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2:50 (금)
"내 누드를 보았으니 관람료를 내시오"
"내 누드를 보았으니 관람료를 내시오"
  • 이순남 이화여대 의대 교수
  • 승인 2019.02.12 12: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승의 스승 17. 영원한 스승 김옥길(1921~1990) - 두 번째 이야기

작은 일화를 통해 선생님께 배운 원칙 중 하나는 작은 규칙도 지켜야 한다는 엄격한 가르침이다. 한번은 외래진료를 위해 선생님을 검사장소로 모시고 가게 되었는데 ‘당기시오’가 표시된 문을 밀어서 열어 안내하였다. 이를 보시고는 “‘당기시오’인데 왜 밀고 가느냐?”고 하셨다. 그 사건 이후로 문을 열 때는 기능과 안전을 위해 표시된 ‘미시오’, ‘당기시오’의 지시를 어긴 적이 없다. 그런데 다른 날 원장님께서 똑 같은 행동을 하셨을 때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또 한 번은 타 대학교수로 있는 동기와 함께 항상 대문이 열려있고 음식 나누기를 좋아하는 선생님 댁에 들려 “선생님 배가 고파서 가다가 들렀습니다” 하니 엉뚱하고 귀여웠는지 웃으시며 저녁을 주셨다. 식사 중 친구가 수저를 동시에 들고 먹는 모습을 보시더니 “자네 나이에는 아무도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을 텐데 숟가락과 젓가락은 따로 사용하는 것이 예절이라네“ 하시며 잘못된 습관을 고치도록 충고해 주셨다. 이렇게 연령, 지위, 환경에 따라 당사자를 배려한 적절한 가르침을 주셨다.

칠순잔치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 김옥길 선생님(1990.04)
칠순잔치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 김옥길 선생님(1990.04)

실제로 의사교육현장의 전공의는 환자 앞에서 교수에게 잘못을 지적받을 때 본인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가장 모멸감을 느낀다고 하는 설문조사를 고려하면 가르침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선생님께 일찍이 배워 감사할 따름이다. 선생님은 일생동안 지키신 삶의 원칙인 철저한 준비와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함도 몸소 보여주셨다. 미국 국내선 여행의 경우에도 출발 2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하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시고 초등학생과의 만남일지라도 10분 먼저 나가 기다리시며, 약속을 엄격히 지키는 모습은 큰 교훈이 되었으며 지금도 이를 본받아 실천하고 있다.

선생님은 또 한없이 너그러우셔서 입원 중에는 의과대학 실습학생을 위해 신체진찰과 병력청취, 채혈이나 주사 등 진료행위를 할 수 있도록 기꺼이 몸을 내어 주셨다. 환자권리를 내세워 교육병원에서조차 학생, 전공의의 접근을 거부하는 현 상황과 비교하면 얼마나 진정한 교육자이신가? 수술 1년 후 병이 재발하여 황달이 나타나 담즙을 밖으로 배출하는 관을 넣는 시술 중 늑막염이 합병증으로 발생하여 늑막에 관을 넣는 수술을 진행할 때의 일이다. 통증과 불안이 엄습했을 텐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의료진에게 “내 누드를 보았으니 스트립쇼를 본 관람료를 내시오”라고 말씀하시어 수술실 내에 박장대소가 터지고 수술진의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주시는 유머와 대범함을 보이셔서 그날의 일은 지금도 기억하는 이가 많다.

선생님은 또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시어 받은 선물 정거장 역할만 하실 뿐 어울리거나 원하는 이에게 모두 나누어주셨다. 한번은 문양이 독특한 실크목도리를 하고 계셔 멋지다고 말씀을 드리니 “너 가져라” 하시며 주셨다. 괜히 멋지다고 해 얻게 되어 황송하였고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나 역시 좋다고 하는 동료나 제자에게 내 것을 아낌없이 또 즐겁게 나누어 준다.

선생님은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병과 함께 지내면서 아끼는 제자, 친지들과 함께 슬픔도 같이 하며 서로의 사랑을 나누었다. 재발 후 병이 진행되어 항암제 치료를 중단한 후에는 집에서 지내셨는데 마치 잔칫집 같았고 연세 지긋한 제자들은 어린아이처럼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렸다. 선생님은 조용히 여생을 정리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고마운 사람들에게 일일이 감사와 작별인사를 나누셨다. 그 당시는 젊은 탓으로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깊이 알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스스로 마지막을 정리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어 오늘날 필자가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주셨다. 끝으로 선생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를 포용하고 사랑을 실천하신 훌륭한 교육자이시며 존엄하게 아름다운 삶을 마무리하는 본보기를 보여주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이순남 이화여대 의대 교수
이화여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혈액학』, 『호스피스완화의료』 등의 공저가 있으며,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와 한국임상암학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국가암관리위원회 위원, 남북보건의료교육재단 이사, 한국필란트로피소사이어티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