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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을 읽으며
『재생』을 읽으며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
  • 승인 2019.02.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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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신정이 와도 새해는 온 것 같지 않다. 설날이 왔다 가니 이제 정말 새해다. 삼일운동 백 주년의 해다. 민족 전체가 독립을 염원하며 떨쳐 일어난 해였다.

그때 이광수는 삼일운동을 앞두고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썼다.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이라는 것을 결성하고 민족 자결을 주창했던 이 역사적 행위에서 『무정』의 청년 작가 이광수는 주역 가운데 주역이었다. 곧이어 그는 상해로 나아가 1907년경부터 내면적 관계를 형성해 온 도산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 원동지부의 회원이 되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이 되어 활동했다.

그런 그가 삼일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조선을 강점하고 있던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1921년 3월, 필자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신문에 그는 ‘귀순증’을 가지고 신의주를 통해 귀국, 일경에 피검되었으나 사법적인 제재는 피할 수 있었다. 상해로까지 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왜 조선에 돌아온 것일까. 물론 그는 문인, 그것도 소설가였기 때문에 독자대중이라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물고기였으나, 그보다도 어쩌면 상해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독립 투쟁 노선에 절망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안창호는 이광수의 귀국을 만류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고 했고, 그러면서도 귀국해서는 1922년 6월 안창호의 사상을 떠받든 수양동맹회를 결성해 활동에 나섰다. 안창호와 이광수에 관한 한 논문은 독립 노선과 준비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여, 이광수 노선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귀국해서 본격적인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동아일보』에 1924년 11월 9일부터 1925년 9월 28일까지 긴 시간을 들여 장편소설 『재생』을 써나갔다.

‘재생’은 글자 그대로 다시 산다는 뜻인데, 이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이광수는 신봉구라는 스물일곱 살 먹은 청년과 그의 사랑을 받는 아리따운 여성 김순영의 비극적 사랑을 그렸고, 이야기는 여주인공 순영이 눈멀어 태어난 세 살짜리 딸과 함께 금강산 구룡연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니 어째서 ‘재생’이란 말인가? 하면 순영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희생적 제물로 바쳐졌다고 할 수 있다.

삼일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20년대 전반기의 청년들을 사로잡은 것은 좌절과 절망이었다. 이상적 행위는 죽음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직업도 없이 떠도는 등의 대가를 치러야 했고, 대신에 일신의 영달과 행복, 쾌락을 추구한 이들은 보복당하지 않은 것 같은 시대가 전개된 때문이었다.

어쩌면 필자는 이광수 역시 바로 그러한 인총들 가운데 하나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해에서의 ‘모험’을 뒤로 하고 ‘귀순’한 것 자체가 바로 자신이 그러한 부류의 한 사람임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이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아직 타락하지 않았고 민족을 위해 살 수 있는 태도가 있노라고 강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광수의 내면의 심연은 아주 깊어 국문학자들은 아직도 그의 진의를 놓고 왈가왈부를 하고 있다.

두 젊은 남녀는 함께 역사적 운동에 뛰어들었고 함께 쫓겨 다니며 사랑을 키웠건만 일제의 가혹한 통치는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고 말았다. 봉구는 3년 가까운 수형 생활 끝에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버리고 순영은 돈 많은 사람의 첩이 되어 물질을 따르는 삶 끝에 매독에까지 걸리며 파멸해 간다. 

이광수는 순영을 잃어버리고 복수욕에 미치광이가 되다시피 한 봉구를 그렸고 다시 그로 하여금 농촌 야학에 투신하도록 이야기의 흐름을 뒤틀어 놓았다. 필시 그 자신을 구원하고 싶었던 ‘주관적’ 욕망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작가인 이광수의 이야기까지 포함하여 남의 일 같지 않고 딴 세상 이야기 같지 않다. 이름 하여 ‘촛불혁명’이라는 것이 휩쓸고 간 지금 젊은이들은, 그리고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도 진정 ‘재생’이, ‘다시 살이’, ‘되살이’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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