰즈 철학의 ‘긍정되어야 할 것’으로서 포착하고, 칸트와 스피노자의 철학을 양립시켜 ‘비판’과 ‘임상’을 아우르는 체계를 긴밀하고 정연하게 구축한 이 저작은, 바로 저자 자신의 이상을 추구한 하나의 글쓰기이자 들뢰즈 철학을 독창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킨 그 자신의 철학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중견 철학자들의 활약이 이어지고 또 그에 촉발된 새로운 세대가 약진을 거듭하고 있으니 히가키의 염려가 조금씩은 해소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에가와의 본 저작이 이러한 변화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은 ‘들뢰즈 이후’ 철학의 문제의식을 안고 있는 역자의 번역 동기가 되었다. 대중성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그의 철학은 다소 난해하고 때로 가혹하기까지 하지만, 그만큼 일독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재독, 삼독해도 의미가 불분명하다면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이다. 미약하게나마 어떤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규원 인제대·인문의학연구소 연구원

KAIST 생명과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 인문의학교실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의대, 교토대 의학부 등에서 일본 근대의학사를 연구했으며, 소운서원에서 일본 근대철학 및 프랑스 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번역서로 『과학과 가설』(공역), 『죽음의 철학』(근간), 『순간과 영원』(근간), 『정의의 아이디어』(근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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