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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온기에 답해 쑤어올린 인간의 소망과 욕망
부처의 온기에 답해 쑤어올린 인간의 소망과 욕망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 영어학
  • 승인 2019.02.12 1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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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음식_ 음식문화사 28. 숭배와 보시의 공양물, 납팔죽(臘八粥)

“죽 그릇 속에 담긴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하나의 혹은 다수의 재료가 뒤엉켜 끓고 있는 죽 그릇을 보면 거기 우리 내면에서 부침을 거듭하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가? 부처는 수자타가 공양을 올린 유미죽을 마심으로써 욕망을 정화하였다.” --- 정자

 수년 전 5월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 갔다가 느닷없이 쏟아진 소나기 때문에 몸이 젖고 추웠다.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오코넬 거리에 있는 이름이 매디건스(Madigan’s)인 펍(pub)을 찾아 들어갔다. 처연한 음색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가 들렸다. “Back to Black”이었다. 메뉴를 보니 스타터로 수프(Chef’s Homemade Soup of the Day)가 있었다. 갓 구운 기네스 소다 빵(Guinness soda bread)과 함께 나온 그 날의 수프는 약간의 곡물가루를 넣고 끓인 따끈한 호박죽 같았다. 맛도 맛이려니와 따뜻한 수프를 먹으니 몸이 풀리고 마음도 누그러졌다.   

▲ 사타터로 수프

 문득 생각했다. 사람들은 왜 죽을 먹을까? 죽이라고 하면 소화 기능이 약한 유아나 환자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느낌이 들면서 정상적인 식사는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누군가 죽을 먹었다고 하면 아프거나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식사를 못 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식량이 부족하고 먹어야 할 입이 많은 시절엔 소량의 식자재로 멀건 죽을 만들어 양으로 배를 채우기도 한다. 죽의 재료도 평상시 먹던 것이 아닌 새롭게 찾아낸 山野菜이기 쉽다. “草根木皮로 목숨을 연명한다”할 때 달래, 냉이, 씀바귀 같은 나물은 별미 반찬이 아니라 죽거리로 쓰이는 경우를 말한다.

죽은 날것인 식자재를 끓여 사람이 먹기 좋게 만든 음식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숭배의 대상인 신에게 올리는 공양물은 인간이 먹는 음식과는 달라야 했다. 최고의 정성이 담겨야 했다. 그 정성이란 신이 음식을 먹기 편한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밥보다는 죽이 더 값지다고 믿었다. 또한 밥은 단일 재료로 만들지만, 죽은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하는 것이 가능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식량 생산이 부족한 탓에 국가에서 混食이라 하여 잡곡밥을 권장했고, 밀가루 소비 촉진을 위한 계몽 교육이 시행되었더랬다. 

고대(기원전 5~3천 년) 황하 중류의 채도(彩陶)를 동반한 신석기 농경문화를 앙소문화(仰韶文化)라고 한다. 그 시기 동북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식용으로 먹는 식물성 식품은 쌀, 조, 기장 세 종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력이라는 이름의 세 발 솥 위에 올린 시루에 넣고 쪄먹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밀 농사가 동북아까지 오는 데에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뒤늦게 들어왔지만 새로운 것이었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2세기경 중원의 송나라에서는 다양한 국수가 탄생하고 음식문화가 꽃을 피웠다.

승원에서는 불단에 국수를 올리고 예불 의식을 거행했다. 갖은 소망이 담긴 기도와 염불이 끝난 뒤 十方三世의 諸佛이 시식한 국수를 경건한 마음으로 받들어 먹는 승려들과 신도들은 부처의 온기를 느끼며 안심했다. 그리고 허망하고 고난에 가득 찬 사바세계를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이쪽에서도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부처의 가피(加被: 보살핌, 보호)를 얻으려면 부처에게 꽃이든 향이든 과일이든 음식이든 마지를 올려야 한다. 부처에게 올리는 供養을 摩旨라고 한다. 이 말은 고대 산스크리트(Sanskrit, ‘holy language’라는 뜻으로 梵語라고 함) maghi의 음차어로 본래는 신단의 영약인 약초의 일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摩?라고도 표기한다. 최고의 스승인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 즉 공양은 공양주가 밥을 지을 때나 뜸을 들일 때 잡다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하며, 밥이 다 되면 제일 잘된 부분을 퍼서 마지 그릇에 담아 진지를 올린다. 그리고 대개 천수경을 독송한다. 부처는 생전에 巳時에만 一種食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에게는 사시공양만을 올린다. 그 뜻을 따라 절에서는 아침 공양을 朝供이라 하여 주로 죽을 먹었고 그 이름을 晨粥(새벽 죽이라는 뜻) 또는 朝粥이라고 했다.

냉정하게 말해 공양은 순수한 바침이라기보다 나약한 중생의 자질구레한 소망을 담은 뇌물 성격의 헌물이랄 수 있다. 그러나 수도자의 경우는 달랐고 달라야 하는 것이다. 삭발하고 출세간의 결단을 내린 구도자로서 숭배의 대상이 있을 것이고, 그런 존재에게 공양물을 바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 티끌투성이 塵世에 살며 선한 삶을 꾸리고자 하는 불자들에게 불법을 전하며 공양을 나누는 일은 자비희사요, 바라밀의 으뜸인 보시행위인 것이다.

속세의 인간은 사는 재미를 기념일에서 찾기도 한다. 자신이 믿는 종교 창시자의 생일과 齋日을 기념하고 기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라 할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있고 불교에서는 성도재일, 열반재일 등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12월 8일 도를 이뤘다. 사시사철 더운 나라 인도의 12월은 여전히 덥다. 사람들은 고민했다. 부처가 드시기에 좋고, 맛이 있는 공양물로 어떤 것이 좋을까? 맛있고 향기로운 공양물을 드신 부처께서는 아무래도 정성껏 준비한 공양물을 바치는 자신들을 더 어여삐 여기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납팔죽은 그런 인간의 작은 욕망에서 탄생했다.  

납팔죽(臘八粥) 이야기

후일 사카(釋迦, Shakya)족의 성자(牟尼, muni)라는 뜻의 ‘샤카무니(釋迦牟尼)’로 불린 고타마 싯다르타가 부처(佛陀, Buddha 즉 覺者)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음력 12월 8일을 성도재일(成道齋日)이라고 한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절에서는 죽을 쑤어 불전에 바치고 사람들끼리 나눠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성도재일의 기원은 중국 송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나라 때 禪家에서 12월 8일을 성도일로 정하고 법회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베(Vesak) 또는 웨삭(Wesak)이라고 하는 5월 보름날을 성도일(Buddha Purnima)로 보고 묵상과 팔정도, 관욕 등을 실행한다. 팔리어로는 베사카(Vesakha), 산스크리트로는 바이사카((Vais´akha)라고 부르는 이 날 현세의 중생은 공덕 쌓기를 최고의 의미 있는 일로 여긴다.

성도일을 한자로 납팔일(臘八日)이라고 하는 까닭은 “섣달 납(臘)”을 “사냥할 렵(獵)”으로도 읽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새해가 되기 전 달에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고, 그때 동물들을 사냥해서 제사의 제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냥하는 달”이라는 의미로 음력 12월을 臘月이라고 부르며 따라서 12월 8일을 납팔(臘八)이라고 한다.

중국 청나라 시절 12월이 되면 거리마다 죽을 파는 노점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8일에는 너나없이 납팔죽을 쑤었다. 흰쌀이나 차조에 밤, 마름, 붉은 팥, 잣, 개암나무 열매, 땅콩, 행인(살구씨) 등을 넣고 죽을 끓여 설탕으로 단맛을 내었다. 이웃이나 친지에게 선물할 때는 반드시 배추절임을 곁들였다. 황운곡(黃雲鵠)이 쓴 『粥譜』에는 납팔죽은 도회지 선비가 끓인다는 흥미로운 기록도 있으나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종교는 공포에서 비롯된다. 신은 환란 중에 의지할 대상이다. 원시 단계의 종교에서는 자연재해, 전쟁, 질병, 악귀 등 모든 것이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사막의 종교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신이 함께하므로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했다. 신은 인간이 기대하는 안전의 욕구, 오래 살고자 하는 불멸의 욕망의 대가로 자연재해를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 질병을 치유하고 악귀를 축출하는 의식을 인간에게 전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동짓날에는 팥죽을 쒔다. 악귀가 싫어한다는 붉은 색 팥을 이용해 팥죽을 쑤는 것이다. 음력 12월 8일에는 菜果를 넣은 납팔죽을 쑨다. 신에게 올리는 음식이 따르는 제례든 의식이든, 그리고 기도든 거기에는 소박한 인간의 욕망이 배어있다.

죽을 한자로는 粥(죽)이라 하고 묽은 죽은 鬻(죽), 된 죽은 饘(전)이라 표기한다. 會意字인 粥이라는 글자에서 쌀 米 양 옆의 弓은 수증기 즉 김의 象形이다. 본래 글자인 鬻을 보면 발이 세 개 달린 솥(, 솥 력)에 물을 많이 붓고 솥뚜껑을 연 채 불을 때어 죽을 쑤는 모습이 그려진다. 된 죽이라는 의미의 饘(전)은 六書의 하나인 形聲字로 食은 뜻을 亶은 소리를 나타낸다. 亶의 뜻은 “도탑다, 두껍다”이다. 미죽(粥: , 죽 미) 또한 된 죽을 가리킨다.

“一日不作 一日不食” 음식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불교 계율이다. 기름기 많고 향이 강한 수십 가지 음식을 요란하게 잔뜩 차려놓고 먹는 호사스러운 식사를 경계하는 승단에서는 툭하면 국수 공양을 했고, 걸핏하면 쌀죽을 쑤어 먹었다. 맛이 있어서인지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불가의 승려들은 국수만 보면 웃었고, 그래서 승가에서는 국수를 일러 僧笑라 부른다. “승려의 빗”이라는 뜻의 승소(僧梳: 梳, 얼레빗 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승려들이 죽을 많이 먹다 보니 죽반승(粥飯僧)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글자 그대로는 죽을 먹고 지내는 승려라는 뜻의 이 말이 와전되어 무능한 사람을 조소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피죽도 못 먹었다”라는 말이 있지만, 피는 더 이상 곡물이 아니다. 그러나 전란, 가뭄, 홍수 등의 재해로 지나치게 곤궁하여 먹을 게 없으니 사람마저 잡아먹어야 했을 때 피는 인류 존속에 큰일을 했다. 영양가는 없는 유사 식품이니 먹어도 든든한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피골이 상접하고 행색이 남루한 사람더러 피죽도 못 얻어먹었느냐고 비아냥거리거나 값싼 동정을 보태기 일쑤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인간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무지의 소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죽에 관련된 기사가 많이 나온다. 백성들은 배를 곯거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지경임에도 왕실에서는 녹두죽, 연자죽(蓮子粥)은 말할 것도 없고 양죽(粥: , 숫양 장)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죽을 쑤어 먹었다. 또 앞에서 보았듯 사찰에서는 臘八粥(음력 12월 8일에 불전에 올렸던 공양죽)을 쒀서 사부대중이 나눠 먹었다. 이 죽은 七宝粥이라고도 불렸는데 세간에서도 석가의 성도(成道)를 축하하는 뜻에서 여러 종류의 쌀·콩·과일 등을 넣고 죽을 쒀서 돌아가신 조상에게 바치고 친척과 친지들에게도 보냈다. 일본사람들은 이 죽을 ?糟粥(うんぞうがゆ)이라 부르는데, 갖가지 곡물을 함께 섞어 죽을 쑤다보니 빛깔과 맛이 술 빚고 난 뒤의 술지게미 같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죽’이 본디 우리말이었는지 모르겠다. 죽의 한자어가 죽(粥)이기도 하고, 죽의 사전적 정의는 “곡식을 물에 오래 끓여 알갱이가 흠뻑 무르게 만든 음식”이다. 그런데 여기에 의심을 하게 만드는 옛시조가 있다. 중장 앞부분을 요즘 말로 옮기자면 “조죽과 쌀죽을 백양나무 젓가락으로 찍어서 당신이 드시오”라고 할 수 있는데, 곡식 알갱이가 푹 퍼진 죽이라면 젓가락으로 먹는 일이 가능할까 싶다. 허술한 움막을 짓고 죽을 먹으며 지내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시조의 내용으로 보아 백양나무 잔가지를 꺾어 만든 어설픈 젓가락으로 조금씩 아껴서 죽을 집어 먹는다는 게 아닐까. 참고로 초장의 지명 금화와 금성 그리고 수숫대 등으로 미루어 이곳은 오늘날 강원도 철원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 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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