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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빈곤과 혼란의 시대, 지식인의 눈에 비친 4월 혁명
절대빈곤과 혼란의 시대, 지식인의 눈에 비친 4월 혁명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9.02.12 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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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18) ‘혼돈의 현대사’를 회상함

새 나라에의 희망을 키워가고 있던 제2 공화국 초기의 어떤 글을 보자. 수립 2개월째로 접어들던 1960년 8월 15일자 한국일보 문화면 특별 기고다. 당시를 정체적(停滯的)인 혼란의 연속으로 규정하고 해방 15년의 정신사를 되돌아보자는 의도로 실은 외부 기고였다. 연세대 문과대에서 한국사를 강의하고 있던 홍이섭 교수의 글이었다. 횃불을 들고 전전하는 시민들을 힘찬 필치로 형상화한 김기창 화백의  그림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절대 빈곤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자존을 지켜냈을까?       <다음은 전문>


현대사의 분단이 미세화(微細化)함에 따라 급격히 변하는 40년대 후반기와 50년대로, 이제 다시 보다 초속도(超速度)로 변개(變改)될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지나간 15년간을 회고해 보는 것은 곧 오늘의 혼돈을 우리들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발판으로 하자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혼란은 ‘코스모스’에 대한 대립적 세계로서 그리스 사람들이 지녔던 ‘카오스’ 개념과는 달리 볼 것이다. 한국적 세계가 지니는 카오스의 극복이란 보다 현실을 이해하는 일에 있을 것이다. 이 극복을 위하여 해방 후 오늘까지 우리 사회가 지녀온 역사적인 조건을 가려내 잡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1945년 한국이 어쨌든지 해방을 당하자 정신적으로는 일시 공허감에 사로잡히었다. 사실 냉정히 되돌아보면 해방을 맞이할 때는 어떤 정신적 대비는 없었다. 짧게 잡아도 19세기 말엽에서 그 때까지 반세기간 한국인 자신이 지녀온 자기-한국에의 이해가 원시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은 벗어날 어떤 도맹(跳盟)한 반발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이른바 지식층이 감당할 일이었으나 그들이 ‘한국적 세계’에 대해서 그러한 역량을 지니도록 지적 준비가 없었다. 거기에는 1)인식면에 있어서 전통이 없었다 2)자체 내에서 그러한 준비를 위한 교육이 없었다 3)일제하 식민지 교육은 일절 그러한 정신이 부정 내지 거부되었다 4) 이러한 기반 위에서 외국 유학을 하든 5)국내 식민지 교육 체재에서 부분적으로 이해가 되어도 시대적인 조류까지는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개인적으로 준비함이 있고 7)극소한 부면(部面)에서의 구미의 방법과 의식을 통해 한국 현실이 이해되게 되었으나 주류는 역시 식민지적인 교육에서 키를 잡게 되었다.

다시 이것을 두 개의 ‘이즘’에서 본다면 막연한 ‘민족적인’ 또는 ‘민족주의’ 입장에서 인식하는 태동이 있었으나 역시 먼저 지시한 제조건과 같이 현실적인 억압에서 뛰쳐나와서 보다 고차의 세계를 비상할 수 없는 데서 한국 이해란 좌절되었다. 또 이와 같이 항립적(抗立的)이며 대조적인 코뮤니즘에서도 같은 인식을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전자와 같은 조건에서 1, 2의 문헌을 남겼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 있어 한국 이해의 조건이 황무(선행적인 어떤 이해를 위한 것이 없는) 한데서 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이해를 거부당한 20세기 전반기의 엄혹한 조건은 해방과 더불어 민족 전원에게 정신적 공백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그에 결과된 것이 곧 사회적인 일체의 혼돈이었다. 이 혼란의 수습책이 북한에 있어서는 인민민주주의라고 하는, 사회주의화 단계에 근접하는 방안이었고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에는 어떤 ‘이즘’의 규정은 없었다. (자본주의에의 지나친 기대가 낳은 현실 오해!) 이러한 데서 각양(各樣)의 간판이 내세워졌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독립’과 ‘민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기는 하였으나 체계 있는 논리적인 지시는 없었다. 논리보다 회고주의적인 ‘복고 의식’이 내밀었다.  이러한 감상적인 것은 진정한 ‘민족적인’ 이해에서 저해는 되었을망정 보다 나은 인식의 세계로 이끌 수는 없었다. (아마 이러한 것은 우리의 현대 정치사나 사상사에서 비판 규정지어져야 할 것이다) 그르므로 해방 50년의 단시간에 있어서도 단절되는 우리들의 정신성의 추이는 주체 없이 유동하여 온 것이다.

해방 - 건국 -1959년의 동란까지의 이 시기는 좌익과, 그에 대항하는 막연한 이념이 갈등-분쟁하였으며 1950년의 동란은 이것에의 단정을 보이었으나 한국은 자체 내에 어느 정신적인 기반의 마련은 없었다. 민족주의 운운 하여도 막연한 것이었고,  회고적인 것 (조상 숭배의 고대적인 양상, 근세적인 것을 지고 나오는 것 등)으로 혼란을 일으키었고 ‘반공’ 운운 하였으나 제스추어에 흘렀다.

이와 같은 정신의 추이와 함께 문화의 부박한 모방, 전통 문화에의 감상적인 극찬으로 유동성을 잃은 중세적 모자이크 속에서 문화의 본질적인 이해가 흐려졌던 것이다. (지면 관계로, 실례를 들지는 않는다) 이 속에서 다시 싹튼 것이 일제하의 식민지적인 것으로 민족적인 가장을 하게 되었다. 왜 이러한 악조건을 자초하였느냐? 그것은 사이비 애국 정치에서 보호 육성된 자연적 결과다.

사이비적인 그것은 원래가 정신적으로나 행동에 있어  반민족적이었던 데서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적 의식이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한국 현실의 이해보다는 그것에서의 도피에서 일체를 위장화(僞裝化)하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1950년에서 3년간의 전쟁, 53년 이후 60년 4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외마디소리 같은 “반공”을 꽹과리 두들기는 동안 불안과 위협(경제적으로는 빈곤)에서 생각하는 면은 후퇴의 손을 밟게 하였다. 이런 불리하고 위험한 자리에서 15년간의 공백 ― 불안한 상태를 극복하는 ‘태(態)’를 갖추어야 할 것이 오늘의 급무(急務)이다.   

또 하나는 필자가 이제까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의한 1), 2)의 단문에서 흔히 식민지적인 조건을 충분히 설명은 못하였어도 그것을 지적하기에는 게으르지 않았으나. 이제 우리들이 그 조건을 극복하지 놋 하는 데서 한국 현실 이해는 어디까지 위장적인 속론(俗論)에 머무를 것이라 하겠다. 이제까지 있어 이러한 위장적 이해란 오늘날의 불안을 조장하는 일이 되었을 뿐 아니라 15년간의 우리 역사가 지니는 최대의 치명상은 아마 그러한 찌꺼기를 쓸어버리지 못한 것으로 우리의 정체를 가져왔고, 보다 한국 현실을 혼돈 속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기저가 흐르는 여사(如斯)한 악조건의 극복의 첫 단계가 4월 혁명이었다. 하면, 우리는 그 뒤에 오는 제사태(諸事態)를 좀 바로 보기 위하여서 다시 한국 현실의 냉철한 이해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60년 4월을 좀 더 제대로 이해한 후에 그것을 통한 한국 현재에의 반성이 촉구된다.

한국인이 사회적으로 공동의 훈련이 없는 편의주이적인 생각에서의 이기적인 언행을 지양하는 정신이 심어지는 데에 4월의 행동에서 결과된 제2 공화국의 역사적 의의를 살릴 것이다. 이것은 곧 현재의 혼돈을 극복하는 정신적 초점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능동적 시민 정신의 발현으로서 4월 혁명을 이해하여 새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홍 교수의 미래지향적 주장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언필칭 ‘혁명’의 주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이념의 지속성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한국 민주화 운동사>의 관점은 주목된다. ‘사업회’는 “학생이 민주화 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기성 세대에 비해 순수성이 강하기 때문”이라며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군대를 제외하고는 가장 응집력 강한 집단이 학생”이가고 답을 대신했다. (당시 제목에는 “편의주의적 사고를 지양하라”는 말이 경구처럼 달려있었다.)
 

▲ 4·19 혁명 당시. 시위대는 태극기를 사수했다. 사진출처=한국일보 DB
▲ 4·19 혁명 당시. 시위대는 태극기를 사수했다. 사진출처=한국일보 DB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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